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열기
소설 ‘84년생 김지영’은 출판되자마자 사회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여성주의 즉, 페미니즘 관점으로 한 여성의 삶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여성의 삶을 그린 작품은 있었지만,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본 우리 사회를 보여준 작품은 흔치 않았습니다. 입소문을 타면서 많은 사람이 읽었고 반발도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화가 개봉되지도 않았는데, 인터넷 평점이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일부 사람들이 영화를 보지도 않고 최저평점을 매기는 등 온라인 테러를 감행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이 소설과 영화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 걸까요?
저도 소설과 영화를 모두 보았습니다. 제목처럼 이야기는 84년에 태어난 김지영이라는 인물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가 80년생이니까 제 또래의 여성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제 또래에도 지영이라는 이름이 흔했기에 ‘84년생 김지영’은 제 또래에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을 모델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김지영은 세 남매 중 둘째였습니다. 위로 언니가 있었고, 김지영 다음으로도 여동생이 태어났어야 했는데, 부모는 아들을 원해서 낙태했고, 결국 셋째는 딸이 아닌 아들이 되었습니다. 김지영은 가정과 학교에서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었고, 사회에 나와서도 차별로 인한 혐오범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 자기를 괴롭히던 남학생이 자기를 좋아해서 그랬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경험하고 나서 이후에 스토킹 범죄의 대상이 되었고 첫 손님으로 여성을 안 태운다는 승차 거부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등 84년생 김지영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성차별을 모두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한 번쯤은 들었고 두 번 정도는 경험담으로 들었던 이야기들이어서 큰 괴리감은 없었습니다. 읽고 보는 내내 친누나가 생각났고, 나로 인해 누나가 겪었을 차별에 대해 곱씹게 되었습니다. 실제 누나는 저보다 공부를 훨씬 잘했고, 학교에서도 모범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를 게을리한 탓에 누나는 가고 싶었던 유학도 포기했고, 기업에 취직했습니다. 누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성적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고 과외로 아르바이트까지 했습니다. 과연 친누나의 삶이 84년생 김지영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누나에게 미안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거짓으로 대중을 선동한다고 분노했습니다. 분명 그들도 여자 형제가 있었다면, 충분히 공감할 내용이었을 텐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물론 성차별을 여성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라는 것은 이제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 정도로 세뇌가 된 것입니다. 차별을 차별로 느끼지 못하고, 나쁜 행동이지만 그냥 꾹 참고 넘겨야 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이 시대의 여성들은 참고 참다가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누군가는 지금 사회는 많이 발전했다고 말합니다. 사실입니다. 지금 사회는 성차별적 차원에서 이전보다 발전된 사회입니다. 하지만, 더 나가야 합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회사에서는 같은 일을 해도 남성보다 급여를 적게 받고,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한 업무에서 배제하며, 더 많은 책임과 희생을 강요합니다. 이는 비단 회사뿐만 아니라 가정, 학교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뤄집니다. 특히, 학교에서 성차별적 교육(남성이 주체적인 존재라면, 여성은 돕는 존재처럼)이 행해지는 경우가 있고, 그런 문화 속에서 여성은 차별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천부인권’은 사전에 의하면 천부, 즉 하늘이 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는 권리를 말합니다. ‘천부인권’은 초국가적, 전법률적 불가침의 권리이기에 국가권력이라 할지라도 침해할 수 없으며, 국가가 이를 침해한 경우, 권력자에 대해 저항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10조에서도 ‘천부인권’을 바탕에 두고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갈등과 논쟁의 주제가 된 차별금지법은 ‘합리적 이유 없이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성적지향성,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등을 이유로 고용,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에 있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법률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아직 사회는 이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예수님처럼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 vs 남편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여인 관련 두 이야기는 지난 시간에 다뤘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와 오늘 다룰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할 때도 말씀드렸던 것, 기억나십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 남성이 와서 말을 건넸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집 밖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말을 거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아예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자,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여인에게 남편이 왜 없었습니까? 여인이 어렸을 때, 결혼한 남성이 너무 쉽게 이혼장을 썼고, 그 이후에 살기 위해 했던 결혼에 여러 남성이 등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여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간음하다 잡혀 왔다고 간단하게 기록되었지만, ‘예수와 만난 사람들’에서는 당시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로 그려졌습니다. 이 여인 역시 쉽게 쓴 이혼장으로 인해 크게 상처받았고, 오히려 그런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버렸습니다.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남편이 괴로워할 때 가장 큰 쾌감을 느꼈다는 여인의 고백은 남편에 대한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느끼게 해줍니다. 물론 여인이 죄가 없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에 못지않게 상대의 잘못도, 사회도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시 남성과 사회는 비난의 화살을 여성에게만 겨누고 있었습니다. 간음한 현장을 덮쳤으면서도 함께 잘못한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인만 끌고 왔습니다. 같은 죄를 저질러도 남성의 죄는 묵인되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법도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처벌하게 되어 있는데, 늘 비난과 처벌은 여성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여인을 처벌하겠다고 끌고 온 것도 남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도대체 이혼장이라는 건 왜 만든 걸까? 이혼장이 없었다면, 이런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이혼장은 간음을 중죄로 여겼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만약 남성이 이혼하지 않은 여인과 관계를 맺거나 결혼했을 때, 간음으로 간주 되어 처벌받았기 때문에 이런 불상사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이혼장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도를 만든 의도와 달리 남성들은 이혼장을 쉽게 쓰기 시작했습니다. 