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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만난 사람들] 막다른 골목에서

  • 관리자
  • 2023-02-08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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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열기

 

저는 지난 시간에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으로 읽는 동시에 의미를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꾸준히 자신의 해석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어떤 것에 의문을 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단히 노력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2023년의 기준으로 수천 년 전에 쓰인 성경을 해석하지 말고 당시 역사적 배경 그러니까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파악해야 성경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특히, 문자로만 전해진 성경이기에 우리는 문자로만 파악하는 단순한 방법을 넘어 문맥을 살피고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등 보다 넓은 범위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읽는 성경 본문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는 한 복음서가 아닌 네 복음서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 중,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을 한데 묶어 ‘공관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공관(共觀)’은 공통된 시점 혹은 관점을 뜻합니다. 비록 세 복음서의 저자는 다르지만, 공통된 시점이 존재합니다. 그 이유는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저자만의 특수한 자료를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살펴보면, 말씀마다 중복되는 구절(보통 평행본문이라 칭함)을 같이 표기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마가복음의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건을 두고 뉴스마다 다르게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부분은 추가되고, 어떤 부분은 삭제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복음서가 맞고, 다른 복음서는 틀리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기 전에,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의 특징에 대해 알고 있으면 이야기를 더 쉽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 복음서의 특징을 짧게 정리하면, 마가복음은 가장 먼저 쓰였으며,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없습니다. 문체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중점적인 내용만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중요한 이야기의 뼈대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초점은 ‘하나님 나라’에 맞춰져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라고 나오는데, 예수님이 주신 복음, 복된 소식이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쓰였기에 유대 문화가 두드러집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나라를 ‘천국’으로 번역한 것인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하나님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러왔고, 하나님 나라 역시 하늘나라로 바꾸어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태 공동체에 필요한 이야기로 적절하게 해석, 배치했습니다. 이건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복음은 하나님을 몰랐던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쓰였기에 유대교만의 지엽적인 신앙보다 조금 더 포괄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의 다시 오심(재림)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누가 공동체가 지녀야 할 모습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특히,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회적 약자에 관한 관심과 사랑이 잘 드러납니다. 산상설교로 알려진 예수님의 유명한 가르침에서 마태복음과 전혀 다르게 직접적으로 복과 화에 대해 기록한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관복음에 제외된 요한복음은 저작 시기가 다른 세 복음서에 비해 훨씬 후대이기도 하고 기독교의 변증법 그러니까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설명하고 포교하면서 필요했던 논리들이 기독교 초기보다 발전되었을 때 기록되었기 때문에, 앞서 말한 공관복음과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없어 분리하는 게 좋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신학적이며 사건 자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뉴스로 생중계되듯 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시의 인식 – 병 그리고 환자

 

오늘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병(간질, 현재는 뇌전증으로 표현)은 2천 년 전에는 보이지 않고, 귀신 들린 것처럼 무섭게 돌변하는 병이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원인으로 인한 뇌의 이상으로 신체가 발작하게 되는 질병으로 판명되고 있으며, 여러 방법을 통해 원인이 규명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2천 년 전에는 보이지 않는 무서운 것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 이 무서운 것은 치료하는 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저주의 징표였습니다. 당시엔 이게 왜 생기고, 어떻게 퍼지는지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생기고 나면 그것에 대해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토대로 의미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겐 인과응보, 권선징악 같은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아프고 힘들게 하는 것들은 하나님이 그의 뜻을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더 나아가 잘못 특히, 죄를 벌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병이 얼마나 크고 중하냐에 따라 죄의 크기가 구별되었고, 죄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당시 중병을 앓는 환자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는데, 여기서 격리는 좋은 시설에서 그 병을 치료하는 게 아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쫓겨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축출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경제 활동도 불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이 베푸는 호의 혹은 자선 같은 도움을 통해서만 삶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병에 걸렸다고 하면, 사회로부터 외면받으며 차별받고 온갖 저주의 대상이 되었으며 회개를 강요받았습니다. 설령 그들이 병이 나았다고 하더라도 공동체 내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제사장이 그의 병이 나았다는 선포를 해주어야 가능했습니다. 제사장의 선포는 하나님이 그의 죄를 용서하셔서 공동체로 들어와도 문제없다는 허가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허가증이 없으면 환자는 병이 나아도 공동체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질병은 육체적 병인 동시에 사회적 처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병 혹은 환자를 접할 때, 그들의 육체적 고통만을 떠올려서는 안 됩니다. 그가 받은 사회적 처벌 즉, 차별과 멸시, 냉대와 조롱도 함께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사람들의 외면과 차별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하며 그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을 품에 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기적을 병의 치료보다 치유라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병을 낫게 하는 치료보다 그 병으로 인한 사회적 처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치유 받은 환자들은 많은 경우, 병으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보다 사회적 차별과 질시를 더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마음속에 깊게 자리 잡은 응어리를 풀어냄으로써 그들을 자유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가 그들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했으며 그 힘이 결국 질병을 극복하게 만든 것입니다. 의사의 치료가 외부의 힘을 통해 병증을 없애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치유는 환자가 가진 내부의 힘을 움직이게 만들어 병을 스스로 극복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치유 받은 사람들은 그동안 받았던 사회적 처벌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예수님의 치유 방식을 못마땅해했고, 마가복음 3장을 보면, 그가 사탄의 힘을 빌려 병을 치료하는 것이라는 악성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2023년을 살고 있지만, 예전의 마음가짐이 남아 있습니다. 과학과 의학이 예전보다는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밝히지 못한 질병이 많고, 치료하지 못하는 불치의 병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유효한 코로나19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과학과 의학이 이렇게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가 퍼지면서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코로나19 초기에 확진자가 나왔을 때, 동선뿐만 아니라 개인 신상정보가 SNS로 퍼지기 일쑤였고, 어떻게 살리고 치료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병에 걸렸는지 잘못을 따지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이후, 확진자가 대규모로 나오면서 출신 지역을 이유로 차별받는 이들도 늘어났습니다. 이뿐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기침만 하면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고, 유럽에서는 아시아인을 상대로 한 인종차별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병은 운이 나빠 걸리기도 하고, 유전이나 주변의 영향을 받는 경우도 많은데 우리는 왜 병에 걸렸다 하면 병에 걸린 개인만 탓하고 책임을 묻는 걸까요? 그렇다면, 2천 년 전과 지금을 얼마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가 코로나19를 온전히 극복하고자 한다면, 예방백신이나 치료제보다 우리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먼저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사회의 갈등

