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최근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정말 한겨울 같은 날이 계속됐습니다. 그간 입었던 얇은 옷을 서둘러 옷장에 집어넣고 대신 두터운 외투를 꺼내 입었습니다. 예전엔 잘 입지 않았던 내복도 준비해 둡니다. 기온이 떨어져 추운 날씨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겨울이 이렇게 춥지 않아도 되나?’ 싶을 정도였는데, 그 생각이 무색하게 찬바람도 아닌 칼바람이 부는 날씨로 돌변했습니다. 아마 이런 날씨에 예전처럼 얇은 옷이나 여름옷을 입는 분은 안 계실 겁니다. 계절이 바뀌었고, 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옷을 바꿔 입지 않으면 위험해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환절기에 걸리는 감기는 바이러스 때문이지만, 계절의 변화에 맞춰 옷을 바꿔 입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 계절의 변화는 올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나 그와 위도가 비슷한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꽤 오랫동안 이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것이 익숙해졌습니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면 선선한 가을이 오고, 가을이 끝날 때쯤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 오며 그 후에 눈보라를 뚫고 꽃이 피는 봄이 다가섭니다. 한동안 날리던 꽃가루가 사라질 때쯤 다시 여름이 시작됩니다. 변화는 우리를 살리는 것이지만, 오래 반복되면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2025년도 12월 한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내년 2026년이 되면 많은 사람이 2025년이 시작되었을 때처럼 새해의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공부’, ‘금연’, ‘금주’, ‘다이어트’ 같은 개인적인 계획부터 기독교인들은 ‘성경 통독’을 두 번 하겠다거나 ‘아침 말씀 묵상’을 한 해 동안 하겠다는 신앙의 계획도 세웁니다. 그런데 계획이라는 것이 1~2월만 지나면 흐지부지되거나 소위 작심삼일처럼 되는 경우가 쉽습니다. 이유도 다양합니다. ‘의지가 부족해서’, ‘목표를 너무 크게(높게) 잡아서’, ‘주변의 유혹이 많아서’ 그럴 때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동기 부여 영상’을 찾아봅니다. ‘동기 부여 영상’은 나를 일깨우고, 변화를 촉구하는 일종의 영상입니다. 내용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목표를 낮게 잡고, 목표를 이뤘을 때 충분한 보상을 하거나 스스로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예전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높은 목표를 세우고, 변화하고자 하는 의욕이 큰 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계획이나 생각과 다르고 의욕과 다르게 의지는 크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변화는 어려운 일이라는 방증입니다.
대림절을 맞아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며 지난 주일낮예배 때 담임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기억나는 내용은 마냥 기다리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깨어 준비하는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대림절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부활절이나 성탄절처럼 교회의 큰 절기를 준비하면서 사순절이나 대림절을 준비할 때,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사순절엔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해 내게 즐거움을 주었던 것을 끊었습니다. 맛있는 음식 대신 금식을 선택하고, 기쁨이나 즐거움을 주는 티브이 시청이나 그 외 바깥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대림절엔 바쁜 시간을 쪼개 성탄절 장식을 하기 위해 모여 외부에 대형 트리를 꾸미거나 예수님이 오실 예배당을 멋지고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순절과 대림절에 우리가 기억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그 당시엔 그것이 사순절과 대림절의 의미를 살리는 것이라 믿었지만,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무엇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본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역시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사순절과 대림절에 해왔던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을 찾고자 했습니다.
