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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 2025년 8월 3일 성령강림 후 여덟 번째 주일

  • 관리자
  • 2025-08-03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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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벌써 8월이 시작되었습니다. 2025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8월입니다. 무더운 날씨에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모쪼록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주님과 하루의 일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려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에 관한 내용입니다. 너무 단순해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죠. 하지만, 쉽고 단순하다고 누구나 그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 동화를 읽었습니다. 거의 부모가 자식에게 글을 익히려고 책을 읽어주었습니다. 이럴 때, 주로 읽는 책이 동화였습니다. 내용이 쉬워 이해가 어렵지 않습니다. 요즘엔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책이 워낙 다양하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많은 경우, 전래동화를 읽어주셨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이야기가 흥부와 놀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랐다면, 모를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형제인 놀부와 흥부였지만, 놀부는 욕심이 과해 부모의 유산을 독차지하고 흥부를 내쫓았습니다. 같은 부모와 자란 피붙이 동생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가 유산을 차지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심지어 먹을 걸 나눠달라고 찾아온 동생에게 형수인 놀부의 아내는 밥주걱으로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흥부는 불쌍한 처지에 놓인 제비를 도와주었고, 그 선행은 그에게 큰 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죠. 놀부는 흥부가 받은 복을 질투하였고 그가 받은 것보다 더 큰 복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멀쩡한 제비를 공격하곤 다시 고쳐주었습니다. 결과는 모두가 아시는 그대로죠. 놀부에게 닥친 죄는 권선징악이라는 네 글자로 정해졌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선행을 권하고 악행을 벌하는 도구로 이야기를 활용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준 부모나 들은 아이들은 흥부처럼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이야기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흥부는 착하긴 하지만, 나태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그는 경제적 능력이 없음에도 무분별하게 자식을 많이 낳았고, 그 자식들조차 제대로 먹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열심히 일하는 대신 돈 많은 형을 찾아가 도움을 받으려 했습니다. 자기에게 닥친 고난을 쉽게 피해 보려는 얄팍한 술수였습니다. 반면, 놀부는 부모의 유산을 무능력한 동생과 반으로 나누는 것보다 능력이 좋은 자기가 갖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가족을 넓은 집에서 살게 하고 넉넉한 재산으로 가족을 먹입니다. 능력 있는 가장의 모습이죠. 흥부와 놀부의 요즘 해석이 어떠십니까? 고전을 비틀어서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현대에 유행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이런 해석은 현대인이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고전 동화인 흥부와 놀부는 해석이 다르게 변했지만,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게 있습니다. 바로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이는 것을 추구해 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고결한 성직자나 수도자뿐이고 대부분은 보이는 것만을 추구했습니다. 과거 예전에는 보이는 것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풍요로운 추수와 튼튼한 성벽, 두터운 갑옷과 강한 무기는 왕이나 신의 모습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힘없는 백성들은 왕이 누군지도 알지 못했지만, 많은 돈과 강력한 권력을 보고 무릎을 꿇었고 충성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강한 적국의 군대를 막아줄 보호막이 필요했습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안전한 곳에서 살려면 큰 권력에 붙어야 한다는 건 본능이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전쟁은 왕이나 황제의 권력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믿는 신의 위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집트의 지배 아래 노예를 살던 히브리들은 야훼 하나님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서 그들만의 나라를 세워 살았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이르는 40년의 기간 동안 히브리들이 오직 야훼만을 의지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였습니다. 물도 없고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광야 한복판에서 히브리들은 40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의지할 거라고 야훼 하나님뿐이었죠. 그런데 점점 삶이 피곤해지고 궁핍해지자 이들은 다른 신을 섬기려고 했습니다. 가진 금을 모아 황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섬겼죠. ‘눈에 보이는황금송아지가 그들의 피곤하고 궁핍한 삶을 끝내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야훼 하나님보다 화려하고 강력해 보이는 황금송아지가 강력한 신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들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눈에 보이고 강력한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토속 신이었던 바알을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오직 당신만을 의지하길 원했지만, 히브리는 배신하고 야훼 하나님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주신 땅을 그들 마음대로 나누기 시작했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생겼으며, 힘이 센 사람과 약한 사람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히브리들의 사회에 야훼 하나님이 낄 자리는 없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호세아는 이렇게 타락한 유대 이스라엘의 악함을 고발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탈출시키고 키웠지만, 이방 신을 섬기고 배신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은 아시리아에 멸망하고 말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오게 할 거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눈에 보이고 강력한 것을 따랐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멸망으로 가는 길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에서는 어땠을까요?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가 가르쳤고 보여준 것을 따르라고 말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의 말씀은 땅에 속한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거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호세아의 이야기가 겹쳐 보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따른 것처럼 골로새 교회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땅에 속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유혹되어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욕망과 탐욕의 찌든 과거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이제 야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라고 말합니다. 이는 바로 보이는 것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에 품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에 품게 되면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례를 받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도 주인도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 구절을 아무렇지 않게 읽지만,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사회에서 사도 바울의 이런 생각은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의 유대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차별했고, 로마인도 유대인을 차별했으며 주인과 종의 개념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안에 그리스도 예수가 있으면 모든 구분이 무의미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만큼 보이는 것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따르기는 어렵습니다.

