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열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할 때, ‘평면적이다’ 혹은 ‘입체적이다’ 하는 표현을 쓸 때가 있습니다. ‘평면적’인 성격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보이는 그의 성격이 하나인 것을 가리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성격은 인물의 단단하고 확고한 내면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고구마를 몇 개를 한꺼번에 먹은 듯 꽉 막히고 답답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반면 ‘입체적’인 성격은 인물이 다양한 모습을 가진 데다 그 변화도 보여줄 수 있어 소설이나 드라마에 극적인 요소를 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 하나의 이야기에는 주요한 한 두 사람의 ‘입체적’ 인물이 등장하고, 그 주변으로 갈수록 ‘평면적’인 인물이 많습니다. 주변 인물까지 ‘입체적’으로 다루려면 분량이 많아지고 쏟아야 할 에너지가 많아서 힘들기 때문입니다. 주요한 몇 명의 성격만이라도 잘 그린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주목시키고 작가가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주인공이지만, 성격이 거의 변하지 않는 ‘평면적’ 인물이고 오히려 그를 만난 사람들은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에 불과하지만,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는 ‘입체적’ 인물들입니다. 우리가 봐왔던 인물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 못지않게 ‘평면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바리새인’도 우리가 신경 쓰지 않고 성경을 읽는다면,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로 스쳐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미지는 오랜 신앙생활을 해온 우리에게 너무도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만과 위선’이라는 두 단어로 그들의 이미지는 확고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늘 예수님과 논쟁을 벌였고, 스스로 옳다는 확신에 빠져서 다른 이들을 정죄하며, 이런 행위를 통해 스스로 선해진다고 믿는 위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이 아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어땠을까요? 그들에게서 진짜 이런 확고한 이미지를 볼 수 있을까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바리새인의 시선에서 그들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정치활동 or 종교활동
스포츠 경기에는 불문율이라는 게 있습니다. 스포츠마다 규칙이 있고, 각 팀이 그 규칙대로 승부를 가리는 게 스포츠입니다. 그런데 불문율은 말 그대로 글자로 정해지지 않은 규칙을 말합니다. 승부가 거의 결정된 경기에서 이기고 있는 팀이나 선수가 상대에 과도한 플레이를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도 불문율 같은 게 있습니다. 누가 일부러 말하지도 않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에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는 진리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아는 대로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다기보다 우리나라 특유의 교회사적 요소에 의해 그렇게 정의된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런 경우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구약성경은 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정치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유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도 사실 사회적 약자들이었던 그들이 함께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가나안 땅에 이르러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공동체를 이루는 규칙을 부여받고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살겠다고 정치적으로 결단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후 그들이 야훼 하나님을 섬기고 사사를 리더로 하는 평등한 공동체로 살다가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왕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야훼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했던 예언자들의 비판과 지적을 거부하고 왕과 지도자들이 타락하면서 유대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것입니다. 이후 유대 이스라엘은 멸망 이유를 그들이 야훼 하나님을 잘 따르지 않아서라고 판단했습니다. 강대국의 오랜 지배가 이어지면서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강대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울 존재였습니다. 이들의 생각을 정치적이라고 봐야 할까요? 종교적이라고 봐야 할까요? 예수님의 활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세례요한의 메시지와 활동에 매료되어 그를 찾아갔고, 그와 함께 지내다가 광야에서의 고행 이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여라. 그날이 가까이 왔다’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종말론적 예언의 선포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예언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로는 성전에서 벌어지는 환전과 물건을 파는 행위를 규탄하셨고,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위를 종교적인 실천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정치와 종교가 엄격히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정치 얘길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언제 나오게 된 걸까요? 바로 일제 강점기입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조선 중기 때인데, 그때 전파된 기독교는 당시 왕과 사대부들에게 나라의 체제를 위협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조선의 왕은 하나인데, 다른 왕이 존재하고 하나님 아래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는 가르침은 신분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조선에 강력한 위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은 이들을 강력하게 탄압했습니다. 