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열기
제가 어릴 때,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교회에서는 콩트나 성극 그리고 찬양, 율동 등 여러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성탄 전야 때 발표하곤 했습니다. 여러 프로그램 중에서도 성극은 가장 중요했던 프로그램 중 하나로 마지막에 배치되곤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기 예수 역할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대사가 고작 마지막에 ‘응애~’하고 우는 게 다인 역할이었습니다. 대사 한 줄인데도 성극 연습을 열심히 쫓아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에 고학년이 돼서는 헤롯 대왕 역할도 했는데, 나중에 커서 교회 동생들에게 들어보니 제가 헤롯 대왕의 옷이 화려하지 않다고 입이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암튼 성탄절만 되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로 성극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그때의 성극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골고루 섞은 것이었습니다. 성극엔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헤롯 대왕과 동방박사,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목자와 마구간 그리고 말구유가 모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대본이 나오게 된 걸까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같지 않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복음서를 쓴 시대적 배경이 달랐기 때문에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극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모두를 포함하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접하다 보니, 막상 성경을 읽어도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성극 대본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 이해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헤롯 대왕입니다. 복음서에는 헤롯이 한 사람 등장하는 것처럼 나오는데, 사실은 이름이 헤롯이어서 그렇지, 다른 인물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나오는 헤롯은 헤롯 대왕으로 불리며 기원전 73년부터 기원전 4년까지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장성한 후,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의 갈릴리를 다스렸던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로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른 아들인 헤롯 아르켈라오와 달리 온건하게 정치하여 갈릴리 지역에는 로마에 저항하는 무리가 들끓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다스렸던 헤롯 아르켈라오는 자신이 헤롯 대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계속된 유대인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로마는 이후 총독을 보내 직접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잠시 다른 곳으로 샜는데, 어쨌든 헤롯 대왕은 왕위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권력 지향적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왕위에 매달린 것은 그가 순수 혈통의 유대인이 아닌 유대인 아버지와 에돔인 어머니에게서 난 혼혈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순수 유대인이 아닌 자가 그들의 왕이 되었기에 그를 신뢰하고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가 왕이 된 것은 군벌(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특권을 장악한 군인 집단)이라는 배경으로 로마의 황제와 그 측근들에게 로비한 결과였기에 그는 로마에 잘 보이려고, 로마 신전과 경기장을 건설했고, 또 유대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기 자리에 대해 불안해했고,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아내와 아들 그리고 장모까지 죽일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죽을 때엔 성 내에 울음소리로 가득 차야 한다고 가정마다 한 사람을 죽였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유다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왔으니 그가 당황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한 별을 찾았고, 그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당시에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을 별을 보고 판단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별이 한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관련되었다고 여기고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일까요? 동방이라고 하면, 유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나셨는데, 그 소식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듣고 온 것입니다. 동방이라면 정확하게 어디였을까요? 그들은 유대의 문화에 밝았습니다. 단순히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소식으로 알고 직접 찾아왔으니 말입니다. 이를 근거로 이들이 바빌로니아에서 왔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살았고, 그곳에 정착해서 유대로 돌아오지 않은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박사라고 불렸을까요? 긍정적인 의미로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나 제사장 혹은 현인으로 볼 수 있고, 부정적인 의미로는 점쟁이나 마술사 아니면 사기꾼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별의 움직임을 분석했고, 왕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황금과 유향 그리고 몰약은 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바빌로니아에서 별을 연구하는 점성술사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혹은 그들이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그들의 정체성, 즉 이방인이라는 사실에 더 관심을 두었습니다.
3절에 보면, 헤롯 왕이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에 당황하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당황하였다고 나옵니다. 헤롯 대왕은 그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소식이니 당황할 수 있는데, 예루살렘 사람들은 왜 당황했을까요? 여기에 마태복음의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마태복음은 헤롯 대왕과 동방박사의 모습을 대조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모습이 떠오르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나 추종자들과 달리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십자가에 매다는데 동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차별받고 무시당하면서도 예수님께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조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외면하고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구약성경이 자주 인용되는데 그의 목적이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이뤄졌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6절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이야기도 마태복음이 예수님을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할 분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후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 가지 않고 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때, 헤롯 대왕은 분노하여 베들레헴과 근처에 살던 두 살 아래의 남자아이를 죽였습니다. 초대교회는 그 숫자를 부풀려 헤롯 대왕의 악함을 부각하려 했지만, 당시 인구수와 유아사망률과 출생률을 비교했을 때, 그에 의해 죽은 아이들은 스무 명 남짓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헤롯 대왕의 잔인한 시도가 가져온 비극이었습니다. 이 또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이야기가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이야기 구조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누구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네, 바로 모세입니다. 이렇게 마태복음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의 말씀과 유대 이스라엘의 시조인 모세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로 재구성하면서 헤롯 대왕과 동방박사의 모습을 대조함으로써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아의 출현을 거부하는 유대인과 이를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이방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의 예수님 이해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탄생할 때, 등장하는 이들은 목자입니다. 당시 목자들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가축들을 여기저기 몰고 다니며 풀을 뜯겨야 했는데 먼 길을 떠나서 몇 마리를 주인 몰래 팔거나 일하지 않고 농땡이를 치기 일쑤였기에 당시 사람들에게 목자는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천사의 안내로 마구간에 놓인 말의 밥통, 말구유에 놓인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을 것입니다. 목자와 마구간 그리고 말구유는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이미지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예상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는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 같은 거대한 이상보다 그들이 처한 현실에 빗대어 예수님의 존재를 이미지화했습니다. 무엇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도 덧붙였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입니다.
