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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 2025년 4월 6일 사순절 다섯째주일

  • 관리자
  • 2025-04-06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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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여기 모인 우리를 이 자리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며 축복합니다. 오후찬양집회는 경건한 기존 예배의 틀을 내려놓고 요즘 분위기에 맞는 찬양으로 예배를 엽니다. 다소 어려운 찬양이 있을 수 있지만, 가사를 함께 묵상하며 찬양함으로 더 큰 은혜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여기 나온 분들이 찬양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셨다면, 다음 집회엔 다른 한 분과 함께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하실까요? 기쁨과 즐거움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했으니 나의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5일 한식이 지났습니다. 농사를 짓는 분들은 이제 농사를 준비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옛날엔 한식의 날씨를 살펴 한 해의 농사를 점치기도 했답니다. 해가 나고 바람이 잔잔하면 풍년이 들 거라고 예상하고 어촌에서는 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폭풍이 불고 큰 비가 내리면 반대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명이 움트고 농사를 준비하는 시기처럼 우리도 변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시대의 흐름을 읽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을 생각할 때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마음에 품고 사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하고 정의로운 일을 한꺼번에, 강력한 힘으로 억누르며, 다른 생명을 죽이거나 위협하며 진행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선한 마음과 행동으로 조금씩 이뤄져 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끊임없이 고민하지 않으면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이기도 합니다.

 

이런 반대의 흐름과는 또 다른 의미의 반대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사도라고 불렀지만, 예수를 직접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엔 예수와 살을 맞대며 활동했던 이들만 사도라고 불렀는데, 이 사람은 스스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다만,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신비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길 위에서 그를 멈추게 만든 건 강렬한 빛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자리에서 절대자임을 느꼈고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체험 이후 눈을 뜰 수 없었고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까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핍박하고 억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늘 병에 시달렸고, 부유하지 못해 노동해야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로마 시민이었고, 유대에서 유명한 가말리엘이라는 랍비에게 율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한계에 갇히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예수라는 사람으로 혼란스러워지고 있었고, 그를 따르는 사람을 사회에서 배제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연히 그들을 핍박하고 억압하는 편에 섰고, 성공하기 위해 가만히 있지 않고 앞장서서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단번에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을까요? 그게 가능한 일이긴 했을까요?

 

우리는 자주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윽 옆으로 그 생각을 제쳐놓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나빠서라기보다 본능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상태에 만족하면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바꾸는 시도를 아예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공부가 그렇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해보셨고, 자녀들도 시켜보셨지만 공부가 쉽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게 쉽고 편하고 좋으니, 공부한다는 것 자체에 노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키는 입장에서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특히나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하면 대화가 끊기기 일쑤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다이어트가 그렇습니다. 저도 요즘 최근 열심히 했고, 이제 끝나가서 너무 기쁩니다. 그런데, 다이어트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정말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시도하고 노력합니다. 요새는 약이 불티나게 팔리기도 하고, 다이어트 방법도 유행을 타면서 경제적 효과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이어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의 의지입니다. 운동을 하건, 식습관을 바꾸건, 약을 먹건 당사자의 의지가 없으면 거의 실패하는 것이 다이어트입니다. 어떻게 보면, 살을 빼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거나 밥을 굶기만 해도 살은 빠지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음입니다. 예전과 다르게 살이 빠진 나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운동을 계속하거나, 밥을 계속 굶어야 합니다. 이게 쉬울까요? 웬만한 의지로 성공할 수 없는 것이 다이어트입니다. 이렇게 공부와 다이어트는 사람의 본능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은 삶의 방향을 선택할 때, 가운데 서기를 좋아합니다. 동양 사상에서 중도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바른 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운데를 선호하는 이유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극단적인 변화에서 오는 위협과 손해를 최소화하려는 전략입니다. ,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인식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선거에서 중도층의 선택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본능과 현실적인 이유로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이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평온할 때는 괜찮지만 사회가 끊임없이 변하고 위기가 수시로 찾아온다면 이런 모습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요성경공부에서 읽고 있는 책, ‘가문비나무의 노래를 보면 마틴 슐레스케라는 바이올린 명장의 묵상이 나옵니다. 그는 중도라고 해서 가운데 서 있는 것이 아닌 양쪽의 조화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앉았다가 일어서려면 수축하는 근육이 있고 이완되는 근육이 있어야 다리가 굽혔다가 펴집니다. 그런데 서로 수축과 이완의 중간 상태만 유지한다면 앉을 수 있을까요? 때로는 수축했다가 또 때로는 이완해야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조화로운 대립이라고 말하며, 여기저기로 활발하게 움직이라고 말합니다. 특히나 요즘 같은 사회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학자들이 분석합니다. 무게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입니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좋은 조건과 훨씬 열악한 조건으로 나뉘어 경쟁하고 편법과 기만으로 성실하고 정직한 노력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본능과 현실적인 판단에 따라 가운데 서 있고자 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힘과 돈을 가진 이들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건 동양 사상의 중도와 다르고, 어느 한쪽에 흔들리지 않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신앙과도 다릅니다. 그저 안온한 생존전략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전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위해 자기의 모든 조건을 거부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9절을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동안 자기가 쌓아왔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도,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억압하던 행동도, 그로 인해 먹고 살았던 모든 이익도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인을 위해 노동하며 선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공부하며 쌓은 지식의 무게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랜 경험으로 다져온 신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예수를 만나며 그동안 해왔던 삶의 방향을 바꾸며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당시엔 그리스도를 안다며 떠든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영지주의자로 정죄 받았지만, 바울이 예수를 안다고 한 것은 말과 머리로 내세우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었고, 가운데 서서 슬쩍 다리만 내딛는 게 아니라 성큼성큼 움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 성서일과를 보면, 이런 선택을 비웃는 다른 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16~21절의 말씀엔 야훼 하나님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당시는 바빌로니아가 가장 세력을 떨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끌려가고 얼마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 일이 실제 일어나리라 믿었을까요? 콧방귀를 뀌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21~8절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나드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로 예수의 발을 닦았습니다. 이를 지켜본 유다는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큰 돈을 낭비한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자기의 죽음을 예상한 마리아의 행동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바울 역시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비웃는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를 사도로 부르며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능력을 깨달으며 고난에 동참하여 죽음을 본받으려 합니다. 떨리고 두려운 마음과 큰 것을 얻으려는 욕망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를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으로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다른 하나는 이 모든 것을 내 의지나 나의 업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바울이 큰 은혜를 받은 것이 그의 선택과 행동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정의로운 선택과 행동 즉, ‘를 원하셨다면, 그는 율법에 갇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른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과 똑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를 뜻하는 그리스어 δίκαίοσυνη(디카이오수네)’는 나나 우리의 행동이 아닌 하나님의 행위를 말합니다. 바울은 내가 악한 일을 그만두어서라기보다 용서와 은혜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제의를 받아들여서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제의를 늘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순간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의를 받을지 말지하고 고민하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실천했습니다. 폴 발레리라는 프랑스 시인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겠다며 그 삶으로 풍덩 뛰어들지 않고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가운데 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가운데서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며 늘 강한 자의 편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외면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계신 모든 분이 바울의 말대로 예수를 알고 그분의 능력을 깨달으며 고난에 동참하고 죽음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욕망과 두려움을 뛰어넘어 더 큰 은혜라는 걸 깨닫고 삶의 방향을 가치 있는 곳으로 바꿀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되시길, 주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이를 인정받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 두손모아 거둠기도 드리겠습니다.

 
 
작성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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