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열기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족이라는 관계를 맺고, 자라면서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생기는 관계는 그동안 느꼈던 가족 관계와 달라집니다. 학교는 작은 사회라고 부를 정도로 어린이가 청소년을 거쳐 성인이 될 때까지 사회화를 가르치고 경험하는 곳입니다. 집단 안에서 권력도 존재하고 이에 따른 다양한 이해관계가 발생합니다. 또, 관계에서 생기는 즐거움뿐 아니라 갈등 같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에 따른 상황이 발생하기에 이런 경험을 통해 성장하게 됩니다.
교회 역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즉, 작은 사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아래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중에 각기 다른 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이 주말에 모여 함께 예배를 준비하고 드립니다. 교회 역시 사람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기쁘고 즐거운 일도 있지만, 슬픈 일도 있고 때론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떤 공동체가 화목하고 단단한 공동체인지 아니면 겉으로만 좋아 보이고 속으로는 대립하는 공동체인지 아는 방법은 기쁘고 좋을 때보다 힘들고 괴로울 때 이를 어떻게 극복해가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즐겁고 행복할 때 서로에게 잘 대합니다. 그러나 갈등이나 문제가 생기면 서로에 대한 시선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갈등이 생기면, 갈등에서 생기는 나쁘거나 불편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우거나 적당히 덮으려고 합니다. 혹은 큰 손실 없이 서둘러 해결하려고 합니다. 당사자만 참고 입 다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낼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갈등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금세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불평, 불만 없이 참기를 감수해야 합니다. 대부분 치우거나 덮기를 원하는 이들이 다수여서 소수인 당사자들이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면 이들은 참는 때도 있지만 참다못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치우거나 덮는 행위가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설령 당사자들이 참으며 신앙생활을 이어간다고 하더라도 이런 모습이 과연 올바른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최근 교회 안에서 갈등과 분쟁이 늘어나면서 공동체의 의사소통이 중요함을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소수를 향한 다수의 강압이나 횡포, 나이나 직분을 앞세워 침묵을 강요하거나 자기의 뜻을 강권하는 모습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최근에 문제로 불거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는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기 위해 온갖 꼼수를 부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대형교회였던 그 교회 안에는 교회 세습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불거지자마자 세습을 반대하는 이들은 교회에서 미운털이 박혔습니다. 아무 문제 없는 일을 문제 삼는다고 손가락질당했으며, 담임목사의 뜻을 거역했다며 교회로부터 징계당했습니다. 교회의 담임목사직 세습은 해당 교회가 속한 총회에서도 법으로 금한 일이었고 사회에서도 비난받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일을 처리했습니다. 불의한 일이면서도 그 일을 처리하는 과정 또한 불의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큰 교회뿐 아니라 작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편하고 좋은 사람과 대화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데면데면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내 편만 찾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보기 싫어 교회를 옮기거나 떠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만약, 교회의 모습이 이렇다면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곳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갈등이나 문제가 생기면, 덮거나 모른 척하기 일쑤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약하면 그것은 수면 아래로만 내려갈 뿐, 결코 해결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의지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때, 초조하고 불안하던 감정도 사라지고 관계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보다 더 단단한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갈등을 회피하고 외면합니다. 없는 것처럼,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만듭니다. 결국 다수가 아닌 소수의 당사자는 교회를 떠납니다. 우리에겐 갈등을 제대로 다룰 평등한 의사소통 방법이 필요합니다. 상처를 입었다면 가해자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다시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변에서도 상처를 다시 거론하며 다시 상처 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위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이와 성별, 직분을 떠나 서로 평등한 존재로 대화할 수 있다면, 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교회 공동체는 갈등이 생기더라도 부정적인 에너지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꿔 오히려 단단해지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파벌을 만들어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헐뜯는다면 우리가 비판하는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이나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한센병(나병)
한센병(나병, 문둥병)은 고대 구약시대부터 존재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낫기 힘든 병으로 여겨졌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공동체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나오는데, 13~14장에 보면 피부병에 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해서 피부병의 범위가 넓지만, 당시엔 그렇지 못했습니다. 특히, 전염병이면서 낫지 않는 한센병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한센병에 걸렸다는 것은 병의 경중으로 죄를 판단했던 당시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대가였습니다. 종교의식에서 부정하다며 배제되는 것은 물론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것은 당연했고, 온갖 비난을 듣고 심지어 돌팔매질을 당해도 아무 말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 밖으로 쫓겨났고, 한데 모여 살았으며 구걸해야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성공한 인물 중 하나인 욥도 사회에서 큰 성공을 이뤘지만, 모든 것을 잃고 건강마저 잃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습니다. 당연히 욥도 공동체 밖으로 쫓겨났고, 깨진 도자기로 자기 살갗을 긁으며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에게 하루빨리 자기들도 모르는 죄를 회개하라고 강권했습니다. 그의 죄는 명백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인과응보 즉, 죄가 있으니 그런 처벌을 받지 않았겠냐는 판단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지위가 있었음에도 욥은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욥은 자신이 죄도 짓지 않았고, 자기 자식의 죄마저도 대신 속죄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기에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런 욥의 상황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주변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그의 죄를 모함하고 죄인이면서도 뻔뻔하다고, 하나님을 이기려는 오만방자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결국 하나님이 그를 버릴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욥기는 당시 병 특히, 중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으며, 병을 죄로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회개를 강요하는 데까지 무고한 이에게 어떤 피해를 줄 수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 시대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병자들은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으며, 선한 사람들의 자비로만 삶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혹시나 공동체로 들어왔다가 받는 불이익에는 아무 대꾸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따가운 눈총은 예사요, 손가락질은 덤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다행일 테지만, 손찌검을 하거나 돌을 던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설령 병세가 완화되거나 나았다고 하더라도 제사장에게 그 몸을 보이고 죄를 용서받았다고 판정받지 못하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판단을 두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지금과 달리 당시 종교인 유대교는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회당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강력한 정치체제인 동시에, 경제체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종교라는 좁은 의미로 이들을 평가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이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 - 공생애
