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안의 유대인 vs 예루살렘 밖의 유대인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루살렘 밖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과 예루살렘 안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변화는 이들이 같은 사람들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합니다. 예루살렘 밖에서도 예수님은 여러 적대자와 논쟁을 벌였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나서 좀 더 과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냈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차례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음해하려고 시도했던 이들은 불법적인 공회를 통해 로마를 끌어들였고, 예수님을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위험인물로 조작했으며 십자가에 매달게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귀족이나 유대교 지도자들과 반대편에 서 있던 걸로 알았던 유대 백성들도 태도를 바꾸어 예수님을 적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까 말씀드렸듯,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한 백성들은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유대의 모든 사람에게 지지와 환영을 받은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풀었던 구원의 은혜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주어진 게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당시 죄인이라고 불렸던 이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었던 반면 싫어하는 이들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존재들을 애써 외면해왔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준 구원의 은혜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모든 이에게 내리고, 하나님 나라를 먼저 경험한 것처럼 영광스러운 일로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이들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는 예수님을 불편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당시 모든 유대인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시몬에 대한 정보는 먼저 ‘구레네(키레네)’라는 장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서는 들에서 왔다고 하고, 마가복음에서는 시골에서 왔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당시 유대인들이 썼던 아람어로 밭에서 온 ‘키르와이(농부)’ 시몬이었는데, 이 단어가 약간 변형되어 시골에서 온 ‘키레나이(구레네) 시몬’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구레네는 실제 아프리카 북동부지역의 도시이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유다 이스라엘 외부에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지역적인 측면도 있지만, 아버지인 시몬이 유대식 이름이지만 그의 아들들의 이름은 알렉산더와 루포로 그리스식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몬을 유다 이스라엘 근처에 퍼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유다 이스라엘에서 떨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유대 절기에 맞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찾았는데, 아마 시몬도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시몬에 대한 정보는 이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찾으면 좀 더 깊고 다양한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저자인 이현주 목사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인물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우연히 시몬은 로마가 벌이는 끔찍한 죽음의 현장에 있게 되었습니다. 칼로 무장한 로마 군인이 그를 지목하여 ‘재수 없던’ 날이 된 아무 힘없는 한 사람이 예수님의 처형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감정의 변화를 극적으로 재현했습니다. 그런데 전 한 발자국 더 나가봤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 이가 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을까.’ 우리는 아까 유다 이스라엘 내에 예수님의 추종자와 적대자들이 공존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나 추종자 중 한 사람도 아니고, 적대자는 당연히 아닌 제3자 같은 부류인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등장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입니다. 여기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로마서 16장 13절에 보면, 루포라는 이름이 등장해 구레네 사람 시몬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또한, 마가복음에 두 아들과 아버지의 이름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흔치 않기에 학자들은 아버지 시몬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도 아니고 적대자도 아닌 제3자가 예수님이 가장 고난 겪을 때 함께 했고, 그 이후에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나니 구레네 시몬의 숨겨진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물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그에 관한 이야기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만, 시몬의 입장이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생각해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 같습니다.
짙은 죽음의 그림자
당시 로마는 군사력으로 지중해와 맞닿은 지역을 거의 모두 점령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일으켜 자기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 자비를 베풀었지만, 그들에게 도전하거나 반항하면 무자비하게 제압했습니다. 꽤 오래전에, 한 일본인 작가가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을 써, 인기를 얻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은 로마인의 관점에서 쓰였기에 그 문화를 옹호하고 실제 역사에서 그들이 행한 악행이나 단점들을 가볍게 다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실제 로마의 치세는 지금 최강대국인 미국과 비교됩니다.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는 당시 로마의 지배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모든 나라 위에 군림하는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강력한 힘으로 피지배국을 다스렸고 로마의 십자가형도 무자비한 대응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로마의 정치범 특히,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거나 로마에 위협이 될 만한 이들에게 행했던 처형법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오랫동안 피를 흘려 죽게 함으로써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이면서도 많은 사람에게 그 모습을 보임으로써 공포를 심기에 충분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로마에 저항한 이들을 노예 검투사로 만들어 경기장에서 목숨을 건 결투를 시키거나 사자나 호랑이 같은 짐승들과 싸우게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전쟁터에서, 경기장에서 무자비하고 잔인한 모습을 보면서 열광했고 승리의 전리품을 취했습니다. 