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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만난 사람들] 믿어지지가 않는군

  • 관리자
  • 2023-03-22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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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꼰대라는 말 들어보셨죠? 예전엔 무슨 뜻인지도 모르다가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꼰대는 자기가 겪은 경험을 전부인 양 생각하고 모든 일을 자기 경험을 기준으로 상대에게 가르치거나 강요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최근 꼰대라는 말 못지않게 자주 쓰이는 말이 있습니다. ‘MZ세대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이 말이 처음 쓰였을 때는 새로운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MZ세대라는 말을 소비하는 방식이 참 불편합니다. 이기적이며, 사회생활을 부정하며, 내 생각과 다른 이들을 포용하지 않는 사회 부적응자 수준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윗세대의 낙인효과처럼 느껴졌습니다. 젊은 세대와 어른들이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가 꼰대같은 어른들 때문이 아니라 MZ세대의 문제라고 낙인을 찍는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교묘하게 반대편으로 떠넘긴 것입니다. 소위 꼰대라고 불리는 이들의 시대는 눈에 잘 보이고, 명확한 시대였으며 변화가 많지 않은 때였습니다. 대학교만 졸업하면 취업이 보장됐고, 10년 정도만 열심히 노력하면 자기 집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크고 작은 변화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납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으며, 해고의 우려가 적은 정규직은 눈에 티끌처럼 뽑는 대신 같은 일을 해도 적은 급여를 받고 해고가 쉬운 비정규직은 많이 뽑습니다. 아무리 돈을 모아도 집은 절대 살 수 없으며, 요즘처럼 노동력이 평가 절하된 시대도 없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주식과 비트코인 그리고 공무원 입시에 열을 올리는 것은 삶이 불확실하고 사회도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른들은 명확한데, 젊은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보이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으니 대화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와 대화하다가 언제 처음 나와 다른 존재임을 느끼셨나요? 일종의 배신감이라고 할까요? 나와 가깝고 친밀한 사이인 줄 알았는데, 벽이 느껴질 때 말입니다. 저는 한국전쟁을 어린 나이에 겪은 세대인 아버지와 정치 이야기를 할 때, 막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박정희 씨를 보는 관점입니다. 주로 저는 그의 과실을 주장하고,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그의 과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우리나라의 가난을 끝낸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전 그가 아니었어도 우리나라의 가난은 끝났을 거라고, 우리의 현대사처럼 빠르게는 아닐지라도 머지않은 시점에 가난을 극복했을 거라고 얘기하곤 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우리나라의 절대적 빈곤은 어느 정도 사라졌습니다. 아버지가 자랄 때는 국민 대부분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서방 국가의 원조를 통해 국가는 가난을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고, 이제는 많은 사람이 끼니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 4만 달러로 가는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생활고로 삶을 끝내는 사람들의 뉴스를 듣습니다. 절대적 가난이 극복되었지만, 여전히 끼니를 걱정하는 이들이 있고,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이 있음을 우린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서울만 해도 누구나 아는 가난한 동네가 있고, 이곳에 모여 사는 이들은 대부분 하루 일해서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들이거나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경제적 능력이 부족해 생존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의 복지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국가 재정 능력을 비교해 보면 복지 예산은 턱없이 부족한 편입니다. 시스템 또한 촘촘하지 못해서 복지의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과 무관심으로 삶을 끝내는 이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들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함부로 평가하거나 절실하지 않으니 일하지 않는다고 막말합니다. 절대적 가난의 시대를 살았던 분들이나 그때 생긴 생각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분들은 시대가 바뀌었어도 생각을 바꾸지 않습니다. 내가 많은 것을 경험해서 알고 있으니 이런 말을 해도 된다는 게 바로 꼰대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대부분 무례합니다. 상대의 의사는 존중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냥 여과 없이 합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

 

