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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 2025년 7월 6일 성령강림 후 네 번째 주일/ 맥추감사주일

  • 관리자
  • 2025-07-06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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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에 함께하고자 여기에 모인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비록 이 자리에 없더라도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모든 분에게도 우리와 같은 은혜와 축복이 임하길 또한 기도합니다.

 

오늘 주신 하늘 말씀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머리에 떠올려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유대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씨 뿌리는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로마의 부자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겨 농사지을 땅조차 없었던 유대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가르쳤습니다. 씨를 아무 데나 뿌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좋은 땅에 떨어져 30, 60, 100배를 수확한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 이야기를 그들의 신앙 환경에 빗대어 해석했습니다. 씨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그들 스스로를 밭으로 여겼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마음이 닫힌 사람은 들리지 않았고,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은 말씀을 들었지만, 행하지 않았고, 여러 일을 핑계 삼았던 사람은 말씀대로 살고 싶었지만, 살지 않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만약, ‘씨 뿌리는 이야기를 우리의 상황에 빗댄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우리의 마음은 길가입니까? 돌밭입니까? 가시덤불입니까? 아니면 30, 60, 100배를 수확한 좋은 땅입니까.

 

오늘 주신 하늘 말씀 역시 예수님이 제자들과 유대 백성들에게 가르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여러 병든 사람을 고치셨고, 유대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유대 백성에게 희망을 주었던 세례요한이 불의한 방법으로 세상을 떠난 후로, 유대 백성들은 이제 희망은 사라진 것인가 하며 절망에 빠졌습니다. 좋은 땅은 죄다 로마의 부자들에게 빼앗기고, 얼마 남지 않은 땅마저 유대를 다스리는 헤롯 가문과 유대 귀족들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농사를 짓기도 힘들었고, 로마의 대규모 공사에 동원되어 일하든지, 부자들의 포도원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빠듯하게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힘들지만 먹고 사는 건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압제는 유대 백성의 신앙생활을 허락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얻은 것을 로마에 바쳐야 한다는 게 더욱 치욕스러웠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이제 유대를 아예 버리신 것 같아 더 이상 새 하늘 새 땅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 현실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릴 버린 건가 하는 생각이 유대 백성들 사이에 팽배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지도자에게 목말랐던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의 등장에 환호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등장은 유대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왜곡하고 선한 척하며 위선을 떨던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와 논쟁하면서도 거침없었고, 그의 말에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죄로 여겼던 병을 낫게 하고 구원의 길로 이끄는 모습은 유대 백성들이 기다려 왔던 세례요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요한과 달랐던 것은 직접 찾아가셨다는 점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말씀을 선포했지만, 예수님은 병자들을 찾아가셨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어도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의 활동을 이어가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따르고 추앙해도 변하지 않는 모습에 사람들은 전보다 더 많이 모여들었고, 예수님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빠른 속도로 유대 마을 구석으로 퍼지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신문과 뉴스도 없고 소셜 미디어도 당연히 없고 오직 입소문이 전부였던 시절, 예수님의 존재는 어둠에 억눌렸던 유대 백성들에게 내린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가면 갈수록 사회 지배층은 불쾌하고 불안했습니다. 세례요한을 불의하게 죽였던 헤롯 왕뿐 아니라 사사건건 참견하며 옳은 소리를 하면서도 자기들을 깎아내리는 예수님을 불쾌하게 여겼던 것은 유대의 성전 귀족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들릴수록 어떻게 하면 저 명성에 먹칠할 수 있을까만 고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상이몽이라고 했던가요?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유대 백성들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부터 고난을 겪기 시작하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우리의 지도자가 고난을 겪지?’ ‘왜 예수님은 자꾸 자기가 죽을 거라고 말씀하시지?’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유대의 왕이 되어 그들의 바람을 모두 이뤄줄 거라 확신했습니다. 그동안 힘들고 고생했던 것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꼴 보기 싫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도 혼내주고, 우리를 억압했던 로마도 무찌를 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욕망과는 반대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더 읽어보신 분들을 알겠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파송되었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만을 가르치셨고 회개하지 않거나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나라면 달랐을 거야, 난 예수님 따라 살았을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메시지는 살아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은 갈수록 무섭게 변해갈까요. 더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자기만 알고 염치도 모르며 더 탐욕스러운 걸까요. 아까 드렸던 질문을 다시 드려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밭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심긴 말씀 씨앗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의 삶을 전혀 바꾸지 못했다면 길가에 떨어져 내 발에 밟힌 거고, 배우긴 했지만 삶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돌밭에 떨어져 말라버린 것입니다. 말씀보다 내 욕망이 더 커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가시덤불에 떨어져 말씀이 내 욕망에 억압된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았다가 받을 피해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히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어 말씀이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모르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 우리 밭에 뿌린 씨앗을 온전히 수확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색다른 가르침을 줍니다. 열왕기하 5장의 이야기는 엘리사가 시리아 장군 나아만의 한센병을 고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만 보면 엘리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시리아 장군에게 내려 병을 고쳐줬던 은혜로운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이 고향에서 말씀을 전할 때 고향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 그 사람들의 반응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이방인이었던 시리아 장군 나아만을 구해준 그 이야기를 못마땅해했습니다. 왜 이방인이 구원을 받냐 하는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주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유대의 오만한 고향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정한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시편 30편은 궁지에 몰린 나를 구원해달라는 강력한 요구이자 기도입니다. 우리는 한 줌의 티끌 같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수렁에서 건지시고 원수가 우리를 비웃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도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이시오, 원수에게서 구원하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마치 구원을 얻은 것처럼 확신할까요. 무엇이 우릴 예수님과 대적했던 바리새인들처럼 교만하게 만든 걸까요.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6장은 우리 마음속에 심은 대로 거둘 거라고 가르쳐 줍니다. 내게 썩을 것을 심으면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을 품는 사람은 영생을 거둘 거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선한 일을 하며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유대의 율법이나 눈에 보이는 욕망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드러나야 할 것은 멋지고 화려한 얼굴이나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상처 가득한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 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맥추감사주일을 맞아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는 무엇입니까? 이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곡식과 과일이 가진 본래의 추수 시기를 알지 못합니다. 기술의 발달로 사시사철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농사를 짓는 농부거나 어르신들이 아니면 추수 시기를 모를뿐더러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맥추감사주일에 드려야 할 감사가 사라집니까. 우리는 늘 감사해야 합니다. 앞에 걸려 있는 현수막의 글처럼 모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감사합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추수를 경험하면서 기뻐하고 이를 감사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무미건조하게, 남들 눈치를 보며, 어쩔 수 없이 감사하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교회 밖에서 어떤 모습으로 추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진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추수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농사한 열매를 걷고, 노동해서 무언가를 얻는 것도 추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진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가도 추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으로도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이런 모습을 만들어 주신 것도 모두 주님의 은혜라고, 축복이라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쪼록 한 주를 보내시면서 과연 나는 어떤 열매를 거두고 있는가, 어떤 추수를 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것인가를 마음 깊이 생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함께 거둠기도 드리겠습니다.

 
 
작성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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