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리에서 에우메니데스로
종교개혁의 달을 맞아 '개혁'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개혁을 잘못된 것을 바로잡거나 낡은 제도를 새로운 제도로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개혁이다.
그러나 제도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어도 정작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참된 개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사 C. 누스바움의 『분노와 용서』를 읽다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를 다시 만났다.
그리스 신화에는 복수의 여신들이 등장한다.
퓨리(Furies), 그리스어로 에리니에스(Erinyes)라고 불리는 여신들이다.
이들은 피를 흘리게 한 죄를 끝까지 추적하여 응징한다.
누군가 살인을 저지르면 그 죄를 묻고,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
그들에게 정의란 잘못을 저지른 자가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받는 것이었다.
『오레스테이아』에는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비극이 등장한다.
아가멤논은 아내 클리타이메스트라에게 살해당하고,
아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를 죽인다.
아버지를 위한 복수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죄가 된 것이다.
이번에는 복수의 여신들이 오레스테스를 추적한다.
복수는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정의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복수의 이유가 된다.
그런데 이 비극의 마지막 작품인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아테나는 오레스테스를 재판에 세우고, 복수의 여신들을 설득한다.
피의 복수를 반복하는 대신 공동체의 법과 재판을 통해 정의를 세우자는 것이다.
마침내 복수의 여신들은 아테네 공동체를 지키는 존재로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에우메니데스(Eumenides), 곧 '자비로운 여신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복수의 여신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가진 힘도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 힘이 향하는 방향이 달라졌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보복에서 미래의 공동체를 지키는 정의로, 파괴에서 보호로, 복수에서 자비로 전환된 것이다.
누스바움은 말한다.
보복의 소망은 해로우면서도 공허하다고.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그에게 똑같은 상처를 돌려준들 내가 받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고통받는다고 빼앗긴 시간이 돌아오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복수는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 낼 뿐,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리지 못한다.
간디의 말로 널리 알려진 경구가 있다.
"눈에는 눈을 고집하면 온 세상의 눈이 멀게 된다."
복수는 정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지만, 결국 모두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종교개혁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은 복수의 여신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복수의 여신이 자비로운 여신으로 변화하는 일이다.
잘못을 지적하는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열정이 사람을 정죄하고 배제하는 데서 생명을 살리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일이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신앙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죄당하고 배제되었는가.
자신의 믿음만이 옳다는 확신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심지어 사랑을 말하면서 혐오하고, 용서를 설교하면서 보복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때 교회는 자비로운 여신이 아니라 복수의 여신을 닮아 있었다.
그렇다고 자비가 불의를 눈감아 주는 일은 아니다.
에우메니데스가 된 여신들은 여전히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존재다.
자비는 정의의 포기가 아니라 정의가 실현되는 방식의 변화다.
잘못에 대한 책임은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상대방을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잘못이 반복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원수 사랑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거나 불의를 묵인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악을 또 다른 악으로 되갚지 말라는 요청이며,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열라는 초대다.
물론 용서를 피해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용서마저 의무가 되는 순간, 상처받은 사람은 또 다른 폭력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은 다른 사람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확신했던 것을 다시 묻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믿었던 일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이었는지 돌아보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가진 신앙의 열정이 누군가를 살리고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를 밀어내고 있는지 살피는 일이다.
더 나아가 개인의 변화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정죄와 배제를 반복하게 만드는 교회의 관행과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복수의 여신들이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만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복수를 대신할 새로운 정의의 질서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509주년을 맞는다.
509년 전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고 전해지는 사건을 기념하는 것만으로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갈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나는 지금 퓨리인가, 에우메니데스인가?
나의 신앙은 누군가를 심판하는 힘으로 작용하는가, 아니면 상처받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힘으로 작용하는가?
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다른 사람의 입을 막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나의 한계를 인정하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복수의 여신이 자비로운 여신으로 변화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종교개혁의 한 모습이 아닐까.
종교개혁은 내가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내가 가진 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새롭게 결정하는 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