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이제 더위가 옅어지고 선선한 공기가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때마침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인 창조절을 맞게 되었습니다. 원래 창조절은 서구 기독교의 절기엔 없었습니다. 오늘 주보에 보신대로 성령강림절을 보낸 이후 이어지는 절기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많은 교회가 이 교회력을 적용해서 사용합니다. 창조절은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인 동방정교회의 세계 총대주교가 1989년에 창조 세계를 위한 기도의 날을 정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목받은 환경에 관한 이슈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지금은 교회력에서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절기가 되었습니다. 그 말은 이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화자찬했던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구의 역사 46억 년 중에 인간이 등장한 것은 길게 잡아 20만 년에 불과해서 1%도 아닌 0.004%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지구의 역사를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적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명을 씻고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을 보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이 창조절을 보내는 동안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마음에 품고 그의 사역에 동참하는 동역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어제는 너무도 화창한 날씨에 감사함이 절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먹구름이 끼더니 장마처럼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우산을 써도 몸이 흠뻑 젖을 만큼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가까스로 비를 피하자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이 개었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었습니다. 하루 사이 이런 날씨의 변화가 예전에 있었나 싶었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요나처럼 땡볕에 놓일 땐 뜨거운 햇볕을 가릴 나무 한 그루 없음을 탓하며 불평하고, 막상 나무가 생기면 감사하기보다 당연하게 여기고 또 그 나무가 햇볕에 타버리니 다시 불평하는 모습이 남의 모습 같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어제 하루만 해도 날씨로 인해 나약한 사람은 감정의 높낮이가 생기고 삶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화창했던 날씨에 대한 감사가 잊히지 않았고 어쩌면 그동안 하나님께 받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지 하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것을 빼앗으면 인간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내 것이라 주장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하면서 모든 피조물에 선물을 주셨지만, 다른 피조물에 주지 않은 가장 귀한 선물을 인류에게 주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에겐 하나님의 보호 아래 먹을 것이 넘쳐났고, 아무데서 잘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여기까진 다른 피조물도 누릴 수 있는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뭘까요? 바로 자유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만든 애완 장난감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하라면 이렇게 움직이고 저렇게 하라면 저렇게 움직이는 마리오네트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 우리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을 질투한 뱀이 둘을 유혹했습니다. 뱀은 먼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검은 속내를 숨기고 모른 척 물었습니다. 순수했던 아담과 하와는 처음엔 의심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선물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둘은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줄 알았던 아담과 하와는 죄의 결과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고, 나뭇잎으로 벗은 몸을 가리고 도망 다니기에 바빴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처음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건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아담은 평생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하와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첫 죄가 벌어졌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 이후 그들의 자식인 가인은 더 나아가 형제를 죽이는 패륜 범죄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왜 인류에게 자유를 선물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아니면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누군가가 악행을 저지르려고 할 때, 막아주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누군가의 악행을 다 알고 계시고, 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과연 하나님은 선한 분인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만듭니다. 절대적인 존재인 하나님께서 악행을 저지르는 모습을 알고 있었고 이를 막지 않았다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선한 분이 아니거나 아니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역사가 꽤 오래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큰 비극이 생겼을 때, 그 사건이나 사고를 경험했던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역사적으로 큰 비극이나 이해할 수 없는 재난을 하나님의 분노 또는 처벌로 이해해 왔습니다. 우리가 큰 죄를 지어 하나님께서 크게 화나서 우리를 꾸짖거나 혼내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하나님이 선하고, 전지전능하다는, 두 가지의 명제를 지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거나 사회에 큰 변고가 있을 때, 야훼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개인이나 나라를 벌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회 공동체의 생존전략이었을 것입니다. 의로운 자가 흥하지 않고 불의한 자가 흥한다면 그 사회의 정의는 사라지고, 정의가 사라진 사회는 무법천지가 될 것이고, 곧 무너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긴 하지만, 죄지은 우리를 벌하는, 무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 치의 실수나 잘못도 용납하지 않는 분, 죄를 지었다면 언젠가는 처벌하시는 분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성서일과인 예레미야 28장에 나온 토기장이의 비유는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다가 잘되지 않으면 금세 덩어리를 뭉쳐 다른 그릇을 만듭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토기장이가 잘되지 않으면 다른 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유대가 악행을 계속 저지르면 그들에게 내릴 재앙을 준비하고 있다고 살벌하게 경고합니다. 