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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만난 사람들] 개가 된 들 어떠랴?

  • 관리자
  • 2023-03-08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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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열기

 

사람은 누구나 각자 이해가 가능한 범위가 있습니다. 그 범위는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과 환경이 달라서 각기 다릅니다. 물론 어떤 특정한 배경과 환경이라고 해서 이해의 범위가 넓고 또 반대로 어떤 특정한 배경과 환경이기에 이해의 범위가 좁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배경과 환경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받아들이는 개인의 성향과도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지역에서 살고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이해가 가능한 범위는 대체로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전체가 그렇다고 볼 수는 없고 대체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마음이 상하거나 불쾌해집니다. 그런데 딱히 이유를 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대부분 ‘그냥’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거나 화제를 돌려버립니다. 어쩌면 오늘의 성경 공부의 소재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성경 공부의 제목은 예수님과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간의 논쟁에서 나온 여인의 말을 이현주 목사가 재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보다 낮춰 부르거나 상대에게 모욕을 주고 비하할 때, ‘개’라는 말을 앞에 붙이곤 했습니다. 국어사전에도 ‘부정적 뜻을 가지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하다는 뜻을 더하는 접두사’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매우’, ‘몹시’라는 의미는 그대로 둔 채 긍정적인 단어 앞에도 10대 친구들이 많이 붙여 쓰는 말이 되었습니다. ‘멋있다’라든가 ‘잘 생겼다’ 같은 긍정적인 말 앞에도 ‘개’를 붙여 쓰니 그 말을 스스럼없이 쓰는 10대 친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른들은 꽤 불편했습니다. 그렇다면 10대 친구들은 왜 이런 표현을 쓰는 걸까요? ‘개’라는 표현이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고, 반항하면서 멋있어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쓰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분명한 건 10대 친구들은 ‘개’라는 표현이 어른들에 비해 불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등장하는 ‘개’는 접두사가 아닌 진짜 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마도 두 가지의 이유로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는, 여성 비하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유대인 남성이었기에 그들보다 못한 이방인을 개로 불렀던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직접 하지 않아도 그런 생각을 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여성을 개로 비유한 발언이기에 불쾌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은 문학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작가가 이야기를 구성한다는 뜻을 가진 기법입니다. 우리는 2천 년 뒤에, 발전된 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만 당시 1세기 팔레스타인 상황은 여성을 남성의 재산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그 당시를 판단하면 안 됩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여성 비하 발언이 분명하지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모욕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아이콘이시기에 이방인 여인이라고 해서 차별하실 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했다고 여기기에 불편하고 불쾌한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개가 된 들 어떠랴’라는 제목이 불편하신 분들이 계셨다면 그 이유가 뭔지 나중에 함께 이야기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언어는 시대와 환경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특정한 시대와 환경에서 널리 쓰인 말이 사라지는 예도 있고, 반대로 시대와 환경을 뛰어넘어 오랫동안 쓰이는 말도 있습니다. 이번 주일 목사님의 말씀 증언 때도, 하나님 호칭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불렀던 호칭과 기독교인들이 불렀던 호칭, 동, 서양이 불렀던 호칭은 각기 달랐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만 하나님과 하느님에 대한 갈등이 큰 것 같습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지금의 시대와 환경이 상대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보다 나와 비슷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며 지내게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와 상대가 다르면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을 두고 상대와 나 사이에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기준에 들어와 있으면 나와 비슷한 사람으로 여기고, 기준 밖에 있으면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여겨 멀리하거나 심하면 차별하거나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내부의 기준을 강화하고 다른 사람들을 틀렸다 혹은 나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이건 하느님이건 우리는 그 분을 절대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논쟁을 멈추지 않으니 그건 오로지 그들만의 논리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과의 논쟁을 벌였던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발언은 그의 절박한 심정을 울부짖는 심정으로 드러냈을뿐더러 하나님/하느님 논쟁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 높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실제 귀족들의 잔치가 열리면, 탁자 밑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일부러 치우지 않고 개들이 먹었다고 합니다. 때마침 예수님이 자기 민족을 빗대어 ‘자녀’에 비유하고, 다른 사람들을 ‘개’에 비유했으니 그에 맞대응한 것입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통찰력 있는 대응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의 딸에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도 모르게 잠재된 장애물을 이방인 여인의 말을 듣고 시원하게 걷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여인의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외면했다면, 지금의 역사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불편했을지 모릅니다. 유대인인 나에게 이방인 여인이 자꾸 요청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에게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것,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을 거침없이 치우셨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극복하고 변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배경 살피기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본토와 거리가 멀어 로마의 힘이 강하게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독립을 원하는 유대인들이 많아 사회가 늘 들끓었습니다. 로마 군대가 주둔해 있지만, 이들과 로마에 기생하는 귀족에 대항하는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우니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실제 이들은 당시 기적이라고 불리는 일들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예수와 만난 사람들’에 등장하는 마술의 원을 그리는 ‘호니’나 ‘하니나 벤 도사’는 실제 역사 문헌에도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특히, 하니나 벤 도사는 뱀에게 물려도 아무렇지 않았고 기도해서 멀리 있는 병자를 낫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는 거짓이었습니다. 일례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도 괜찮다고 주장했다가 실제로 죽은 사람들도 있었고 기적을 벌이겠다고 예언했다가 실패한 예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기적을 일으켰던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황을 이용하여 사기를 치거나 선동가들이 판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사회적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지리적 배경은 ‘두로’라는 베니게의 항구입니다. 개역개정판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나오는데, 수리아 지방의 베니게 족속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또, 마태복음에 같은 본문을 보면, 가나안 여인이라고 나오는데, 이는 이방인 여인이라는 점에 초점을 둔 표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그리스 문화가 지배하는 이방 도시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시는 대로 당시 유대인은 이방인을 비하하거나 적대했습니다. 특히, 이방인 여인이라는 위치는 유대인 남성인 예수님과 완전히 대비되는 지점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난주에 등장했던 남편 없는 여인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에겐 선민의식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이들을 선택하셨다는 의식 자체가 처음 시작될 때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하였고, 예수님 때에는 유대인과 다른 민족을 구분하여 차별하고 혐오하는 방식으로 작동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맞물려 이방인의 존재, 특히 유대인들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이방인들을 개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유대인들을 욕할 입장은 못 됩니다. 현재 2023년, 대한민국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을 대하는 이들의 모습을 뉴스로 볼 때면,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이 쓰일 당시는 예수님의 복음이 이방 세계로 퍼져나가는 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언으로 인해 오직 유대인들만의 예수님이 될 수 있고 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예수님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갈등이 심했고,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유대인 회당에서 활동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곳은 유대인들의 활동이 뜸하거나 덜한 디아스포라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같은 메시지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내부가 아닌 외부를 향한 선교에 강력한 동기부여가 됐을 것입니다.

