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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 2025년 3월 2일 주현절 여덟째주일/ 3.1절 기념주일

  • 관리자
  • 2025-03-02 09: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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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우리 옆과 뒤에 앉은 분들과 인사 나누실까요? 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내려주시길 진심으로 바라며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제 추운 겨울이 지나고 경칩이 우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벌레들이 화들짝 놀란다는 경칩인데요. 살을 에는 추위가 물러가고 따뜻한 햇볕이 찾아오는 봄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그간 매서운 추위와 바람, 모든 생명이 죽일 것 같은 강력한 위세에도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그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합니다. 그렇게 움츠렸던 생명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게 바로 경칩입니다. 그런데 이때쯤 어른들이 하는 말이 있었죠. 봄인 줄 알고 나왔던 개구리가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아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요. 우리는 이럴 때,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봄이 왔지만, 봄이 오지 않았다. 뭔 말일까요? 따뜻한 봄이 온 줄 알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겨울에 살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아직 따뜻한 봄을 맞이하지 못해 삶의 이곳저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따뜻한 햇볕이 쏟아질 수 있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이 꼭 들어주셔서 우리 모두의 기쁨이 되면 좋겠습니다.

 

요즘은 마치 겨울과 봄처럼 사회도 극한 대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양극화가 심해져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가 나날이 커지고 있고, 정치적으로도 양 극단만 살아서 서로를 욕하고 무시하고 혐오합니다. 이러니 국민도 서로 나뉘어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그럼 이런 갈등은 언제쯤 사라지고, 우리에게 따뜻한 봄은 언제 찾아오는 걸까요? 이렇게 암울한 상황이 바로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후서의 배경이 됩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 사람 중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여러 위협에 놓였습니다. 먼저 그들의 신앙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로마라는 강대국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들을 위협하는 건 로마만이 아니었죠.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긴 했지만, 그들의 믿음 안에서만 인정할 뿐이었습니다. 공동체 사람들에게 율법과 할례를 강요했고 그들 뜻대로 공동체를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화에 동화된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해석했고 영과 육을 분리하며 십자가 사건을 부정했습니다. 이들을 위협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도 바울을 무시하고 그보다 우월하다고 자부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삶조차 위협받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강력한 무언가를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아볼로파니, 예수파니, 바울파니 하는 파벌을 만들게 된 겁니다. 이런 파벌에 가담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일단 우리 편이 생기니 나 혼자가 아니게 되고, 외롭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옳다고 확신하니 다른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들기 편합니다. 적을 차별하고 혐오하며 그들의 생각을 바꾸게 만들거나 공동체에서 내쫓거나 심지어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게 유익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이런 파벌은 구심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대부분 카리스마를 가진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카리스마적 리더라고 부르는데, 능력이 뛰어나고 도덕과 양심을 지키며 사회적 공감을 잘해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무리를 이끌게 됩니다. 물론 이 카리스마적 리더가 방금 말한 대로 완벽한 인간이면 그 공동체는 발전하고 좋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봐서 알 수 있듯 카리스마적 리더는 능력 있고 훌륭한 사람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경우, 이런 사람들은 사회가 큰 흐름으로 변할 때나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잡았고, 사람이 두려워하고 껄끄러워하는 게 무엇인지 잘 간파했습니다. 무엇보다 누구를 내 편으로 만들고, 누구를 적으로 만들 것인지 확실했습니다. 적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거나 평가가 안 좋은 부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권력을 얻게 되었을 때 그들은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나치의 히틀러, 필리핀의 두테르테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내 편과 적으로 사회를 나눠 내 편에게는 특혜를 주고 적은 차별하고 혐오했습니다. , 돈과 법을 이용해 폭력을 행사하며 사회를 억압했습니다. 이들의 앞잡이가 된 사람들은 이들과 비슷하거나 똑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돈과 권력의 맛에 취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들에게 억압당하거나 피해를 봐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빛으로 오신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이야기를 전하며 유대인들이 왜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알려줍니다. 성서 일과의 다른 말씀인 출애굽기 3429~35절은 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를 이끌고 이집트의 압제에서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들은 모세를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늘 배고팠고 추웠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간 사이에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히브리를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준 존재를 그들의 기준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빛나고 화려한 금으로 위대함을 표현하고 풍요로움과 다산의 의미를 담아 소를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금빛 소가 자기들을 지켜주며 풍족하게 먹일 수 있는 존재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를 위해 산으로 올라갔고 하나님을 만난 것인데, 그새 히브리들은 다른 우상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들에게 재앙을 내리셨고 그제야 이들은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들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들을 품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모세가 다시 그들에게 돌아왔을 때, 히브리들은 모세에게서 빛이 났다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빛은 하나님으로 인식되어 히브리들에겐 경외의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모세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히브리들에게 전했는데,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그들은 빛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특권만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율법이라는 도구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율법 자체에 목을 매게 된 것입니다. 결국 율법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빛을 품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너울을 쓰고 있다고 보았고, 유대인이 그 너울을 벗으면 선택받은 백성의 위치에서 탈락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여 그 너울을 벗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너울을 벗어야,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서야 빛나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텐데 그들은 그 너울을 꼭 붙잡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그 너울은 무엇일까요?