로마에 저항했던 이들도 대부분 무장투쟁을 벌였습니다. 특히 유대는 본토와 지리적 거리도 멀었고, 오랜 시간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서인지 독립을 열망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장봉기를 준비하거나 유력한 정치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방식으로 독립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패권 국가였던 로마로부터의 독립은 쉽지 않았고, 그들의 과격한 활동은 유다 이스라엘을 혼란과 불안에 빠트렸습니다. 이렇게 로마엔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으며 멈출 수 없는 타락의 길로 들어섰고, 이에 대항하는 세력도 폭력의 방법으로 대응해 결국 기원후 70년경, 일어난 유대의 독립전쟁을 로마가 두 차례에 걸친 학살로 마무리함으로써 유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요?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나라가 되었다는 것과 그 과정이 매우 짧았다는 것을 근거로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산업화를 이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재벌에 많은 특혜를 베푸는 반면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하고, 노동력을 부당하게 착취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하루 중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일터는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위험해졌고, 노동시간은 선진국 중에서 가장 길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업을 위해 노동시간을 더 늘리려고 하고,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들라는 법을 어겨도 기업은 크게 처벌하지 않습니다. 일터가 이 정도니 군대는 더 심합니다. 상관의 명령을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문화 속에서 상관의 범죄로 인해 한 개인의 인격이 망가지고 사람으로서의 존재 자체가 무시당해도 처벌하지 않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돈이라면 사람의 목숨, 권리, 존중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문화가 죽음의 문화가 아니고 무엇일까요? 티브이에서 보이는 피가 튀기는 격투 스포츠에 열광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주위에서 사람이 죽어도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사회가 바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시몬의 변화
성경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예수님의 지지자도 적대자도 아니었던 시몬의 변화는 ‘예수와 만난 사람들’에서 자세하게 그려집니다. 그는 이야기의 시작에서 ‘또’ 시작되는 십자가 처형을 보며 분노와 허탈함, 죽음의 문화가 일으키는 집단적인 광기와 마주합니다.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던 그는 아무렇지 않게 봐왔던 예전과 달리 세월호 참사나 1029 참사를 눈앞에서 본 사람들처럼 충격에 휩싸입니다. 더구나 시몬이 보기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로마에 대항하여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이들 앞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이와 논쟁을 벌이고 다퉜지만, 자기 일을 위해서는 변명하거나 설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달랐습니다. 그는 로마의 편에 서지 않았고, 유대 기득권자들과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무장 독립을 원하는 열심당원이나 테러단체인 시카리와도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서 있었던 곳은 짙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에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곁이 아니었을까요? 시몬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 살아있는 이들보다 비록 죽음을 맞게 되지만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십자가 형벌은 그들의 강함을 드러내고 잔인한 죽음의 그림자를 퍼뜨리는 형벌이 아니라 부당한 권력에 의한 희생과 죽음의 그림자에 맞서는 생명의 이미지가 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시몬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성경에서 기록하지 않지만, 적어도 폭력과 죽음의 문화를 옹호하거나 이에 동조하는 삶은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생명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결국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고, 생명이 살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면?
우리도 현대사 속에서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해방되자마자 전쟁을 겪었고, 죄 없는 이들이 학살되었으며, 간첩이나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은 이들도 있습니다. 국가는 경제적으로 발전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에 대한 존중은 점점 더 사라졌습니다. 성수대교 붕괴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사회적 참사가 끊이지 않고 벌어졌지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이때만 피하기에 급급하고 공감 능력을 잃은 국민도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잊어버리곤 이제 그만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사가 계속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게 벌어지지 않았으니 괜찮은 걸까요? 사회적 참사는 대상을 골라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공감 능력을 잃은 사람들은 내가 그 대상이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언제쯤 눈과 귀를 열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거나 고통당해야 바뀔까요?
어쩌면 예수님은 우리 곁에 와 계시는데도 십자가를 져본 적 없는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주위에서 수없이 죽었음에도 우리가 눈을 감고 귀를 막아 그 모습을 못 보고, 이야기를 못 듣고, 혹시 들어도 무시해왔던 건 아닐까요? 시몬은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 때 열 받고 불쾌했지만, 결국 그 사건이 그의 삶을 바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는 오직 예수님의 몫이라 여기고 봐도 모른 척, 들려도 안 들린 척하며 영광의 단 꿀만 얻고자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시몬의 입장이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보면서 ‘아, 예수님이 이렇게 힘들게 고난 겪으셨구나.’ ‘시몬도 갑자기 고생했네.’가 아니라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보고, ‘오늘날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이나 고민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지지자도 적대자도 원하지 않은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지금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요?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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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은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을 교재로 진행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