 

예수님 시대에 많은 사람에게 지지를 받은 사람 중에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초기 이들이 보여준 엄격함과 단호함은 예전 제사장이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습니다. 율법을 엄격히 지키며 설파하는 모습은 호감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권력을 얻게 되면서, 이들은 율법을 정죄의 도구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모든 사람에게 엄격함을 요구했으며, 죄인은 무조건 회개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빈곤했던 많은 사람은 회개보다 죄인 됨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는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서 옷술이 큰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정죄하면서도 이것이 하나님의 처벌이라며 유대인 내면의 두려움을 이용해 그들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로마의 권력에 빌붙는 이들, 권력자들을 싫어했던 젤롯당원(열심당원)들은 권력자들을 향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으며,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폭력으로 인한 공포는 자유보다는 억압의 모습으로 이어졌고 당시 사람들은 로마로부터 독립을 원하면서도 선뜻 이들의 방식에 동조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분열된 사회는 공동체의 정의가 사라지고 극도의 이기주의만 남았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짙어졌고 오래전부터 유대의 법으로 금지된 고리대금업은 널리 횡행했습니다. 복음서에 사람들의 일터로 포도원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사람들이 먹고사는데 필요한 곡식을 기르기보다 당시 포도가 고급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한 재료로 높은 부가가치를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백성들의 삶은 생존에 필요한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계속 피폐해져만 갔습니다. 구약 시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던 이유는 다 아시다시피 그 사람들이 타락했기 때문인데, 당시 그들은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는 암묵적인 약속도 외면하고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돕거나 환대하지 않고 오히려 외면하고 차별하는 이들이 사는 사회가 바로 지옥임을 성경이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곳에 하나님의 처벌이 내린 것입니다. 그랬기에 유대인들도 그런 지옥에 살면서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애타게 열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은 ‘때가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 보니 사탄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요원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치고 여러 행동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으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그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이해하지 못했든, 각자 자신이 바라는 욕망이 많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했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활동은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따르게 했지만, 그들도 예수님처럼 살 것인가 하는 결단의 때가 오면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서기 일쑤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뇌전증을 앓아온 자식을 키운 아버지는 자식이 아파서 힘들었겠지만, 주변의 온갖 비난과 저주의 말로 인해 절대 무너지지 않는 벽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던 차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벌인 기적의 치유 사건들이 소문으로 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나타나 귀신을 쫓았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아버지는 불안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도 그의 불신은 여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보고 실망했다가 아이의 아버지마저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자, 그의 반응을 그대로 되돌려주며 과장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에게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은 회개와 더불어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아이의 아버지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관심은 적고 내 자식만 건강해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마태복음은 겨자씨의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작은 믿음도 큰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그가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를 몸소 살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과 무리, 아픈 아이를 데려온 아버지에게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부족함을 보았습니다. 지금 전 세계엔 수많은 기독교인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르며, 살아내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라고 부르는 것이 처음 믿기 시작한 초심자의 모습이라면, 그의 삶을 기억하고 그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신앙인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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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은 이현주 목사님의 '예수와 만난 사람들'을 교재로 진행된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발표된 글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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