그 이후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때 미국이나 캐나다 혹은 유럽을 통해 전해진 기독교는 우리가 발전되지 않았던 의료와 교육 부분에서 앞선 문물을 들여왔고,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서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도 함께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조선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들고 변화시켰는데, 일제는 이런 변화가 지배 체제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여 당시 외국 선교사들을 조선에서 쫓아내고자 했고,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금지했던 것입니다. 그때 일제에 굴복한 이들이 교회에서 정치 얘기를 금지했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죽으면 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한반도 내에서 정치가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교회에서 정치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정치와 종교는 엄격히 분리되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사실 그것이 가능하기도 어렵습니다. 늘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앞에서는 분리를 강조하지만, 뒤로는 힘 있는 권력자들과 유착된 경우를 자주 봅니다. 하지만, 나쁜 의도를 가진 몇몇 목회자들과 달리 교회에서 정치 얘기를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의 굴곡 있는 현대사 속에서 각자의 경험과 주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다르기에 보는 시각도 다르고, 주장하는 바도 다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대화로 문제를 풀거나 서로의 견해 차이를 줄이려 하지 않고, 경험의 다름이 갈등으로 격화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이야기든지 정치 이야기라고 규정하면 교회에서 어떤 얘기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교회에서 정치 얘기를 금하지 말고 서로 느끼는 갈등 요소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비폭력 대화 혹은 의사소통 방법을 먼저 배운 후에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의 적대자 or 지지자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의 활동은 율법을 준수하고, 옛 선조들의 전통을 잘 지켜 하나님께 용서받아 유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받게끔 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유대 제사장 귀족이나 기름 부은 왕 같은 이들에게 요구되던 규칙을 많은 사람이 지킬 수 있게 가르치고, 그런 모습을 확대해서 유대 이스라엘 전체가 지키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유대교의 개혁을 위한 정치 운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십일조와 정결 예식을 강조했는데, 처음 이들의 운동은 대중들을 상대로 행해졌고 많은 이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대중 운동 이후 권력자들과 연결되었고, 상층 귀족까지는 아니었지만, 유대 내에 권력을 가진 엘리트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구별된 자’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이전까지의 권력자들과 다른 모습 때문이었는데, 그들도 권력을 얻자마자 이전 권력자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을 율법으로 정죄하고,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끊임없이 압박했으며,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통제했으며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며 자만했습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율법 혹은 옛 선조들의 전통을 지키자는 초심을 지켰다면, 그 운동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아주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위선을 비판하셨으며 그들의 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하셨습니다. 공관복음서 중 마태복음에서는 29번, 누가복음에는 27번, 마가복음에는 11번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 언급되었습니다. 이 언급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다만, 오늘 읽은 본문 중에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주거나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을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은 하나의 고유명사 즉, 이름이 아니고, 사회적 그룹을 지칭하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바리새인으로 고정할 수 없는 모습이 있습니다. 많은 바리새인은 나빴지만, 어떤 바리새인은 선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도 처음엔 유대교를 개혁해서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끌어내어 새로운 이스라엘을 꿈꾸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유대 이스라엘에서 그 누구보다 메시아가 오시기를 바랐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초심을 잃었고, 결국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외면받은 것을 뛰어넘어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를 로마의 정치범 처형법인 십자가에 매다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근본주의(Fundamentalism)
근본주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종교적 교리의 절대적 진리성에 충실하려는 입장 혹은 경전에 나와 있는 내용이 절대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보고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따르려는 입장으로 나옵니다. 어쩌면 맞는 말 같지만, 이들의 주장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절대적 오류가 없는 존재는 하나님 즉, 신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거나 예수님의 기적을 쓴 이들은 모두 사람입니다. 상대적 존재인 사람이 어떻게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실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 성경을 볼 때, 잘못 해석하지 않는지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록한 사람의 모든 오류와 실수할 가능성을 부정하고 그것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니 모두 진리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역사적 오류와 편집의 실수에 대해 공유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트로트의 열풍을 불러온 가수들에 대해 잘 아실 것입니다. 임영웅이나 이찬원, 정동원 같은 가수들 말입니다. 그런데, 1950년대를 기록한 역사책에서 625전쟁으로 실의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임영웅이 등장했다는 기록을 보면, 어떻겠습니까? ‘말도 안 된다’라고 여기지 않으실까요? 