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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 2025년 6월 1일 부활절 일곱째 주일, 환경주일

  • 관리자
  • 2025-06-01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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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우리 옆과 뒤에 앉은 분들과 인사 나누실까요? 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내려주시길 진심으로 바라며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은 바울의 선교 여행 이야기인데, 두 이야기로 구성되었습니다. 어느 날 바울은 기도하러 가다가 귀신 들려서 점을 치는 종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며 돈을 벌었던 모양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고대 로마는 여러 신을 두루 섬기는 나라였습니다. 그 당시 점을 치는 것은 로마의 흔한 풍습이었습니다. 그 종은 바울 일행과 마주친 이후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한 번만 그러고 지나가지 않고 바울 일행을 계속 쫓아다니며 외쳤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이제 종은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이 종의 주인들이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주인이라는 사람들은 이 종이 귀신 들려 친 점을 통해 번 돈으로 배를 채웠던지라 바울이 그들의 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 자기들에게 해가 되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바울을 고발한 죄목이 좀 웃깁니다. 그들은 스스로 로마 시민이라고 밝히며 유대인인 바울이 자기들의 도시에서 소란을 피운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들조차도 바울이 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고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올바른 품성을 지녔다면 종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었으니 고마워해야 할 텐데 이들에겐 돈이라는 귀신이 쓰여 종의 삶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고마워해야 함에도 바울을 고발한 부끄러움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 고발에 치안을 담당하던 사람들 역시 전후 사정을 살피거나 당사자인 바울의 이야기는 들어보지 않고 그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질을 감행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법 체계가 얼마나 허술하고 함부로 악용되는지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작 잘못한 이들은 누구입니까? 귀신 들린 종을 이용해 자기 배를 채운 그 로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을 부당하게 대했고, 그뿐만 아니라 로마 사회에서 힘없고 약한 유대인이라는 사회적 약자임을 악용해 부당하게 억압한 것입니다. 법을 집행한 이들 역시 올바르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처벌했습니다. 종의 주인들은 치졸하게 자기들의 악행은 감추고 바울의 행동을 문제 삼았습니다. 죄를 짓고 부끄러워해야 할 이들은 오히려 종의 주인인 로마인들과 법을 잘못 집행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일행은 감옥에 갇혔는데, 발에 차꼬를 채운 상태였습니다. ‘차꼬는 머리나 손 혹은 발을 고정하기 위한 구멍이 있는 나무로 만든 장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도 억울한데 차꼬까지 찬 상태였으니 이들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억울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분한 감정을 표현하며 억울함을 강변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 모든 죄수의 수갑과 차꼬가 풀렸습니다. 당시 간수와 죄수들은 바울과 일행이 지진을 일으킨 줄 알고 두려워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그때 정신을 차린 간수가 죄수들이 달아난 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당시에 간수가 죄인들을 지키지 못하면 그 죄인의 죗값을 대신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일행은 간수를 막으며 죄인들이 그대로 제자리에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간수가 바울에게 구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간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족에게 전하고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죄 없는 바울과 일행은 감옥에 갇혔고 이들을 지켜야 할 간수는 죽다 살아났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나중에 바울과 일행도 풀려나긴 했지만,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억울할 일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불평과 불만을 품지 않고 그 안에서 그들의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들을 구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의 이야기를 읽으며, 수많은 일들이 오가는 우리의 일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에게도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며 그 선택의 결과가 우리의 삶을 만듭니다. 아마도 종의 주인들은 바울을 고발한 이후에도 계속 돈의 노예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계 제일이라는 로마의 시민이라는 높은 자부심과 종을 부릴 만큼 돈도 넉넉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잘못된 우월함을 마음에 품고 교만해진 사람들일 뿐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염치없는 짓을 하면서 염치가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 속엔 이런 모습이 없을까요? 그리스도인이라는 마음이 오히려 우리를 교만하게 하지 않았는가 하는 말입니다. 지금은 안 그렇겠지만, 예전엔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뭔가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좀 더 착하고, 합리적이고, 유능한 사람처럼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도가 지나쳐 종의 주인들같이 교만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끝도 없이 교만해진 사람들이 바로 사회에서 주목하고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들, 지금의 기독교인들입니다.

 

반면 저들이 고발했던 바울은 어떨까요? 고발 내용과는 다르게 바울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설령 그것이 종의 주인들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쳤다고 하더라도 그건 오로지 종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불의하고 몰염치한 시각으로 봤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바울을 고발했고 육체적 형벌도 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불의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이들은 불평, 불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 내게 기분 좋고 행복한 일이 생겨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불행하고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이를 다르게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스승이었던 예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는 바리새인 같은 유대 귀족에게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저항했으며 오히려 고통받는 그의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모함에 몰리게 되자 스스로는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 길이 부당하고 불의하더라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가 씁쓸한 기분으로, 억울하지만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그 길을 감당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가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라 여기며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에게서 예수와 같은 모습을 본 간수는 어땠을까요? 그와 그의 가족은 성경의 증언대로 구원을 얻어 기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내게 주신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으로 교만해질 것인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처럼 겸손하게 하나님의 길을 따를 것인지 말입니다.

