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열기
우리가 읽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의 책이 아닌 네 복음서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을 한데 묶어 ‘공관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공관(共觀)’은 공통된 시점 혹은 관점을 뜻합니다. 공관복음은 비록 저자가 다르지만, 공통된 시점이 존재합니다. 그 이유는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저자만의 특수한 자료를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말씀마다 중복되는 구절을 같이 표기합니다. 그런데 잘 읽어보면, 조금씩 다릅니다. 한 사건을 두고 뉴스마다 소식을 다르게 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부분은 추가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삭제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복음서가 맞고, 다른 복음서는 틀리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서는 대부분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자리에 앉아 쓴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예수님의 삶과 말씀에 관한 자료를 모아 편집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기 전에, 각 복음서의 특징에 대해 알고 있으면 이야기를 더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 복음서의 특징을 짧게 정리하면, 마가복음은 가장 먼저 쓰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없습니다. 문체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엑기스만 있는 것이고 나쁘게 보면, 중요한 이야기의 뼈대만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초점은 ‘하나님 나라’에 맞춰져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시작, 1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라고 나오는데, 예수님이 주신 복음, 복된 소식이 ‘하나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쓰였기에 이방인 선교와 복음서 속에 유대의 표현이 두드러집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나라’를 ‘하늘나라’ 즉, 천국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부를 수 없었기에 다른 이름을 대신 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역시 하늘나라로 바꾸어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태 공동체에 필요한 이야기로 적절하게 해석, 배치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유대교를 접하지 않았던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쓰였기에 유대교만의 지엽적인 신앙보다 조금 더 포괄적인 종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누가복음엔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회적 약자에 관한 관심과 사랑을 듬뿍 담겨 있습니다. 같은 본문이라고 하더라도 내용이 풍부하고 자세한 걸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서 본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다르게 누가복음에서는 복뿐 아니라 화에 대해서도 다룬 부분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저작 시기가 다른 세 복음서에 비해 훨씬 후대이기도 하고 기독교의 변증법 그러니까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설명하고 포교하면서 필요했던 논리들이 기독교 초기보다 발전되었을 때 기록되었기 때문에, 앞서 말한 공관복음과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없어 분리해서 보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각 복음서가 고백하는 예수님의 삶과 행동은 조금씩 다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삶과 행동을 기록하는 시기가 최소 70년, 최대 100년 후였고, 각 복음서의 신앙고백이 조금씩 달라서 어떤 복음서가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 복음서가 지닌 특징을 잘 알고, 시대적 배경과 당시 사회 문화를 잘 살펴야 복음서가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삶과 그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단어 하나를 허투루 여기지 말되, 예수님이 당시에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말했으며, 그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지 잘 파악하며 복음서를 읽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역사적 배경1 – 예수님 당시 상황
예수님과 만났던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고 그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들에 대해서는 ‘제자’라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읽어본 분들이 아시겠지만, 안타깝게도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의 모습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응당 제자라면 스승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이해해서 주위 사람에게 알려주거나 그대로 살아야 하는데, 복음서에서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부족하고 모자란 모습을 보여 예수님께 혼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흩어졌다가 부활하신 이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는 무리입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예수님의 지지자들이었는데, 그날 벌어서 먹고사는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로마와 헤롯을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정치적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로마의 정치범을 처벌하는 십자가에서 허망하게 돌아가시자 뿔뿔이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적대자들입니다. 사두개인 같은 제사장 출신의 종교 귀족부터 율법학자나 바리새인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사회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고 어지럽히며 위험에 빠뜨릴 위험인물로 분류했습니다. 이들은 로마에 빌붙어 그들만의 논리로 사회 질서를 만들었고 오히려 이 질서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른 소리를 하는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와 논쟁을 벌이거나 호시탐탐 예수님을 제압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이들을 욕하고 비판하셨습니다.