예수님의 공생애 즉, 하나님 나라 운동은 마가복음 초반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제외하고 성장 이야기가 거의 없으므로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마가복음은 시작하자마자 세례 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선포는 광야에서 이뤄졌고, 그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에세네파는 제사장 계열의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였기에 세례 요한의 자격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이 속죄 제사를 하려면, 성전에서 비싼 돈을 치러야 하는 속죄행위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속죄하려면 성전에 많은 돈을 내거나 제물을 바쳐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돈도 자기가 쓰던 돈을 내면 안 됐습니다. 성전에서 파는 깨끗한 돈이어야 가능했습니다. 또, 자신이 키우던 가축을 바쳐도 되지만, 상처가 하나도 있으면 안 됐습니다. 하나의 흠결도 없는 깨끗한 가축만이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주변, 혹은 그 안에서는 돈을 바꾸는 환전 상인과 제물용 가축을 파는 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버는 이익은 고스란히 성전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것이 바로 유대교 지도자들의 배를 채워주는, 비리의 온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행한 요단강에서의 물세례는 그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호시탐탐 그를 없앨 시기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 요한의 외치는 소리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발언은 당시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쓴소리였기에 대중들은 그의 올곧음을 우러르고 따랐습니다. 실제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라는 사람이 쓴 역사서에는 예수님보다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그만큼 세례 요한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년 예수도 그의 가르침에 공감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복음을 쓴 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이 이야기를 넣었는데, 이는 역사적 순서이기도 하겠지만 세례 요한의 선포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같은 맥락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도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감명 깊었던 예수님은 그에게 세례를 받고 그 광야에서 오랜 시간 수련을 한 뒤, 다시 유대로 돌아오셨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에서 외치고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 요한과 달리 그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종말적인 선포, 하나님 나라였고, 그의 메시지는 이 세상을 끝장낼 만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에 이어 예수님까지 나타났으니 골치가 매우 아팠을 것입니다. 특히 세례 요한과 달리 예수님은 유대의 엘리트나 지도자들과 날 선 논쟁을 피하지 않으셨을뿐더러 사회적 약자였던 거지, 나그네, 병자와의 만남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비록 고향에서는 그를 외면했지만, 금세 그의 발언과 행동은 주목받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이 그의 모습에 환호했습니다. 유대의 대중들은 그의 가르침에 환호하며 그를 따랐지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귀족과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당도하시기 전의 사람들의 모습과 예루살렘 내에서 고초당하실 때 사람들의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분명히 한쪽 편을 들었고, 그것이 복음서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는 모습,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화를 가르치는 모습,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당시 사람들이 알기 쉽게 말씀하는 모습을 보면, 우린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생애 초반에 자신이 행한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병자를 고치는 치유의 기적을 여러 번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기적을 행하는 그를 보며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로 여겼고, 적대자들은 악령을 쓰는 불순한 위험인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을 알리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유대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알리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 운동이 널리 퍼지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운동이 퍼지는 것보다 자기의 능력으로 모든 일이 벌어졌다고 알려지는 걸 원치 않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당시 죄를 사하는 권한은 하나님밖에 없었고 예수님은 유대의 율법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자기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십자가에 로마군에게 잡히기 전까지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또한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보았을 뿐, 그가 펼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온전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에 동참하지 않았으며 그가 십자가에 달리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한센병(나병)은 당시에 공포 그 자체인 병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믿음으로 인해 그는 깨끗이 나음을 받았지만, 그가 공동체로의 복귀에는 한 단계가 더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해진 몸을 보이고, 그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선포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기록에는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퍼뜨렸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는 그런 기록이 없고, 누가복음에는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소문이 퍼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가복음의 기록처럼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기보다 그의 병이 치유된 소식을 알게 된 사람이 누군가에게 알리며 소문이 퍼져나간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몸이 깨끗해진 것과는 별개로 그는 쉽게 공동체로 들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병의 나음을 판단해야 하는 제사장도 그가 나았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병이 나았다고 쉽게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한센병은 중병이었고,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속죄 제사를 지내지 않고 병이 나았다는 선포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가 제사장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는 선포를 들었어도 사람들에겐 이미 기피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병(죄)이 나았다고는 하나 언제 그의 병이 자기에게 옮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사회로 복귀할 수 있음에도 복귀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였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나빴다고 쉽게 비난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상황에 놓였다면, 아니 지금 낫기 힘든 전염병에 걸렸다가 완치된 환자가 우리 근처에 있다고 했을 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요? 초기 코로나 환자들이 병원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어도 사회로 복귀가 쉽지 않았던 건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한 시기에도 이런 인식이 있는데, 당시엔 더 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만난 환자의 이야기를 대할 때, 그저 질병에 걸린 환자로 여기면 안 되고, 사회적인 부분을 꼭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고 있는가 그리고 갈등 관계에 놓인 이들과 어떻게 화해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회피하고 덮는 사람인가 생각해 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생각을 통해 우리가 좀 더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길 바랍니다.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이현주 #예수와만난사람들
* 위 글은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을 교재로 진행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