상대와 관계가 틀어지거나 가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할 때, 이혼장을 썼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혼이라는 이름으로 버림받은 여성들은 독립적으로 경제 활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남성과 결혼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당시 사회의 기득권자인 남성과 그들이 만든 시스템이 여성을 차별하고 있으니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은 오롯이 피해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혼장을 쉽게 쓰는 남성들을 비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에는 당시 이혼제도를 비판하는 이야기가 공통으로 실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은 우리는 여인과 남편, 둘 중에 누가 더 잘못을 저질렀나에 대해 판단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vs 율법학자와 바리새인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의 주된 내용은 간음하는 여인 이야기이지만, 사진 액자처럼 그 내용을 감싸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율법학자 그리고 바리새인 간의 대립입니다. 예수님은 위선과 오만으로 똘똘 뭉친 유대 귀족 사제들과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을 비판하고 그들의 허위를 폭로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는 율법으로 사회를 통제하고 있었고 그것이 사회를 위한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율법 위에 군림하려고 했습니다. 율법을 사람을 위해서 해석하고 적용한 게 아니라 억압하고 짓누르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억압당하고 짓눌린 사람들을 율법으로부터 해방하셨고 그들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세운 통제시스템을 예수님이 무력화시키자 이에 분노한 이들은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거나 고소할 근거를 찾기 위해 잘못된 선택을 유도하는 덫을 놓기도 했습니다. 오늘 같은 이야기가 바로 덫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간음한 여인을 그 자리에서 처벌하지 않고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예수님께 데려와서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의 법에는 간음한 이들을 처벌하라고 나와 있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평소처럼 율법학자나 바리새인의 말을 듣지 않고 여인을 처벌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는 모세의 율법을 어긴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들의 말처럼 여인을 처벌하라고 한다면, 그가 지금까지 이혼장을 쉽게 쓰는 남성들을 비판했던 것, 여성들을 위로하면 건넸던 말, 사람들에게 가르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스스로 반대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거짓 예언자로 예수님을 고소할 명분이 생깁니다.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위기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골똘히 고민하다가 주위가 선명해지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바로 오늘의 제목,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단, 간음한 여인에게 처형을 집행하게 했으니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덧붙여 아무도 그 형벌의 집행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던 사람들의 양심을 깨워서 집행하지 못하게 했고, 죄인을 양산하는 사회 시스템을 통해 스스로 옳음을 주장하려던 이들의 위선을 폭로한 것입니다.
차별을 묵인하는 사회
우린 오랜 역사만큼이나 여러 가지의 이유로 행한 차별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성차별은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어릴 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미리 구분하고 교육한다든지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남자아이를 혼내지 않고 오히려 여자아이에게 네게 호감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잘못 가르치는 일이 아직도 일어납니다. 사회에서 여전히 성차별적 언어를 사용하고 대화하며 여성에게 사회의 문이 열려 있다고 주장하지만, 권력을 갖는 고위공무원이나 회사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임원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유리천장이 있습니다. 또, 같은 노동을 해도 급여를 다르게 받고, 중요한 일을 차별하면서 맡기는 등의 일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육아나 가사 같은 매우 힘들지만, 구체적 성과나 경제적 이익이 눈에 띄지 않는 일을 맡기기 위해 모성애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차별을 묵인하고 불합리한 사고를 강화합니다. 만약 차별을 전통 혹은 관행이라는 이유로 지속한다면, 사회가 발전하는 길을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차별을 없애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사회가 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예전에는 차별을 없애는 일이 옳다는 윤리 의식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옳은 방법을 택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차별을 묵인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조한다면 그 사회 역시 부도덕하고 불합리하다는 오명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성숙한 기독교인의 자세와 행동
기독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당시 조선의 왕은 하늘 아래 또 다른 왕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신분제로 철저히 구분되던 때에 하나님 아래 모두가 한 가족 혹은 형제라고 하는 가르침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기준이라면, 차별이 없고 평등한 종교가 바로 기독교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사회에서 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때에 기독교가 차별을 묵인하고 나아가 성차별 발언을 하고 사회의 발전에 역행하는 일을 도모한다면, 기독교는 앞으로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종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이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을 따른다면, 사회의 발전에 앞장서는 성숙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선택은 쉽지 않습니다.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이들의 곁에 서는 일은 늘 두렵고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갈등과 분쟁에 휩싸이고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불이익을 당하고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숙한 기독교인들이 그들 곁에 서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따라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만 잘 살면 돼, 우리 가족만 행복하면 예수님을 따라 산다고 볼 수 있을까요?
오늘 이야기를 읽고, 여기 계신 여러분들의 자녀를 돌아봐 주십시오.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이 어떠한가 하고 생각해보시고, 혹 손녀 손자가 있으시다면 그들이 사는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할지 생각해주십시오.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못합니다. 서로가 인간으로 존중하고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할 때,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사회를 그렇게 만드는 일에 기독교인들이 지지하고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일임과 동시에 우리의 자녀들, 손녀 손자들이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에서 살 수 있게 하는 일이 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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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은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을 교재로 진행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