역사적 배경2 – 1세기 요한복음 저작 시기 상황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따르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유대인들은 곱게 보지 않았고 공동체 내에서 갈등과 분쟁이 잦아졌습니다. 이스라엘 외부에 있는 디아스포라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스라엘과 가까울수록 공동체 내부에서 유대인들의 힘이 셌고, 반대로 이스라엘에서 먼 공동체일수록 이방인들의 힘이 셌습니다. 공동체의 권력을 두고 내부에서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갈등이 심했습니다. 당시엔 경찰 같은 국가권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면 안전 문제에 있어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닐 경우,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내부에서 유대인들은 눈엣가시 같은 기독교인들을 로마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로 모함해 이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기도 하고 로마에 직접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점점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갈등은 격해졌고,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처했던 상황을 자기들이 처한 상황에 빗대어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았던 적대자들을 자신들을 위험으로 몰고 있는 유대인들과 비교하고, 논쟁과 위험에 몰렸던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들과 비슷하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외부에서의 위협도 있었는데, 그리스 철학 같은 외부 학문과 이단의 발현이었습니다. 당대 최고로 평가받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대철학자들이 일군 그리스 철학과 대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논리적으로 가다듬어야 했고, 논쟁에서 밀리지 않고 그들을 설득할 수 있게 체계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 교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 둘의 논쟁과 발전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기독교의 교부들도 그리스 철학 일부를 받아들이고 교리를 가다듬는데, 활용했습니다. 이렇게 1세기 기독교인들은 외부와 내부의 갈등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지켜내기 위해 헌신했고 목숨을 위협받는 위험한 상황 가운데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모습이 성경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에서 자신을 지키고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결정이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에 두드러지게 반영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의 이야기, 둘의 반응 – 시각장애인의 눈 뜸(기적)
오늘 이야기는 날 때부터 눈을 뜨지 못했던 시각장애인이 예수님을 만나 기적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게 주된 골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 예수님의 어떤 특별한 행위 즉, 기적만을 기억합니다. 주변의 다른 이야기는 외면하고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이뤄내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예수님의 기적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특별한 존재로 고백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왜 기적을 일으키셨으며, 그 기적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전혀 모르게 됩니다. 역사 속의 예수님을 배제한 채 성경 속의 예수님만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당사자인 시각장애인의 처지에서 보거나 예수님이 행한 기적의 의미를 알고자 노력하면, 너무 위대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특별한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조금 더 닮아갈 수 있는 친숙한 예수님이 따라 살 수 있을 것 같이 다가올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사람이 살던 시대의 장애는 지금 이 시대의 장애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여겨졌습니다. 당시 질병은 죄의 처벌이었으며, 병의 경중에 따라 죄 역시 크고 작게 평가받았습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질병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평가로는 부모의 죄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당시 공동체를 주름잡던 사람들은 환자들을 볼 때마다, 죄의 유무를 따졌고 회개를 강요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환자들은 경제적 활동도 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격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이었던 그는 거지였던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선을 바라거나 구걸하지 않으면 생존이 위험해졌기에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던 이들은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형제여, 무엇이 보이는가?’에서처럼 그는 실제로 눈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사회로부터 날카롭고 저주 섞인 시선을 받는 게 더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상대의 입장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평가했고 그 평가로 인해 공동체에서 외면받고 배제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회에서 외면한 그를 뿌리치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이 보게 되었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당시 질병이 죄로 여겨졌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는 증거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용서받았으니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에게 나은 몸을 보이기만 하면 그는 사회적으로 복권되어 사람들이 누리는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사회로부터 받은 차별과 배제, 멸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적이 있기 전,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려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각장애인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저주와 멸시를 받은 사람에게 그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쓰였다는 말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무너졌던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말이었습니다. 눈을 뜨게 된 일이 제일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존감을 회복하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면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더 크고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새하늘 새땅이 아니었을까요? 시각장애인은 병이 낫기 전에 이미 자기의 장애를 극복할 힘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내 안에 가득 찼던 생각이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그 또한 변화된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고 새 하늘 새 땅에서 살기로 결단합니다. 그러니 누군가 옆에서 험담하거나 자신을 평가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 기억해야 할 게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사회적 참사가 일어나거나 외부의 편견과 압력을 견디지 못해 삶을 마감하는 분들을 두고 개신교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발언했습니다.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에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였다는 것과 개신교 목사들이 아무 이해와 공감 없이 던진 무례한 말은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삶을 꿰뚫어 보셨고 그의 자존감을 높여주었습니다. 반면 개신교 목사들은 마치 바리새인처럼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 없이 자기 생각이 옳다며 떠벌여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과 내 편과 적을 나누기 위해 떠벌리는 일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과 행동을 잘 살펴서 어떤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표현할 때는 깊은 고민과 기도 후에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의 이야기, 둘의 반응 – 바리새인의 눈 감음(외면)
시각장애인이 시각을 회복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제사장이 아닌 바리새인들에게 데려왔습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여겼나 봅니다. 평생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보게 된 일이 가능한 일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가능한 일인데, 예수라는 자가 믿지 못할 일을 벌인 것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차별적이며 배제적입니다. 설령 그가 죄를 용서받아 앞을 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악령을 통해 잠시 눈을 뜬 것처럼 여겨졌다고 판단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그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시각장애인을 제사장이 아닌 바리새인에게 데려온 것입니다.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던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깎아내리기 위한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가 기적을 행한 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죽을 위험에 놓인 이들도 죽지만 않게 하고 안식일이 지나야 제대로 된 구조행위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생명이라 하더라도 율법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시각장애인에게 기적을 행한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가진 생각과 시각장애인을 향한 치유 행위를 보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왜곡된 시선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의 행위를 외면했습니다. 자기만의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재단했습니다.
앞을 보게 된 시각장애인을 여전히 차별과 멸시로 대한 사람들과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부정하며 시각장애인의 삶을 외면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보다 그들이 견고하게 만든 기준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길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하나님이 행한 기적을 외면했고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괴롭고 힘듬을 들여다보지 않고 눈을 감고 외면한 것입니다.
누가 보지 못하는가, 누가 죄인인가
오늘은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 누가 진짜 죄인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로 인해 앞을 보게 되고, 그동안 받은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게 된 사람과 아픈 이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고 예수님의 치유 행위마저 눈감아버린 사람들과 바리새인 중에 누가 제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죄를 짓고 있다고 여기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던 일, 농사지으려고 산 땅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이야기,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저녁에서야 일을 시작한 사람이 같은 임금을 받았던 일 등 예수님은 당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이해하지 않았거나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견 표시였을 것입니다. 지금 2023년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배운 대로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쓴 사람은 예수님과 적대자의 관계를 기독교인과 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의 당시 상황으로 풀어냈습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처럼 살고자 애썼던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외면한 유대인들, 자기들의 논리가 더 중요한 철학자들이 그들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보는 사람입니까?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까?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이현주 #예수와만난사람들
* 위 글은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을 교재로 진행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