이런 오류가 성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후대에 사용되던 단어가 갑자기 그 시대 이전에 기록되어 있으면, 저 이야기는 후대에 편집되었다고 혹은 그 말에 오류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런 지적을 마치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떠벌리는 잡설로 판단한다면,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신앙이 발전 없이 늘 그 자리에서 맴돌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근본주의라는 늪에 빠져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늪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고, 대형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들은 스스로 그 늪을 향해서 갑니다. 그러니 교회가 늘 사회의 발전 방향과 반대로 가고, 사회에서 다뤄지는 범죄나 문제가 교회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유대교 개혁 운동 또한 처음엔 대중들의 마음을 샀지만, 나중에 타락해서는 권력자들의 지배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념을 지키는 방식
한국교회가 부흥할 때, 그때 사회에도 경제 순풍이 불었습니다. 경제도 잘 돌아가고 부족함을 모르고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전도를 굳이 하지 않아도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은혜와 축복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도 은혜와 축복으로 잘살게 되었다고 믿었기에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IMF와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사회는 경제적으로 양극화가 심해졌습니다. 우리나라 부자의 10%가 우리나라 부의 8, 90%를 차지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교회는 은혜와 축복을 선포합니다. 교인들의 대부분이 힘들고 괴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그들을 위한 위로나 다독임보다는 그들을 다그쳐 성공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서 성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축복받지 못했다고 여기고 자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로 고3 학생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러 혹은 예배드리러 교회에 오는데, 대학 입시의 등락이 그들을 위축시켜 교회로부터 멀어져야 합니까? 대학에 입학하면 성공한 것이고, 입학하지 못하면 실패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자신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에게 성공만을 바라고, 그 10%가 되기 위해 살인적인 노동과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분이십니까? 성공과 축복 신화에 빠진 한국교회는 성경에서 지적하는 맘몬을 숭배하는 이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맘몬을 숭배하는 이들은 농경사회에서 풍성한 추수만을 바랐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는 저주받았다고 여겼습니다. 사회에서 성공한 이들만이 권력을 휘둘렀고, 그것이 그 사회 안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맘몬이 그들을 축복해 성공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리가 그들의 신념을 지키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성공하지 못하고 우리나라의 10% 부자가 갖지 않은 10, 20%의 부를 얻기 위해 발버둥 치는 8, 90%의 사람들에게 교회가 맘몬처럼 성공만이 살길이다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어느 편에 설 건가.
어쩌면 바리새인들도 처음엔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그가 보낸 메시아가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들이 꿈꾸었을 나라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타락했고, 예수님께 비판받았습니다.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민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이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들은 우리가 아는 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를 구성하는 사회 하층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울부짖음을 야훼 하나님이 들으셨고, 그들에게 예배받기 위해 그들을 가나안이라는 새로운 땅으로 구원해내셨습니다. 그들은 주변 나라들과 달리 왕을 세우지 않고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섬겼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선택받은 민족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이 선택받은 이유를 잊었습니다. 그리곤 그들이 유대 이스라엘 사람이기에 선택받은 줄 착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착각을 지적하셨고, 하나님의 구원은 그들이 유대 이스라엘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선택을 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고 고백했기에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확신한다면 이 역시 큰 착각입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한 착각으로 바리새인과 같이 초심을 잊고 산다면, 우리는 유대인이 내쳐졌던 것처럼,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비판받았던 것처럼 우리가 누릴 구원도 하나님에 의해 내쳐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성경 공부를 할 때마다 말씀드리는 것, 성경을 잘 읽고,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말며, 자기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를 바탕으로 살지 말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으로 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고 쉽게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도 모르면 안 될 일입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예수님의 길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그 삶 가운데 내리는 선택을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것과 비슷하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신앙을 반면교사 삼을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이현주 #예수와만난사람들
* 위 글은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을 교재로 진행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