오늘 주신 성서일과의 말씀 중 이사야의 말씀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한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남왕국의 왕실 예언자였던 이사야는 국제 정세를 잘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는 북왕국의 멸망이 남왕국 유대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가 될 기회로 보았습니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야훼 하나님이 공평하고 정의로운 다윗과 같은 메시아를 보내 아시리아를 비롯한 강대국을 몰아내고, 야훼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는 통일된 왕국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그들이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애원했을 때 외면한 그들의 모습에서 공평하고 정의로운 메시아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요? 아마 북왕국이 멸망했을 때를 동포를 구해야 할 때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통일 국가와 메시아가 올 기회로 본 남왕국 유다의 예언자를 경멸했을 것입니다. 이는 남왕국 유다의 왕실 예언자였던 이사야의 한계였습니다. 그는 야훼 하나님이 그들에게 메시아를 보내 북왕국을 멸망시킨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주변 왕국을 굴복시킨 뒤에 세울 남북 통일왕국을 꿈꾸었습니다. 이사야 11장의 내용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후 남왕국 유다는 선민의식에 빠진 채 기회만 노리다 바빌로니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선민의식은 예수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그들은 구원에 이를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다만, 죄를 지은 사람과 짓지 않은 사람을 구별했습니다. 율법을 잘 따르면 구원을 얻지만 그렇지 않고 죄를 지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죄를 지은 사람과 짓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컸습니다. 죄인은 손가락질받았고, 능욕과 수모를 당했습니다. 물론 죄를 지어도 속죄 제사를 드려 깨끗해진 사람은 괜찮았습니다. 문제는 그 제사를 누구나 어렵지 않게 드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멀었고, 성전에서 드릴 제사엔 내가 쓰던 돈이나 직접 기르던 짐승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릴 것이기에 내가 쓰던 더러운 돈은 성전에서 쓰이는 깨끗한 돈으로 바꿔야 했고, 하나님께 드릴 것이기에 직접 기르던 흠 있는 짐승이 아니라 성전에서 키운 흠 없는 짐승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나날이 배를 불렸고, 유대 백성들은 갈수록 굶주렸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베풀며 죄를 용서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의 세례는 단순히 가진 것 없는 유대 백성의 죄를 용서하는 의미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유대 백성의 고혈을 빼앗는 성전 귀족들을 비판하며 그 체제를 위협했던 것입니다. 유대가 진정으로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길 원했던 세례 요한은 유대가 바뀌지 않고 백성을 핍박하는 귀족과 지도자를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보낼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쳤습니다. 그 외침은 예루살렘이 아닌 광야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그만큼 성전을 중심으로 뭉쳐진 세력이 썩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자신의 뒤에서 오는 분은 나와 달리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거라고 말합니다. 그가 세례를 주었던 물이 아닌 성령과 불은 의미가 달랐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은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한 뒤, 쭉정이를 태울 용도입니다. 한 마디로 백성을 괴롭히고 변화가 필요한 유대를 방해했던 이들을 향한 공격의 선포였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변화하지 못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고, 이후 세계적으로 질타를 받는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서일과 중 오늘의 본문은 로마서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작은 제목이 ‘덕을 세워라’입니다. 당시 덕을 세우는 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세례 요한의 예언이 무위로 돌아가고 변화하지 못한 유대의 결과는 강대국 로마에 의한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민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디아스포라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후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생겨났고, 유대인 중에서도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다만, 아직 유대의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해 공동체 안에서 율법이나 할례를 강요하거나 이방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품은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내 믿음이 옳다고 확신하여 같은 공동체에 있는 약한 사람을 굴복시켜 따르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넓은 품으로 품고 그가 돌아올 수 있게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한 사람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음은 당연합니다. 예수의 행동 역시 자신이 옳다는 확신 때문이 아니었고, 유대가 불쌍하거나 오직 유대만이 하나님께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본받는 길은 예수와 같은 생각을 하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신앙의 경력이 길고, 믿음이 깊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신앙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강한 분들이 약한 분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나와 같은 모습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기준이 하나님과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공동체에 모인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변화를 실천하고 그 변화를 품는 공동체에 기쁨과 평화를 충만하게 주실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당시의 모진 핍박을 당하더라도 이겨낼 소망을 품게 했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바로 이런 변화를 통해 가능했습니다.
대림절을 맞아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 여러 순서를 아무 의미 없이, 매번 하는 것처럼 보내기 쉽습니다. 매주 하다 보니 익숙하고 긴장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순서는 오랜 기독교의 역사 속에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로 고백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모든 순서에 의미를 두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이런 행위에 마음을 집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온 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을 어떤 큰 행위나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우리의 진심입니다. 단, 변화된 진심입니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더라도 속마음이 그렇지 않다면 껍데기뿐입니다. 우리의 변화된 진심으로 예배의 본질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찬양의 가사에 집중하고, 기도의 한 마디에 온 맘을 다해야 하며, 성경 말씀이 내 마음에 심기게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남왕국 유대가 가져야 했던 것은 슬퍼하는 마음과 돕지 못한 자책감이어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보고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자들이 가져야 했던 것은 그동안 지은 죄에 대한 회개와 유대의 변화를 이끌고자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돈이 없어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자비를 베푸는 모습이어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둘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대림절을 맞이하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가 직접 찾아가서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죄인 취급 당했던 병자들과 차별받았던 여인과 어린이, 이방인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지금 사회에서 부당한 이유로 죄인 취급받고 차별받는 이들 곁으로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느끼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다른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변화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지만,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사야는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동포였던 북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을 외면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예언을 무시하고 유대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고 괴롭히고 억압했습니다. 그 결과 두 나라는 멸망했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동체만 남았습니다. 이 공동체에도 변화가 요구되었습니다. 예수의 행동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고 예수가 찾아가 만났던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느끼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변화를 구약의 유대나 마태복음의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자처럼 외면한다면 우리도 멸망이라는 위험을 거스를 수 없을 것입니다. 큰 변화가 아니더라도 우리 삶의 작은 변화를 통해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주시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만약 우리가 작은 변화를 위해 노력한다면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칭찬하고, ‘잘했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며 거둠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작성자 : 허준혁 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