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부교역자설교

[예수와 만난 사람들] 엠마오 가는 길에서

  • 관리자
  • 2023-04-12 12:00:00
  • hit470
  • 58.122.40.57

마음 열기

 

제가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답답하게 느꼈던 부분은 성경 공부를 하는데, 늘 해야 할 질문과 정답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배웠던 교재들은 수학 문제집처럼 대부분 질문과 정답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성경 공부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질문을 따라 읽었고, 거의 대답도 정해진 대로만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만족한 표정으로 흩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교재에 없는 질문을 하려면 끝나고 따로 하거나 주위 사람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습니다. 목회자들도 그런 질문을 하면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보기도 하고 어떤 질문은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가장 답답하게 했던 건 그런 질문을 하면 믿음이 약해진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어쭙잖은 호기심으로 영글지 않은 신앙을 건드리면 위험하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와 보니, 루돌프 불트만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공관복음 전승사라는 책을 쓴 불세출의 독일 신학자인데, 믿음은 성경의 단어 하나를 해석하고 분해해서 말씀의 정수를 뽑는 과정에서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는 자신의 신앙을 잃을까 봐 아무 시도도 하지 않고 누군가가 떠먹여 주는 대로 믿는다면, 또 다른 누구는 신앙을 성숙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시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신앙을 지켜줄 거라고 믿으며 말이죠. 이 둘의 신앙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함에 큰 차이가 생길 것입니다. 성경은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질문과 호기심을 받아왔고, 학자들은 그것에 반응하여 신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좋은 질문하기는 전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을 위한 공부라면 질문하기를 주저하면 안 됩니다. , 좋은 질문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더 이상 성경 통독을 몇 번 했는지, 성경 퀴즈를 얼마나 잘 맞추는지 하는 잣대로 신앙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루에 한 구절을 읽더라도 읽는 사람에게 어떤 신앙의 깊이로 다가오는가가 더 중요한 때입니다.

 

궁금한 몇 가지

 

엠마오는 새번역 누가복음의 기록으로 예루살렘에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나오지만, 학자마다 주장이 달라 그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아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찾았던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의 유월절 예식이 끝난 뒤, 무교절의 남은 기간에 숙박하기 위해 엠마오라는 곳으로 갔다는 기록으로 보아, 제자들도 예수님이 적대자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그곳으로 떠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지지자들이나 추종자들이 기대했던 것은 예수님을 통해 유대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하는 것 그리고 다윗 왕 때처럼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예수님이 펼친 운동과 하나님 나라의 선포 그리고 그의 가르침은 썩은 유대교의 상처를 도려내고 고름을 짜내는 일이었고 이전까지의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로 개혁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라고 해서 종교 분야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시 유대교는 이스라엘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정치, 경제, 사회이념이었습니다. 강대국의 오랜 지배와 기존 권력자들의 횡포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실천과 가르침은 그야말로 사이다처럼 시원했습니다. 그것은 카리스마를 지닌 옛 지도자의 모습, 옛 예언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예수님을 지지하고 따랐던 이들은 무능하고 썩은 귀족, 유대교 지도자들을 축출하고 새로운 나라에 걸맞은 지도력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수님이 로마 군인에게 체포당하고 부당한 판결을 통해 십자가 형벌이라는 무시무시한 처벌이 내려졌을 때, 그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던 이들은 공포와 불안 그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감정이 휘몰아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제자라고 불렸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또 벌어졌습니다.

 

부활에 관한 합리적 의문

 

