창조절 2주
그의 발 앞에 엎드리라
마가복음 7:24~37

창조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께 주님께서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영을 부어주시길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링크)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말고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 중에서도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라(약 1:19)’는 말씀을 훈련하여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시라고 권면했습니다. 의식하지 않고도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는 삶’을 살아가셔서 여러분의 삶을 재창조하시길 바랍니다.
살다보면 원하지 않는 폭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고 싶었는데, 어느 날 폭풍의 심연에 빠진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 폭풍만 바라보면 우리는 폭풍의 바다에 익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의 한 복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우리는 최후의 보루인 하나님을 바라봐야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눈물 흘리는 긴 밤이 곧 지나고 새벽이 올 것이며,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슬픔의 상복을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검은 상장(喪章)을 들꽃으로 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성서 일과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과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원하지 않는 푹풍의 심연에서 살아가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귀신이 내 딸에게서 나갔다”하시고 “에바다”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저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는 간절한 마음을,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에게서는 전적인 믿음이 있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종교권력뿐 아니라 정치권력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이들을 인정사정없이 비판하셨습니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들을 비판하는 일은 쉬운 아닙니다. 그런 결과로 받게 될 권력이 횡포뿐 아니라, 자기의 생각이 확고한 사람들의 논리를 무력한다는 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입니다. 그들과의 논쟁 끝에 피곤했던 예수님은 잠시 쉬시면서 재충전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골방의 시간, 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게네사렛에서 두로 지역으로 가신 것이고, 아무도 그것을 알기 원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골방이 필요하셨습니다.
골방은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갖는 곳이라면 어디든 골방입니다. 그래서 골방은 부엌일수도 있고, 숲일 수도 있고, 공원의 벤치일수도 있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너무 분주하게 살지 마십시오. 심지어는 옳은 일도 열심히는 하되 분주하게는 하지 마십시오.
자기만의 골방에서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는 사람이 되면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과 지향점을 분명하게 봅니다. 이 시대의 비극은 많은 사람들이 길과 지향점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가 걸어가는 길의 끝이, 지향점의 끝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골방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시름하며 묵상하는 시간을 꼭 훈련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여러분 삶에 새 길이 열릴 것입니다.
수로보니게(씨로페니키아)는 그리스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입니다.
당시 무역과 상업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이뤄졌으므로, 제법 풍족한 도시였을 것입니다. 제법 풍족한 도시에서 귀신 들린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여인은 딸이 귀신으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작정이었습니다.
항구도시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오가기에 소문이 빠른 지역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적을 유심히 살핀 것이고, 마침내 자기 홀로 예수님을 독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여인의 간절함은 숨어 계시고자 했던 예수님조차도 숨어있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뭔가를 이루고자 할 때에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십시오. 간절한 마음으로 하면 길이 열립니다. 폭풍과도 같은 삶이 닥쳐왔을 때 두려움에 빠져들지 말고, 간절한 마음으로 폭풍이 지나가길 바라면, 폭풍이 계속되지 않을 것을 알게 되고, 폭풍이 주는 유익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아, 이것이 끝이 아니구나!’ 새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고, 선민사상이 강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만 구원해주신다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이방인은 구원밖에 있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는데 과연 예수님이 이방인인 자기의 청을 들어주실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침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모두 열세 개의 치유의 기적이 등장하는데, 열두 개는 유대인에게, 단 하나가 이방인에게 행해졌습니다. 그 하나가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딸이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기 이전에는 이방인은 예수님의 치유의 대상에서도 소외된 것입니다. 그러나 딸의 병을 고치겠다는 간절한 마음은 그녀를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게 했습니다.
그 의미는 낮아질 대로 낮아졌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이든지 시키면 다하겠다고 종들이 주인에게 맹세할 때에 하는 행동이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수님답지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하는데, 아직 그들도 다 먹이질 못했네. 자녀에게 먹여야할 빵을 개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지.” 여기서 자녀들은 유대인이요, 빵을 배불리 먹인다는 것은 ‘구원’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자 여인은 기꺼이 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하지만,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그 부스러기를 좀 먹게 해주십시오.”
간절함과 철저한 낮아짐,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여러분, 간절한 마음으로 이 여인처럼 철저하게 낮아지십시오. 간절하지도 않고, 낮아질 마음도 없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 부스러기 이상의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늘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다가 받은바 은혜도 잃어버리고 삽니다. 부스러기가 모여 열두 광주리를 채우듯, 작은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이들의 삶이 풍성한 삶이 된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두십시오.
이 일은 갈릴리 바다에서 생긴 일이고,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첫째,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당사자가 자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데리고 온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받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니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니 삶이 일그러진 이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 아닐까요. 둘째, 치유의 기적을 단지,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상징하는 은유입니다. ‘말’이 그 사람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온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를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를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온 사람들, 그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그동안의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손만 얹어주시면 나을 것 같은데,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떼어 어디론가 데리고 갑니다. 그 다음에 치료방법을 보십시오. 22절에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에바다!”하시니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제대로 듣고 말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참으로 괴기스럽기까지 합니다. 손가락을 양 귀에 넣은 것은 그래도 그럴만한데,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댄 것’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눈 먼 사람을 고치실 때에도 ‘땅에 침을 뱉으셔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셨다(요9:6)’는 내용이 있긴 합니다. 요한복음의 본문은 진흙을 반죽한 행위가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과 관련이 있어서 일부러 그럴게 했다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침’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침’에는 무슨 약효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침을 뱉는 행위’는 불경스러운 행동입니다.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은 상식입니까, 아닙니까?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었으니 눈은 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침을 뱉어 혀에 대려고할 때 거부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마가복음의 본문을 통해서 ‘수용, 받아들임과 기적의 연관성’을 봅니다. 여인에게는 간절함과 전적인 낮아짐이 기적을 만드는 통로였다면, 귀 먹고 말이 어눌한 이 사람에게는 전적인 수용이 기적을 만드는 통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적의 삶을 살아가려면 ‘간절함과 낮아짐과 전적인 받아들임’ 이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합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낮아짐과 받아들임은 간절함보다도 더 어렵습니다.
성경말씀을 보십시오. 오늘날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다릅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힘들죠. 낮아짐은 또 어떻습니까? 그렇게 살면 사람들이 만만하게 봅니다. 그래서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날 이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바보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간절한 마음을 품고, 끊임없이 낮아지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의 발 아래 엎드릴 때,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시는 기적과도 같은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거둠 기도]

사랑이신 하나님,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심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통해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삶으로 사는 이들을 통하여 귀한 일들을 이뤄오셨습니다. 주님, 간절함과 낮아짐과 받아들임의 삶을 살아가고자하오니,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 그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