 

과거의 히브리들이나 유대 이스라엘, 초대 교회가 그랬다면, 현재는 어떨까요? 예전에 미디어나 언론이라고 하면 신문이나 티브이를 떠올렸습니다. 검증된 사람만이 할 수 있어서 소수의 사람만이 미디어라는 권력을 독점했지만, 지금은 소셜 미디어라고 누구나 미디어가 될 수 있습니다. 말을 전하는 미디어, 말과 영상을 함께 전하는 미디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듣고 이야기할 수 있는 미디어까지 미디어의 발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를 사는 개인들은 자기의 모습을 미디어로 노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아는 사람들만 관계를 맺는 정도였다가 소셜 미디어의 특성상 순식간에 나도 모르는 사람과 관계가 확장됩니다. 그런데 일상을 공유하는 건 좋았지만, 이제 현대인은 학교 성적이나 성과뿐만 아니라 일상 모두를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맛있는 저녁 식사를 소셜 미디어에 올리고, 누군가는 멋진 집이나 차를 찍은 사진을 올립니다. 공감을 많이 얻을수록 더 많은 사람에게 퍼지고 글이나 사진을 본 사람은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부럽고 질투합니다. 나는 그러지 못한 현실에 자괴감을 느끼고 열등감에 휩싸입니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누군가는 평생에 한 번이었지만, 다른 누군가는 평범한 일상으로 오해합니다. 반면 사람들은 부끄럽고 좋지 않은 모습은 미디어에 노출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만 노출하는데, 사람들은 한쪽 즉, 좋거나 자랑할 만한 것만 보고 다른 쪽 즉, 부끄럽거나 좋지 않은 모습은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글과 사진 속 일상만을 진짜라고 여겨 스스로 욕망하게 되고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혀 일상을 파괴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에게 주신 누가복음의 말씀은 평소와는 다른 예수님의 매몰차 보이는 행동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이 형제와의 유산 상속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원래 유대 율법에 유산 분배에 관한 내용이 있음에도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것에서 다른 문제가 있음을 알아채고, 예수님은 그 사람의 중심에서 탐욕과 욕망을 꿰뚫어 보았고 결국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곤 탐욕을 멀리하라고 가르침으로 어리석은 부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부자는 소출을 많이 걷었습니다. 자기와 가족들이 먹어도 부족함이 없을 만한 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더 배가 고팠나 봅니다. 아니 그의 탐욕과 욕망을 채우기에 부족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는 소출을 모아두던 곳간을 헐고 그보다 더 크게 지어 소출을 쌓아두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흐뭇해했을 부자의 모습이 상상됩니다. 이제 그에게 소출은 생존을 위한 먹거리가 아니라 자기의 소유와 축적을 위한 것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자기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대신 지어준 농부나 굶어서 괴로워하는 이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에게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준 분이 하나님이라는 걸 잊었습니다. 내가 원래 능력이 뛰어나서 혹은 가진 재산이 많아서 얻게 된 거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가 한창 재산을 모을 단꿈에 빠졌을 때, 하나뿐인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부자가 죽고 나면 그의 재산은 어떻게 될까요? 죽은 부자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자 한 내용은 무엇일까요?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라고 21절에서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능력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능력으로 평가받고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그래서 시험이나 면접처럼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발전했지만, 능력에 비해 과도한 부를 누리고 불의하게 변질되는 생각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능력주의는 능력과 노력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의 성공이 과연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인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는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할 때, 내 능력으로 모든 수확을 이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와 햇빛 등 모든 조건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거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오로지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성공을 이뤄냈다고 말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능력이 떨어지고 노력이 부족했다고 말합니다. 그 평가가 과연 옳을까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교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오만해지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탓하며 조롱하기까지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성공했다면 내 능력과 노력이라고 생각하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주위의 도움받은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실패했다고 해서 능력과 노력이 부족했다고 자괴감을 느끼지 말고 다음엔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주위를 둘러보는 것입니다. 소셜 미디어에 비싸고 고급진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다고 자랑하거나 해외여행을 간다고 뽐내기보다 나보다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내게 온 성공은 내가 지금 우리 사회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운이 없었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 성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산을 나누고 내게 주신 능력으로 도우며 혹시 내가 모르는 곳이 있지 않을까 찾고,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며 마지막으로 나를 이렇게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부요하게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사람들에게 가르친 그 모습 말입니다.