예수님 부활 사건의 시작은 예수님의 시체를 두었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빈 무덤을 처음 봤던 이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체가 사라진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공포와 불안이 찾아왔고 몸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을 때, 제자 대부분은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무덤을 가보고 나서야 그곳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빈 무덤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실제로 마가복음 16장을 보면, ‘빈 무덤이후인 9절부터 20절까지 꺾쇠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이 꺾쇠의 의미는 원래 자료엔 없었는데, 나중에 추가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마가복음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두 제자에게 나타난 이야기, 베드로에게 나타난 이야기 혹은 열두 제자들에게 나타난 이야기가 사건의 후속보도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그중 누가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가장 길고 잘 만들어졌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과 평행본문인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단 두 줄인 것에 비하면,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극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친절하게 알려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했던 건 없으셨나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더 크고 파괴력 있으려면 예수님의 제자나 지지자들뿐 아니라 그의 적대자들에게도 전해졌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를 심판했던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 나타난다든지, 총독 빌라도 앞에 나타나 그들의 죄를 물었다면, 그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더 빠르게 전파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던 걸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과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보다는 예수와 만난 사람들처럼 제자들의 시점에서 그들이 왜 180도 바뀐 삶을 살게 되었가에 관한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실패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 척했던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이전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게 되었는데, 이를 예수님의 부활 이외에는 어떤 근거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점에서 오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예루살렘의 일을 모른 척하는 예수님과 그런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두 제자였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의 일을 전혀 모른다는 예수님에게 그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시 대중들이 사이다로 여겼던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당시 대중이 원하던 정치적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메시아로서의 모습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도 두 제자는 여전히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과 식사 자리에 가서야 알아챕니다. 여기서 아까 말씀드렸던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31절의 말씀,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동안 그들은 16절의 말씀,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상태였습니다. 여기서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을 이해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가려졌다는 표현을 쓰는데, 학자들은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의미로 쓰기도 하고 사탄에 의해 눈이 멀어졌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이집트의 파라오도 하나님이 그의 고집을 부리게 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도 그들의 노력이나 깨달음 때문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이 개입하셨거나 예수님으로 인해 극복됐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들의 마음이 중요한 변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졌던 건 그들이 여전히 욕망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로부터의 독립과 다윗 왕 시절의 이스라엘을 꿈꾸던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실패로 인해 쓰라림이 온몸에 가득 차 있던 상태였기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과거 욕망이 사라지고 예수님의 진짜 의도가 가득 차게 되자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없으면 믿을 수 없으며, 믿음이 없는 눈은 보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예수님이 왜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나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나타나셨어도 그들은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알아보았어도 모른 척했거나 다시 몰래 죽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퍼져나가는 걸 우려해서 무덤의 경비병들을 매수해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라는 악성 소문을 퍼뜨렸습니다(11~15).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만으로 예수님의 부활했다는 소문이 퍼져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거나 그들의 불의가 드러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이 말이 오늘날까지 퍼져 있다.’라고 기록해 예수님이 활동했던 시기보다 적어도 50여 년 후인 마태복음이 편집될 때까지도 이런 악성 소문을 믿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당시에도 소수에게만 전해진 이야기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졌다고 한들 사람들이 그 소식을 믿었을까요? 아마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끝내 밝혀지기 마련이고, 숨긴 것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당시엔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을지 모르지만, 얄팍한 속임수는 거짓임이 드러났고,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진실은 수많은 사람에 의해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

 

매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사순절의 의미를 강조해왔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부활도 의미 없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을 너무 강조해서인지, 아니면 피나 고통 같은 말초적인 모습만 드러내서인지 오히려 예수님의 고난과 멀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가복음 834)’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너무 크고 무게감 있게 강조하다 보니 도저히 우리가 질 수는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마음에 품어야 하는 건 맞지만, 그 이유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에도 고난받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라면, 지금도 그들 곁에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십자가 또한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진다면, 우리는 이 시대에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눈을 떠야 합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세상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이건 그냥 뜬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강한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그냥 눈만 뜨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엔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신문을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사회를 직시하고 있어야 진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적대자나 방해하는 이들에게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가 기독교인으로 사는 데 방해하거나 이런 삶의 실천을 막는 적대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기준으로 편을 가른다든가 자기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니 나를 따르라든가 또는 옳은 일을 부당하게 탄압하거나 돈과 권력으로 인권을 짓밟는 일을 자행하는 이들에게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들의 말을 묵인하거나 동조하면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제자들과 대중에게 지지받았던 것은 그가 돈이 많고 권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 삶의 실천들이 자기가 설파한 하나님 나라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도 그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기독교인인 우리의 마음은 언제 뜨거워졌습니까? 그때를 생각하며 나는 언제, 왜 뜨거워졌나?’ 돌아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이현주 #예수와만난사람들

 

* 위 글은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을 교재로 진행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