그래서 유대 이스라엘 역사가 펼쳐지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모습은 다른 신을 질투하고 유대 이스라엘을 처벌하는 무서운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139편도 그러합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모습을 찬양한 시이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유를 선물하신 분이라기보다 모든 것을 알기에 우리는 어떤 잘못도 저지를 수 없다는 압박감과 그런 생각이 우리의 삶을 옥죄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시편의 표현에서 우리는 과연 더할 나위 없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의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공동체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당근과 채찍으로 여겨졌던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잦아진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교만이 하늘 높이 솟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역사가 반영된 성경이 ‘욥기’와 ‘전도서’입니다. 의로운 자에게 불행이 닥치고, 불의한 자들이 큰 목소리는 내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시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으면서 불의한 일을 막지 않으실까?’ ‘하나님이 선한 분이지만, 더 강한 신에 눌리는 전지전능한 분이 아닌 걸까?’ 더불어 그동안 사회를 유지했던 기본 질서인 ‘인과응보’, ‘권선징악’이라는 사람들의 인식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는 사람들의 이런 인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유대 이스라엘은 더 이상 참기 힘들었습니다. 오래된 강대국의 지배에 ‘이제 우리도 죗값을 받을 만큼 다 받았다’라고 여길 만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우리를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등장하자, 많은 유대인이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 로마제국을 끝장내고 새로운 유대 이스라엘을 세울,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러 온 유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예수님을 떠받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끝이 어땠습니까? 너무도 무력하고 허무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떠받들어서인지 그의 죄목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여전히 하나님은 선하고 전지전능한 분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선하기만 한 하나님보다 더 강력해 보이는 로마의 신으로 옮겨간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고 전지전능한 분이기에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서일과인 누가복음 14장에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십자가가 뭘까요? 자기 삶에 대한 책임감을 뜻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을 포함한 가족,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을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법은 스스로 결정해서 그를 따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이는 로마를 끝장내는 것보다 위대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이스라엘은 모든 책임을 예수님에게 맡겨놓고 그냥 새 세상을 달라고 요구했을 뿐입니다. 마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같은 성서일과인 빌레몬서도 누가복음 14장과 흐름을 같이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며 그의 종인 오네시모의 복권을 부탁합니다. 당시 신분제 사회였던 로마에서 이런 선처나 부탁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빌레몬을 존중하며 그의 선택을 권유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오네시모만큼이나 빌레몬도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정권은 누구에게 넘어갔습니까? 바로 빌레몬입니다.
다시 질문으로 되돌아오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류에게 자유를 선물하셨을까?’ ‘하나님은 왜 인류의 악행을 막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인 자유를 선물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선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셨다면, 인류는 하나님의 애완 장난감으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세상은 인류가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갔을 것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인류에게 자유를 주셨고 생각하고 판단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 결과를 받아들이게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류가 하나님의 선한 의도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좋은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 인류는 마치 뱀의 유혹에 빠진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만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탐욕을 향해 끝까지 달려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인 자유가 우리 스스로에게 독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바이올린 명장 슐레스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강요하지 않고 끊임없이 권유하며 옳은 길을 걷길 바라는 것입니다. 힘으로 억압하고 강요하며 굴복시키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때론 다른 길로 갈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옳은 길을 보여주고 제발 그 길을 걸으라고 요청합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해 예레미야의 경고를 들은 유대 이스라엘로 이어져 지금 여기 우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오랜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과연 가장 귀한 선물을 받은 우리의 보답은 무엇일까요? 오랜 기대를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답은 우리 스스로 내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인류의 탄생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가장 귀한 선물인 자유를 주셨고, 인류는 귀한 선물을 잘 사용하기도 했지만, 더 자주 오용하고 남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지어 벌을 받는 무서운 분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였지만,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벌을 주시기보다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더 옳은 길을, 더 나은 길을 선택하길 바라고 그렇게 조금씩 우리의 삶을 바꾸길 바라셨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 곁에서 그런 선택을, 그런 삶을 바라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창조절을 시작하는 시기에, 현재 우리의 삶에 만족하고 이대로 여기가 좋다고 말하는 삶을 꿈꾸십니까? 어쩌면 그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무너뜨리는 적대자의 삶을 이어가자는 말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고 강요하지 않는 건 그가 그의 피조물인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감각이 무뎌지고 당연하다고 여겨 지나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해달라고 간곡하게 얘기하고 계시지만 모르고 지나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쪼록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예배드리고 감사하면서도 정작 그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에 대해 그가 보여주신 사랑으로 보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두손 모아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