 

여기까지만 하셔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따른다면, 우리는 두 번째보다 더 나아가 세 번째로 가야 합니다. 세 번째는 사회의 변화를 위한 노력입니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기부와 선행을 합니다. 교회도 많이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도 기부와 선행을 많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욕을 먹는 이유는 사회의 변화에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회의 변화를 더디게 만들고, 과거로 거꾸로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사회에서 기부나 선행을 베풀어 왔습니다. 그런데 현대에서 기부나 선행을 하는 단체나 개인이 많아졌습니다. 무엇보다 제도적으로 사회복지 시스템이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기부와 선행을 주도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아무도 기부나 선행을 하지 않을 때, 선구자적 모습으로 앞장섰던 것처럼 사회 변화를 위해 앞장서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불의를 불의라 말하지 않고 침묵하며, 오히려 불의에 기생하는 몇몇 목회자와 대형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처럼 교인이 부족하고 교회가 크지 않아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교인이 많아야만 대형 교회가 아닙니다. 교인이 적어도 온 교인이 대형 교회만을 꿈꾸고 있다면 그건 이미 대형 교회입니다. 모든 사람이 교인이 되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걸까요? 이미 우리는 역사 속에서 증명된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은 크리스텐덤, 기독교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세 유럽이 하나님 나라였습니까? 숫자나 크기, 눈에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외면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하며 탐욕과 욕망에 사로잡혔기에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교인이 많아지는 것이 중요한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미 기독교 문화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은 그리스도 예수가 유대에서 행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꿈꾸게 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불의에 피해받은 사회적 약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편이 되고, 불의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에 맞서야 합니다. 강자에게 강하게 대항하고 약자에겐 더욱 약하게 보살펴야 합니다. 지금 교회가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앞으로의 교회는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많은 여러 단체나 기업과 다를 게 없는 곳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성서일과를 통해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에게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거나 매몰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품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능력주의 사회에 살지만, 내 능력과 노력만 생각하지 않고 주위의 도움을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능력이 모자라느니, 노력이 부족했다느니 하는 말과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다. 나보다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을 돌보겠습니다. 그들을 위해 노력하며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사회가 좀 더 나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불의와 맞서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겠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에 매몰될 때, 하나님과 멀어지고 타락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눈에 보이지 않는하나님 나라를 전하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한 주를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손 모아 거둠 기도 드리겠습니다.

 
작성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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