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열기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제겐 어쩌면 여러분들이 들으며 불편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양쪽의 감정이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차별’입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차별과 혐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중에도 논쟁이 되는 중심 의제가 바로 성차별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방금 읽은 신약성경 시대가 아닌 인류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그 역사가 무척 깁니다. 반면, 여권 신장 운동이라 불리는 ‘페미니즘 운동’은 옳은 일이니 무조건 해야 하는 사명감에서 시작되었다기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세탁기가 발명된 이후, 그러니까 여성들이 가사노동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이후에서야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몇몇 여성들이 정치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참정권 운동으로 이어졌고,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서 여권 신장 운동은 사회의 다른 운동(노동자 권리 운동, 인종 차별 반대운동 등)과 연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고 차별해 온 역사가 워낙 길었었기에 이들의 운동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사회에서 쟁점화시키고 문제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조차 매우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온 인식을 바꾸기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외국은 차치하고 우리만의 예를 들더라도, 여성이 대학 같은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나 회사에 취업해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 지도 불과 몇십 년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여성이 회사에 취업하는 것은 가계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지, 여성이 사회적 위치를 존중받았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여성이 벌어온 돈은 대부분 가정 안에서도 남성을 위해 쓰이기 일쑤였으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주로 여성이었습니다. 최근, 아이를 낳지 않는 가정이 늘어나고 물리적인 인구가 줄어들게 생기니, 조금씩 차별받고 희생을 강요받았던 이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변화의 시작은 가사와 육아의 문제를 여성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고, 그에 자본을 투자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옛날에는 아이를 낳아도 동네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같은 동네라는 개념도 사라졌을뿐더러 부모 사이의 은근한 비교와 경쟁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고 동네 놀이터에 보내는 것도 무서워졌기에 사회의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으면 육아는 오롯이 부모, 특히 엄마의 몫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하는 엄마인, 워킹맘들은 일로 인한 스트레스와 가정에서의 가사, 육아 스트레스를 홀로 견뎌야 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회적 시스템으로 인해 도움을 주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더 희생을 강요받는 건 여성들이고, 이들을 향한 시선조차 차별적입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을 보며, 하는 일 없이 돈이나 축내는 이들로 치부하거나 일도 안 하니 맘 편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일을 해도 급여가 차이 나고, 중요한 일은 여성보다 남성에게 맡기며 진급할 때도 같이 입사한 동기끼리 순서가 달라, 간부나 임원들이 대부분 남성임에도 우리는 오히려 여성 상위 시대라고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불과 작년 대통령 선거 때도, 당시 야당의 젊은 당 대표가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발언을 일삼으며 여성과 남성의 편을 갈라 젊은 남성들의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차별하면서 차별하지 않았다고 하고, 혐오하면서 혐오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이 없던 일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지금 2023년을 사는 우리 사회에는 성차별이 존재합니다. 가사와 육아를 포함하는 가정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도, 정치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도 여전히 차별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드러내려고 하면,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낙인이 찍힌 이들의 소리를 사회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을 사마리아 여인의 삶을 살펴보면서, 2천 년 전의 예수님은 어떠셨는지, 지금 2023년을 사는 나는 사회에서 차별받는 존재, 특히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당시의 차별 – 성(性)
성경이 쓰일 시기에, 여성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남성의 재산이었습니다. 십계명에도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여성을 배우자로 인정하는 윤리적인 태도가 아니라 남의 재산에 욕심을 내면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인식이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잣대로 성경이 쓰인 때를 평가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 속에 등장하는 제도나 인식을 통해 당시 예수님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차별할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엔 ‘시형제 결혼법’이 있었습니다. 남편과 결혼한 여인이 사별하게 되면, 남편의 남동생과 결혼해야 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시형제 결혼법’으로 여러 형제와 결혼한 여인의 남편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들의 의도는 부활을 믿지 않는 자기의 신념을 예수님이 인정하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부활한 이들에게는 결혼이 무의미하며 하나님은 죽은 이들과 산 이들 모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사악한 의도로 이 법을 들먹였지만, 사실 ‘시형제 결혼법’은 남성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공동체를 위한 법이었습니다. 남성이 모든 재산을 소유하는 상황에서 남편을 잃게 된 아내는 아무것도 물려받을 수 없었습니다. 부부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그 아들에게 모든 재산이 남겨질 텐데 그 아들이 성인이 아니라면 그 재산이 안전하다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공동체에서는 이들의 재산을 지켜야 했고, 재산이 공동체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남성의 동생과 형수를 혼인시켜 형의 재산을 그의 조카, 그러니까 죽은 형의 아들이 성장한 이후에 온전히 물려주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는 재산을 유출하지 않을 수 있고, 남편이 죽은 가정도 경제적 위기 없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 제도를 예수님을 비난할 의도로 사용했고, 현재 성차별적 제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제도에 성차별적 요소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이 아닌 3천 년 전에 가능한 제도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구약 시대의 법과는 전혀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여인을 낳았던 아버지는 그녀가 커서 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다른 남성에게 팔았습니다. 팔았다는 건 돈을 받고 넘겼다는 뜻입니다. 이 여인을 산 사람 또한 사람으로서가 아닌 재산 그러니까 경제적 가치만 따졌을 것입니다. 당시 사회는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주체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고, 남성의 소유물로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혼장을 쓰면 남성이 여성을 쉽게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팔려 왔던 이 여인은 여러 남자를 거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남편을 데려오라는 요구에 그녀는 남편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인생에서 여인의 마음속에 울분이 가득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첫 시간에 남이 나를 버리면, 나도 당신들을 버리겠다고 했던 삭개오와도 비슷해 보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차별과 혐오의 사회 속에 살았고,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회에서 누가 이 사마리아 여인을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요?
