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후찬양예배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불과 한 달 전, 이곳에서 여러분과 찬양을 부르고 말씀을 나누었는데,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제 개인적인 느낌일까요?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추석을 지나고 나니 찬 바람이 많이 불고, 계절이 바뀌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요즘입니다. 모쪼록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한 몸과 마음에서 건강한 신앙 생활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을 나와 다른 존재로 구분하는 이분법은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인류는 자기 자신과 남을 구분했고, 사회를 구성하면서 나를 포함한 우리라는 범위로 확대했고, 우리라는 구분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을 가리켜 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인류의 역사는 우리와 다른 이들을 구분하여 차별하고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역사도 다르지 않아서 중국과 일제라는 강대국에 억눌려 살았고 해방을 맞이했지만, 여러 강대국의 욕망에 휘둘려 전쟁이라는 인류 최악의 사건을 경험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사회는 좌우 냉전의 시대를 지나고 잠깐 화해와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는 듯하더니 지금은 다시 예전의 시대를 방불케 하는 적대와 반감이 팽배한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고지전’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2011년 작품인데, 소재로 625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625를 다뤘던 이전의 영화와 달랐습니다. 이 영화엔 정치 선전이 없습니다. 남의 이념이 어떻고, 북의 사상이 어땠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는 오직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만 나옵니다. 1951년, 모든 걸 태울 것처럼 타올랐던 전쟁의 횃불이 사그라지고 자국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소규모의 국지전이 벌어지는 시기에 휴전이라는 기쁜 소식이 전해집니다. ‘아, 드디어 죽고 죽이는 전쟁이 끝났다.’라는 환호를 터트리기도 전에, 강대국과 남북의 정치인들은 휴전에 서명했지만, 그 종이의 효력이 발생하기 전까지 조금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기로 합니다. 충격적인 이 결정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앞의 적이 아닌 내가 더 이익을 많이 얻겠다는 정치적 욕망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휴전의 효력이 발효되기 전까지 전쟁터에 놓인 이들은 욕망을 뒤집어쓴 짐승들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다시 서로를 죽고 죽이게 됩니다. 진짜 휴전이 성립되자, 이들은 허탈해하며 뜨거운 피눈물을 흘립니다. 영화는 625가 남긴 진짜 상처와 피해는 아무 죄 없는 사람들만 입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은 혼란 속에 있습니다. 강대국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들은 끊임없이 독립을 꿈꾸었습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큰 벌을 받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신뢰를 보이면 강대국의 지배를 벗어나 예전처럼, 다윗과 솔로몬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지배하는 강대국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로 이름만 바뀌었지, 도무지 그들이 독립할 여건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새 잠깐 독립했었지만, 다시 강대국의 침략에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주 바뀌는 강대국의 권력에 빌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자리만 보전해 주면, 누가 지배하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무장하고 독립단체를 만들어 지도자나 로마의 귀족에게 테러를 가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로마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어 그들이 군대를 끌고 오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포도원은 예수님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지난 이야기 때도 말씀드렸듯, 로마의 귀족들은 그들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식민지에 돈이 되는 작물을 대규모로 재배하는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당연히 농장에 없습니다. 로마에 살기 때문입니다. 포도가 열매를 맺을 시기가 되자, 주인은 종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일꾼들이 그를 몰아내기 시작합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그랬습니다. 심지어 주인은 그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포도원을 차지할 목적으로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와 일꾼들에게 복수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지 않겠습니까? 누가 봐도 당연한 귀결입니다. 어느 누가 자기 아들과 재산을 가로채려는 이들을 놔둘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9절에 나옵니다. 백성들이죠. 이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힘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그들의 바람을 이뤄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몇몇이 무장독립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로마로부터 독립하자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당대 최고의 강대국이었습니다. 섣불리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 이스라엘을 쑥대밭으로 만들게 뻔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을 원하는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예수님의 존재는 그들의 바람을 이뤄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고, 점차 그들의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전 이 말씀이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백성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 이야기를 알레고리로 풀어냈습니다. 비유를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방식이 널리 퍼진 이유는 메시지가 뚜렷하고 명확해서 강력한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수께끼의 정답처럼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를 뜻하고 주인은 하나님이며, 그의 종은 예언자고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를 억압하고 예수님을 죽인 이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아무 힘도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안하무인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행동은 처벌받을 거라는 강력한 경고를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7절의 말씀은 구약성경 이사야 5장 22절에 나오는 구절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알레고리로 해석했다는 근거가 됩니다. 복음서를 쓴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뤄졌다는 고백을 자주 합니다. 결국 이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해하기 위한 작업이 가속화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듣는 이들이 율법학자나 대제사장이 아니라 그가 사랑했던 백성들이었다면 이야기의 뜻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지도자와 로마 귀족을 향한 테러가 벌어지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로마로부터 독립을 꿈꾸었습니다. 이들은 무장해서라도 로마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전쟁을 감수하겠다는 선택은 너무 위험했습니다. 로마는 자기 이익을 포기하며 순순히 이스라엘의 독립을 두고 볼 리 없었습니다. 분명 피의 바람이 불어닥칠 게 뻔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편에 서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무장 독립을 위한 일에도 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이 그의 하나님 나라를 오해해서 예수님이 새로 독립한 나라의 왕이 될 거라고 판단했지만,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그들이 꿈꾸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과연 무엇을 위한 독립이었을까요? 이들에게 독립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이스라엘이 꿈꾼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 나라는 로마와 달랐을까요?
