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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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달 02] 자신의 믿음을 믿는 사람들

  • 관리자
  • 2026-10-11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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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달 둘째 주(20261011)
자신의 믿음을 믿는 사람들
마가복음 14:27-31, 66-72



지난주 우리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고문당하고 죽어갑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그들의 고통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출렁이고, 새들은 지저귀며, 하늘은 아름답습니다.
로드리고는 묻습니다.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지난주 우리는 이 질문을 시편 22편과 연결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침묵이 곧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하나님은 고난 받는 인간을 멀리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통을 함께 경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침묵』을 조금 더 읽어가면 로드리고에게 또 다른 문제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침묵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로드리고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필요하다면 순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만난 한 사람 때문에 그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기치지로입니다.

■ 배신자 기치지로


기치지로는 『침묵』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영웅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술을 마시고, 겁이 많고, 위험한 일이 생기면 도망칩니다.
살아남기 위해 비겁한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믿던 그의 가족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신앙을 버리라는 강요 앞에서 가족들은 믿음을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기치지로는 후미에를 밟고 배교했습니다.
가족들은 죽었고 자신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상합니다.
배교했으면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떠나버리면 될 텐데 그러지 못합니다.
로드리고와 가르페 신부가 일본으로 들어갈 때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위험을 피해 도망치면서도 다시 나타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또다시 잘못을 저지르고, 마침내 돈을 받고 로드리고를 밀고하기까지 합니다.
이쯤 되면 독자들도 기치지로에게 화가 납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그런데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기치지로는 로드리고를 배신하고도 다시 찾아와 고해성사를 청합니다.
배신하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와 용서를 구합니다.
이것이 기치지로라는 인물의 특징입니다.
 

■ 왜 기치지로는 떠나지 못하는가?


이 대목에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기치지로는 왜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떠나지 못했을까요?
그에게 신앙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신앙 때문에 가족들이 죽었고 자신은 배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살아가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배반합니다.
용서를 구하면서도 다시 죄를 짓습니다.
어쩌면 기치지로에게 신앙은 확신에 찬 사람의 당당한 고백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알면서도 끝내 끊어버리지 못하는 관계였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기치지로가 용서를 구했다는 사실이 그의 배신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잘못으로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잘못을 판단하는 것과 그를 인간으로서 완전히 버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가 다시 돌아와 용서를 구할 가능성까지 부정해야 할까요?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기치지로 같은 사람에게도 복음일 수 있는가?
엔도 슈사쿠는 우리에게 이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


로드리고는 처음에 기치지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은 목숨을 걸고 일본까지 찾아왔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을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치지로는 조금만 위험해져도 도망치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배신합니다.
로드리고에게 기치지로는 믿음이 약한 사람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기치지로를 판단할 수 있는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




그런데 정말 다를까요?
로드리고는 아직 기치지로가 경험한 두려움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순교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 순간이 찾아왔을 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순간에도 정직할 수 있을까요?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의를 위해 내가 가진 것을 잃어야 할 때에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기대했던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실 때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아는 자신은 아직 시험받지 않은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이 전부일까?


교회 안에는 자신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기도했더니 응답받았고, 어려울 때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셨다고 간증합니다.
귀한 경험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는 것입니다.

자신처럼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처럼 응답받지 못하면 무언가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인 것처럼 말합니다.

반대편에는 하나님께 실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삶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떠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그 사이에 서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을 너무 잘 안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양쪽 모두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일까요?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하나님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이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깊이 앞에서도 겸손하게 서는 일이라고 저는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좋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신의 믿음이 좋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기치지로는 결코 모범적인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약함을 알고 있었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강한 신앙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 베드로도 자신을 몰랐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더욱 힘주어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저는 베드로가 거짓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그리고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울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몰랐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두려워할 수 있는 사람인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사람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이전보다 더 깊이 알게 됩니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자신이 점점 강한 사람이 되어간다고 확신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알아가는 것일까요?


자신의 약함을 안다는 것이 비겁함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약함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약함을 쉽게 정죄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조금 더 신중해집니다.
자신도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 로드리고가 발견한 자기 자신


로드리고는 일본에서 점차 자신이 믿었던 자기 모습을 잃어갑니다.
존경하던 스승 페레이라는 배교했고, 일본의 신자들은 처참하게 죽어갑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고, 기치지로마저 자신을 배신합니다.

그런데 붙잡힌 로드리고는 더욱 고통스러운 상황을 마주합니다.
박해자들은 그가 배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계속 고문당하게 되는 상황을 만듭니다.
로드리고는 자신이 죽는 것은 각오했습니다. 차라리 순교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신앙을 지키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상황은 달랐습니다.
자신이 고난받는 것과 다른 사람이 고난받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이제 로드리고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정말 기치지로와 다른가?'
기치지로는 살고 싶어서 배교했습니다.
로드리고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흔들립니다.
두 사람의 처지와 선택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더 이상 기치지로를 단순히 자기보다 못한 신앙인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자신도 연약한 인간이며,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약한 사람에게 복음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저는 종교개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은 올바른 교리를 세우는 일만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언제나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을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기치지로나 베드로 같은 사람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도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미 의로운 사람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루터가 강조했던 은혜도 여기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인지 알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도 결심합니다.
다시는 미워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욕심부리지 않겠다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또 넘어집니다.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안에도 기치지로가 있습니다.
 

■ 종교개혁은 자신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지난주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한 걸음 더 들어왔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정말 내가 생각하는 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판단합니다.
“저 사람은 믿음이 없다. 저 사람은 신앙이 부족하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기치지로를 통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뒤에야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다른 사람을 조금 더 자비롭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아닐까요?

종교개혁은 바로 이런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교회를 개혁하기 전에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기 전에 나의 믿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도 기치지로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 역시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 다음 주를 향하여


그런데 『침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로드리고는 마침내 후미에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이 새겨진 판입니다.
그것을 밟으면 그는 배교자가 됩니다.
밟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계속 고통받습니다.
그 순간 로드리고는 자신이 평생 믿어왔던 신앙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정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인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로드리고는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그리스도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다음 주에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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