당시의 차별 - 지역 (유다와 사마리아)
오늘 성경 본문의 전반부를 보게 되면,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에 존재하는 극심한 갈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갈등의 시작은 꽤 오래전 역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였던 나라의 분열입니다. 아시는 대로 나라의 분열은 르호보암이 열 지파에서 보낸 원로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아버지인 솔로몬 왕보다 더 강력하고 혹독한 정치를 펼치겠다고 선언한 이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 속에서 다윗과 솔로몬 왕의 시대를 태평성대라고 읽지만, 성경 사이에 숨겨졌던 백성들의 삶은 잦은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가진 자들만의 평화 시대였습니다. 이후 열 지파의 지지를 받은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고, 르호보암이 남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야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고 강대국인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점령하면서 아시리아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사람들을 섞어버렸습니다. 반면, 바빌로니아는 남유다의 지도층을 포로로 끌고 본토로 가버렸습니다. 이후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면서, 바빌로니아 본토로 끌려갔던 남유다의 지도층들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537년, 이들은 페르시아의 유화정책으로 인해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돌아온 남유다의 지도층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권력을 쥐기 위해 순혈주의를 내세우며, 북쪽 사람들을 차별하기 시작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피가 더럽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후 기원전 315년, 그리심 산에 사마리아 사람들도 성전을 짓게 되자 이 둘의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여전합니다. 지금의 갈등을 모두 예전의 역사 때문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 지분이 상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시대에도 남유다 사람들은 북쪽으로 이동할 때,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지 않았습니다. 이들 지역은 서쪽엔 바다가 있고 평야 지대였지만, 동쪽은 험한 산맥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쪽으로 가려면, 동쪽 산맥을 타고 넘어가야 했지만, 남유다인들은 개의치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을 본 사마리아 여인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출신도 달랐고 성도 달랐기에 예수님이 여인을 만날 이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는 길을 사마리아로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지역,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갈등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는 길에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고, 그 여인에게 물을 청했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재산이라는 것, 남성과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을 거셨고, 그녀를 변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변화는 하루아침에, 눈에 번쩍하며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첫 시간에 나눴던 ‘줄탁동시’ 기억나시죠? 마치 그것처럼, 여인의 생각과 맞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차별과 혐오의 시선이 아닌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바라보셨고, 여인의 극적인 변화로 인도하셨습니다. 만약 그녀의 변화가 없었다면, 예수님과 그 여인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에 여인은 변했고, 그것이 그녀의 자존감을 한껏 높여주었습니다. 완전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으로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갈등을 무시하는 일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여성에게 말을 거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고 회당에서 비판받는 사회 분위기에서 말을 거는 일이 쉬웠을까요? 전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기준과 제도를 무시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시선은 그 기준과 제도로 상처받는 사람, 피해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 그들은 백성들이었고 그중에서도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셨고 진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당시 사회 특히,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위험한 행동으로 규정했고 그를 음해할 모의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도 읽고 공부하듯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그 누구도 아끼고 돌보지 않으며, 사랑하지 않는 이들을 예수님은 한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2023년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사회적 약자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될라치면 득달같이 일어나는 우리의 모습에 예수님은 깊은 한숨을 쉬실 것 같습니다. 출근길을 불편하게 하는 장애인들의 지하철 시위, 기업의 이익을 방해하는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시위,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마저 드러내지 못하는 성소수자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를 가로막던 편견과 잘못된 인식이 지금 2023년, 우리에게 없을까요?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이야기를 통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까요? 지금 2023년의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길 바라실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이현주 #예수와만난사람들
* 위 글은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을 교재로 진행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