유대의 법에 따라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데려가 정결 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당시 산모는 피로 더럽혀졌다고 여겨졌기에 남자아이를 낳았을 때는 40일,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는 80일 후에 정결 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산비둘기 한 쌍과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한다고 기록한 이유는 그의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위기 12장 8절에 보면, 산모가 예식을 치를 때, 양 한 마리와 집비둘기 새끼 한 마리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바쳐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못 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바치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은 조금 더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마리아와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고대하던 시므온이라는 사람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성령에게서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못할 거라는 무시무시한 지시를 받았던 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이 보낸 구원을 안고 있고, 메시아로 인한 평화를 이미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져올 평화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잔잔한 바다 같은 말랑말랑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유대를 분열시키고 새로운 역동성으로 발현되는 평화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을 마리아에게 건넵니다.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부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 듯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아닌 그의 가족에게도 이어져야 하는 모습임을 조언해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다른 예언자 안나에게도 예수님의 탄생은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떻게 행동했는지 누가복음이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녀의 나이가 많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마음과 신념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이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주위 사람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예루살렘을 구원할 메신저로 보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주변 인물이나 그 환경을 통해, 그가 유복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이나 안나의 이야기로 봤을 때도 그는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대로 일어날 이스라엘의 갈등과 분열의 현실을 예견케 합니다. 그래서 갈등과 분열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었기에 날카로운 조언도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지연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나 ‘왕’ 같은 큰 이야기가 아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처럼 묘사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의 이야기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예수님의 이야기를 두 가지의 형태로 구분해서 보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입니다. ‘역사적 예수’는 말 그대로 실제 역사 속에서의 예수님을 뜻합니다.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려면 성경의 고대 원문을 살피는 것은 물론 예수님의 삶이 담긴 복음서의 저자가 누구이며, 어떤 배경과 환경에서 글을 썼는가를 살피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서에 담긴 역사적 실체에 관해 탐구합니다. 이뿐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적 기록뿐 아니라 주변 기록도 살펴야 합니다. 성경의 기록과 주변 기록이 서로 다르게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연구하다 보면, 복음서의 말씀이 실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지, 복음서 기자가 예수님이 했을 것으로 예상하고 편집한 말씀인지 구분하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목표는 실제 예수님이 당시에 했던 말, 행동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반면 ‘신앙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와는 별개로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고백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유대의 역사에서 기름 부은 자, 즉 ‘메시아’라는 표현을 그리스어로 바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기독교인들의 그리스도가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도를 알릴 때, 그에 관해 설명하고 증명하기 위한 여러 논리가 덧붙여져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적 예수’보다 ‘신앙의 그리스도’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사실 ‘역사적 예수’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반열에 올랐고 이후 성령의 존재가 덧붙여져 우리는 ‘성삼위일체’라는 이름으로 신앙고백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서 예수님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느냐는 당시 사람들의 치열한 논쟁을 모릅니다. ‘역사적 예수’에서 어떻게 ‘신앙의 그리스도’로 변화해왔는지,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믿고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해서일까요? 도대체 2천 년 전, 예수님이 로마의 정치범을 처형하는 형벌인 십자가에 달린 사건이 왜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 적 없으신가요? 어쩌면, 우리가 ‘역사적 예수’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신앙의 그리스도’만 몰두했기에 지금 같은 현실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고백하면서도 늘 죄로 한탄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기도는 형식화되고 우리의 신앙 또한 예수님을 따라 살기보다는 예수님의 삶을 당연히 따라 살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겠다고 한탄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못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반복하는 건 우리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여실히 드러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고 진심으로 고백한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눈과 마음을 열고 복음서를 열심히 읽으며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하고,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이상하다, 이해가 안 되는데도 괜찮다며 덮어놓고 믿으면 그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먼저 복음서에 숨어있는 예수님의 진짜 삶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과정이 된 이후에 그것을 신앙으로 살아낼지 말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처럼 살지 못해 죄송하다는 기도를 평생 해야 할 것이고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지 말지 선택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이현주 #예수와만난사람들
* 위 글은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을 교재로 진행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