 

성서일과의 시편 97편에서는 정의를 실현하는 야훼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시편은 예배에 쓰이는 찬양 시였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다스리는 모든 땅이 뛸 듯이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 야훼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이 온 세계에 선포되면 그 영광을 그의 백성이 볼 거라고 증언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온 땅을 다스리는 가장 높은 분이며 그 어떤 신보다 높은 분입니다. 그러니 정의와 공평을 선포하는 야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악을 미워하라고 권면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키시고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 주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를 믿고 사랑하는 이들은 기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97편의 기자는 이미 여러 신들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섬겼던 신의 모습들은 각기 달랐습니다. 그중에서 야훼 하나님은 정의와 공평을 선포했습니다. 불의와 부당함을 모른 척하고 오로지 자기 이익과 욕망을 좇는 신은 야훼 하나님 앞에서 초가 녹듯 녹아 버립니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악을 미워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악을 미워하지 않고 따른다면 그는 신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이익과 욕망의 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도 고마운 줄 모르며 오히려 그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탐욕스러운 주인의 삶과 같습니다. 염치도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면피 그 자체이죠. 우리는 시편의 말씀을 읽으며 정의와 공평을 선포하고 따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정의와 공평을 선포하는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시를 읊는 것뿐 아니라 그가 말씀하신 정의와 공평을 삶에서 실천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정의와 공평의 삶을 사는 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사랑하며 찬양하는 일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다스리는 모든 땅이 기뻐하고 그 땅을 밟고 사는 모든 피조물이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서일과의 다른 본문인 요한복음에서는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남겨질 사람들에게 그동안 자신이 보여준 삶을 따르라고 권했습니다.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품었고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러하진 못했습니다. 심지어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 내리지만, 그 사랑에 보답하며 영광을 돌리는 이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오직 나만 그 사랑을 받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을 독점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에 늘 감사함을 고백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다른 이에게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점차 그 사랑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널리 퍼집니다. 그 사랑을 받은 다른 이들은 그 사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리며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리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삶에서 기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때문입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본 것과 같은 영광을 보게 하시니 우리가 기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그 사랑을 온전히 나만 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받는 사랑은 나를 교만하게 하지 않고 그의 말에 순종하게 만듭니다. 내가 불편하게 느끼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더 크시기에 내가 선택한 불편보다 더 많은 것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기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의 고백처럼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 외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찬양은 뒤를 잇는 실천과 행동이 있어야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 내가 야훼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을 실천할 때 어느새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기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삶의 선택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그의 정의와 공평을 실천하려 합니까. 예수님이 길과 진리요, 생명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만 전한 게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때로는 그 사랑이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다음부터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유로 내가 교만해지면 나는 그 사랑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 겸손하고 낮아져야 합니다. 불편함을 거부하기보다 감수하려 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고, 불편함보다 이익만 찾으려 애쓴다면 로마의 주인들과 다를 게 없을뿐더러 그들이 섬기는 것과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다르지 않다는 증거가 될 뿐입니다.

 

어둡고 각박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쁨과 즐거움, 행복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티브이나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기쁨과 즐거움이나 행복을 맛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오래 가지 못하거나 다른 이들의 기쁨이나 즐거움을 보며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에 빠집니다. 열등감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내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려면 오늘 주신 말씀에서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과 시편과 요한복음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영광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에 휩싸인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바꿀 것이며, 불의한 일을 저지르거나 염치없는 짓을 해도 오히려 뻔뻔한 사람들과 달리 오히려 불의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을 믿으며 불편을 감수할 수 있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느끼게 할 것입니다.

 

모쪼록 한 주간 살면서 내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멀어져 있으면,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고 부끄러운 줄 모르며 오로지 내 능력으로 내가 이렇게 산다고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나는 더 낮아져 하나님이 바라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이 나를 괴롭고 힘들게 만들지라도 하나님이 늘 내 곁에 계시기에 나는 그 길로 걷는 것이 기쁘고 즐거우며 행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해지는 길은 위대하고 거창한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단 하나의 실천을 하더라도 예수의 실천대로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의 실천을 완성했다면 자기 자신을 칭찬하고 응원하십시오. 그래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 되게 하시고 세 번이 되게 하십시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기쁨과 즐거움을 베풀고 계실 것입니다. 앞으로 한 주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정의와 공평을 삶으로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함께 두손 모아 거둠기도 드리겠습니다.

 
 
작성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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