 

문맥 살피기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7장 중간에 있습니다. 1절부터 23절까지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과 전통에 관한 행위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무리를 불러서 그들을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율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더럽고 불순종한 것으로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위선으로 가득 찬 그들의 모습 속에서 추한 욕망을 꿰뚫어 보셨고, 그들이 떠받드는 모세의 말씀으로 그들을 공박했습니다. 무리에게는 비유로 설명하시며 그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회 제도를 만들어도 그 제도의 의도나 진짜 의미를 보지 않고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서 좋은 제도를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처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비판하시며 무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 앞에 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대비입니다. 당시 믿음이 좋다고 한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차별받고 혐오로 판단된 이방인 여인의 모습이 대비되며 어떤 모습이 옳은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는 성경 속의 인물들이 당시 상황과 연결되어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유대인들과 이제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는 이방인들의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과 달리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적 표현이 두드러졌습니다. 이방인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불렀으며, 예수님도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게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쓰였기에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이기 쉬운 표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없는 표현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변화 이후에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시고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을 만든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무엇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시기였기에 이를 강조한 표현으로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예수님의 변화

 

오늘 본문에서 읽은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랑으로 대표되는 예수님인데, 이방인 여인 앞에서 그를 무시하고 배제하려는 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변하게 만든 건 이방인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일관된 반응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바라는 게 너무 소중한 딸의 건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절박했고 더 간절하게 매달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이방인들을 개로 여기던 유대인들처럼 차별하고 혐오스러운 표현을 썼지만, 그런데도 여인은 현명하게 매달렸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기의 입장을 철회했고, 이방인 여인에게 그가 바라는 것을 이뤄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신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합니다. 예수님이 이방인 여인에 의해 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도 있고 그 여인과의 논쟁으로 인해 예수님의 선교 영역이 확장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변하지 않았다는 주장에는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고, 여인의 딸도 낫게 해주려고 했는데, 그 전에 그의 믿음을 시험해본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도 하나님을 애타게 찾던 분이었기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보다 예수님 자신의 편견이 이방인 여인의 한마디에 부서졌다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바뀐 예수님의 태도는 이후 기독교인들이 유대를 뛰어넘어 선교의 폭을 넓힐 수 있게 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다는 유대의 선민사상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변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기독교를 기반으로 사회운동을 하거나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지금 세상이 이 모양인데 내가 얼마나 세상을, 교회를 바꿀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참 자조적인 농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서 차별받는 이들의 말에도 자기의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이라고 자기만의 기준이 없으셨을까요? 그 역시 유대의 문화 속에서 자라면서 보고 배우며 느낀 게 없으셨을까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낮게 여기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거나 무시하기 일쑤고 이유를 딱히 말하기 어렵지만, 불편하거나 불쾌하게 여기는 것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거나 아예 시도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엔, 처음부터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으려고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나를 불편하거나 불쾌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은 왜 나를 불편하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걸까요? 나도 모르는 내 안의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아가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드러난 기적도 드라마로 만들면, 예수님의 단독 주연이 아닌 이방인 여인과의 공동 주연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다른 경우보다 더 공동 주연의 의미가 두드러졌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행동으로 예수님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방인 여인의 마음 자세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궁극적인 조건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요구하는 기도를 이뤄질 때까지 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면서도 자기의 의견을 표현했습니다. 상대방을 비하하고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그의 의견을 존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숨기고 아닌 척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께 제대로 공박 당했고, 여인은 예수님의 변화를 끌어낸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님도 이러셨는데, 우리는 왜 바뀌지 못한다고 말할까요? 바꿀 수 없다고 말할까요?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이현주 #예수와만난사람들

 

* 위 글은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을 교재로 진행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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