공관복음서를 보면, 순서는 약간 다르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 전에 세례요한이라는 예언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운동에 감명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고위 제사장 계열의 후손이었으며 예수님 당시 활동했던 여러 당파 중 에세네파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부모와 배경을 등에 업고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지만, 광야의 길을 택했습니다. 에세네파는 고위 제사장이나 유대 귀족들의 후손 중에서 엄격한 규율 속에 공동체 생활을 했던 이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금욕적인 삶을 살았으며 폐쇄적인 공동체였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라고 전합니다. 소금물에 익혀서 숯불에 구운 메뚜기와 야생 벌꿀은 가난한 유목민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고, 유대 사회를 향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성경에 헤롯으로 기록되었으나 우리가 아는 헤롯 대왕의 아들-가 정치적 야욕으로 이복동생의 아내이자 정통 유대인 왕조인 하스모니아 왕조의 후손이었던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세례요한이 이를 비판했다가 투옥되었고,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기독교인인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세례요한의 영향력이 예수님보다 더 컸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라는 책을 보면 예수님에 관한 언급보다 세례요한에 관한 언급의 양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실제 신약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예수님이 세례요한과 운동을 함께 했으며,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세례요한의 운동에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세례요한이 투옥되고 난 이후부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보아 세례요한의 운동을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세례요한의 운동과 결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세례요한의 것보다 훨씬 더 유대 사회 안으로 깊숙이 개입했고, 더 많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율법학자나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악용하는 이들에게 험한 말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행동은 세례요한보다 더 직접적이었으며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귀족과 유대교 지도자들을 떨게 했던 것은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인해 대규모 민중 봉기나 폭력 투쟁이 벌어질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실제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당시 품에 칼을 품고 다녔던 테러리스트 집단 시카리와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2주 전에 함께 배웠던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과의 만남 이후로 예수님의 운동은 그 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던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닌 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충격이었으며, 예수님을 로마의 지배로부터 끝장낼 정치적 메시아로 여겼던 사람들에게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구원관은 지극히 폐쇄적이었고,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방인을 향한 구원과 그에 관한 선포는 오히려 폐쇄적인 유대인들을 흔들었고, 새로운 변화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변화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했던 공동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대신 유대 배경을 최대한 보존하거나 기독교인들을 유대교 회당에서 내쫓고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기독교인의 활동은 유대교 회당 내에서 활발해졌고, 그만큼 갈등이 극심해졌습니다. 기원후 70년경 로마가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을 잔혹하게 제압한 이후 유대교를 장악한 바리새인들은 기원후 70, 얌니야 회의를 통해 유대교에서 완전히 기독교인들을 몰아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활동은 디아스포라 공동체로 이어졌고, 사도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도의 활동으로 인해 전 세계로 확대되었습니다.

 

누가의 편집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과의 이야기는 세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복음서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유대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것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을 이야기했고,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서 함께 자란 사람이었다는 점을 떠올렸습니다. 그러자 놀라움은 사라지고 의아하거나 달가워하지 않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감정 변화가 느껴집니다. 회당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가 이내 자기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과거의 모습을 기억해내고는 오히려 기분이 안 좋아진 걸로 보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기와 질투의 감정이었을까요? 이 감정을 예수와 만난 사람들에서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람이 요한의 후계자로 등장했다면, 우리는 그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함께 자랐고, 예수님과 친근했다는 점이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곤 이 말씀을 덧붙입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마태복음 1357절과 마가복음 64절 그리고 누가복음 424절에서 나오는 비슷한 이 발언은 조금 더 직접적으로 표현됩니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우리는 고향 사람들의 감정 변화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내가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 즉, 경험이 그들의 판단을 흐렸고 그것이 그들의 한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향에서 별다른 일 없이 그곳을 떠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들의 믿음 없음 때문에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행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이 세 공관복음서에서 이야기의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누가복음과 달리 이 이야기를 갈릴리에서의 활동 도중에 넣었습니다. 중요하지 않거나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이야기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 즉, 공생애 활동의 처음부터 자세하게 기록하고 그 내용도 풍부합니다. 이야기를 배치한 곳도 그렇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없는 회당에서 한 말씀 내용도 나옵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었는데, 희년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희년 법은 유대의 전통에 따른 법이었지만, 실현된 적은 없는, 성경 속에만 존재하는 법이었는데 예수님은 그 희년을 선포하시고, 그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종말론적인 메시지 그러니까 세상의 마지막 날에 이뤄지는 메시지로 받아들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는 달리 누가복음은 좀 더 현실적으로 사회, 경제적인 메시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선포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누가복음이 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뒤이어 등장하는 엘리야 시대의 시돈 지역 사렙다 (사르밧)마을 과부의 이야기(열왕기상 17)와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열왕기하 5)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오직 유대인에게만 국한된다는 유대의 상식을 깨는 일이었고 이방인에 관한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이런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이었던 고향 사람들은 화가 난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시기, 질투인 줄 알았지만, 사회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유대인들이 받을 특혜인 줄 여겼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 벽을 깨고, 이방인에게도 이뤄질 수 있다고 말해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화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전통적 진리를 지킨다고 믿었던 자들에게 분노와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셨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편집은 누가 공동체의 환경과 비슷했습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누가 공동체는 유대인보다 이방인이 많은 공동체로 이방인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곧 다시 오실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그 오심이 지연되자 끝날 세상에 관한 말씀보다 하나님 나라 운동의 사회, 경제적 시점과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에게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공동체는 유대 문화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했던 점과 유대인의 선민의식으로 인해 차별받고 무시당했던 이방인을 1세기의 시점으로 끌고 와서 여전히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과 그들이 무시하고 핍박하는 기독교인으로 치환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배치를 역사적 시간의 순서대로 이해하기보다 그의 편집 의도를 파악해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