저는 지난 9월 말부터 기장총회 교육국에서 진행하는 교재집필 아카데미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총회에서는 주기적으로 신앙교육을 위한 교재를 발행하고 있는데, 그에 관한 교육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모임 때, 유아용 그러니까 유치부 친구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재를 위한 교육을 진행했는데, 그때 했던 건 성경 본문을 정하고 그 본문에서 말하는 주제를 단순하게 추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른을 대상으로 교재를 집필할 때는 여러 단어로, 어려운 말로 설명할 수 있으니 불편함이 없지만, 4세부터 6세의 친구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며 오늘 본문을 읽을 때, 마음에 남았던 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16절의 마지막 부분,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 말하였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치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처럼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도 바빌로니아에 멸망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순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으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로마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로마에 대항하여 무장해서 독립하려는 무리에도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아픈 사람을 돌보고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한 백성들이 죽음의 길로 가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로마와 다르지 않은 욕망을 마음에 품고,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은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 중에서도 가장 약한 사람이 공동체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강대국이 그들을 지배했을 때나 짧게 독립했던 때나 백성은 늘 피폐했고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이들을 위한 지도자들의 행동이나 심지어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는 이들의 투쟁도 백성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이 제시한 새로운 길은 누구도 품지 못했던 백성을 품고 있습니다. 이는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명령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새로운 길은 지금 갈등과 혼란이 가득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좌와 우, 남과 북, 젊은이와 어르신, 아이와 어른, 여성과 남성 등 수많은 이유 속에 갈등이 넘치고, 나 혹은 내가 속한 집단을 위해 시기하거나 질투하고 나쁜 마음을 먹고 생각하는 일들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프리카의 자원을 두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세상입니다. 이런 갈등과 분쟁과 혼란 사이에 가장 약한 사람들은 어떤 대우를 받습니까? 그들이 벌이는 행동의 목적 중에 사람이 존재하나요? 오직 욕망만 있는 건 아닙니까? 지난 수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이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건 너무도 유명한 가르침인데, 우린 이웃은 고사하고 같은 공동체에 있는 교우나 가족 심지어 나조차도 사랑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분법적 갈등과 분쟁의 상황에서도 가장 약한 이들은 누구인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그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잊을 때가 있습니다. 욕망으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보고, 쓰러지고 괴로워하는 줄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하고 기본적으로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나 이념에 사로잡힐 때, 상대도 나처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내 앞의 상대를 다르게 보이게 하는 것이 욕망의 역할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에 우리만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고, 피부색이 다른 사람도 없으며 장애인이나 소수자는 보이지도 않는 곳은 아닌지요? 우리의 욕망과 바람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세계가 모두 담기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사랑한 백성이 올바르지 않은 길로 가는 모습을 안타까워하셨고, 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의 갈등으로 인해 가장 힘없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 놓이는지, 내가 만드는 갈등의 이유는 무엇인지 그것이 혹시 내 욕심이나 과도한 바람은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그 외 새로운 길이 있을 수 있음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와 전쟁을 벌여 독립하려는 이스라엘 백성을 측은히 여기시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며 살라고 말씀하신 오늘의 이야기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설교자 : 허준혁 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