 

아까 이야기해 드린 대로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바뀌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들의 반응에 대해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가깝다 즉, 친근함을 무기로 특혜를 요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소문으로 예수님이 이방인이 많이 살았던 마을인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행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에서는 당연히 기적을 행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지 예수님이 그들과 가깝다고 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첫 번째 반응은 맹목적인 친밀감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정말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말 예수님과 친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성인이 된 이후의 삶과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을 떠났고 고행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후 그들은 소문으로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다음 두 번째 반응은 맹목적 친밀감을 근거로 특혜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내가 높다, 네가 낮다라는 식으로 다퉜던 것처럼 이들은 당연히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누릴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고향 사람들이 당황할 정도로 냉담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기대가 컸던 만큼 분노도 컸던 것 같습니다. 비록 남쪽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 차별받는 북쪽 갈릴리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을 민족이라는 생각이 그들 머릿속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과 친하다는 이유로 특혜를 바랐지만, 그들은 기적의 주인공들처럼 절박함도 믿음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평가가 그랬기 때문에 엘리야 시대의 시돈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꺼내셨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어쩌면 아무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보다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으시고 구원받은 이방인을 예로 든 것에 더 화가 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같은 유대인에게 차별받았던 분노에다 예수님의 발언이 기름을 부은 것일 테니까요.

 

21세기 기독교인의 반응

 

누가복음을 편집한 이들은 마가복음에 자기들의 신앙을 접목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이 이야기가 등장했고, 유대의 희년 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정수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강대국의 지배 기간이 길어지면서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희미해지는 종말론적 의미보다 현실적인 사회, 경제적 정의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선민의식 즉, 특권의식을 깨부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안에 있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당연히 받을 걸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구원은 너희가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당연히 우리가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게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다면 어떨까요?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자본주의는 시대를 거치며 이전보다 더 교묘하고 집요하게 사람의 욕망을 파고들었습니다.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 노예처럼 부리며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현재의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지 않는 괴물이 되어 사회 전반을 뒤덮고 있습니다.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조차 양극화가 극심해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으며 사회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사회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유럽이 인간의 존엄을 짓밟지 않으려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노동시간이 선진국 중에 가장 많은 것뿐 아니라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더 늘리려고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삶을 거의 다 내놓아가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더 벌려면 더 일해.’라고 다그치는 것입니다. 절대적 가난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굶어 죽는 사람,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습니다. 이 시대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어쩌면 한국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보다 더 깊은 확신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열심히 봉사하면 구원받는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머릿속에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면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율법을 머릿속에 넣고 종교 활동에 열심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구원의 확신도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강력하게 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위선자라고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율법은 겉으로 보이는 몇몇 행위에서만 드러날 뿐, 그 핵심을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자기 확신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깎아내렸습니다. 나는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받지만, 너희들은 죄인이기에 구원받지 못한다고 여겼던 그들의 오만함을 우리는 지금 기독교인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지만, 너희들은 안 믿으니 구원받지 못한다는 지금 기독교인의 모습이 바리새인과 닮지 않았습니까. , 교회에서는 성격 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교회 밖으로만 나가면, 전혀 다른 얼굴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표방하는 기업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권리를 억압해서 이익에만 혈안이 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향한 손길을 뿌리치고 오직 예배당만 화려하고 크게 지으려는 교회의 모습, 목회자들의 비리와 횡령, 성범죄까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음에도 그들의 교회는 목사님이다, 장로님이다 라며 감싸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재판하려고 하면 교회를 탄압한다고 반발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대립했던 것처럼,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대립했고, 지금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대립하는 형국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할까요? 우리는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의 논쟁으로 보여주셨고,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과 대립했던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구원의 확신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구원을 베푸는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이현주 #예수와만난사람들

 

* 위 글은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을 교재로 진행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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