 

저는 예전 청년 때, 우찌 우라는 분의 그림 묵상집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짧은 글과 그림이 인상적인 책이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앞에는 작은 창문이 있고 그 창문은 감옥 같은 철창으로 막혀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철창을 온 힘으로 부수려고 하고, 옆으로 비집고 나오려고 하면서 그 철창을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그 철창 밖에는 화려한 불꽃이 휘날리기도 하고, 따뜻한 날씨에 푸른 잔디밭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철창 밖으로만 나가면 모든 것을 가지고 뛰어놀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철창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치 그는 자유를 억압당한 채 아주 좁은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그 사람의 등을 두드립니다. 그러자 뒤를 돌아본 그 사람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자기가 그토록 들어가려고 했던 철창 안이 오히려 작디작은 감옥이었고, 자기 뒤로는 넓디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아까 자신이 봤던 화려한 불꽃은 그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위험했고, 푸른 잔디밭처럼 보였던 곳 역시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늪처럼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이 짧은 그림의 묵상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작은 창문을 철창을 부수고 들어가려는 그 사람이 바울을 무시하며 너울을 벗지 못하는 유대인처럼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서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우리는 힘들고 괴로울 때, 강력한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과 괴로움을 한순간에 해결해 주길 원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나 지금 우리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놓인 우리입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누구일까요?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누구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나중에, 환경이 나아지면, 조건이 괜찮아지면.’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저자인 빅터 프랭클은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의사였습니다. 죽음으로 가득 찬 곳에서 그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보여줍니다. 물론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이 책을 쓴 빅터 프랭클과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선택을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그는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유대인 담당 간부였습니다. 최근 그의 자료를 연구한 독일 학자의 책이 번역되었는데, 그동안 알려진 그의 모습은 명령에 순응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실제 그는 성공을 위해 거짓과 사기를 가리지 않았고, 차별과 혐오로 가득 찬 괴물이었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비뚤어진 욕망으로 성장했고 잘못된 신념에 빠져 수많은 생명을 살육한 악인 그 자체였습니다. 두 사람의 인생 중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이기에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요즘엔 자유라는 말의 의미가 변질되고 있지만, 17절엔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찌 우의 묵상 속에 자유는 이미 우리 뒤에 있지만, 우리의 욕망은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향합니다. 그것이 화려하게 보이고, 멋있게 보이고, 위대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눈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멋있음과 위대함에 속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빛나는 자유라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자손, 유대인들이 쓰고 있는 너울이라고 말합니다. 그 너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 예수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차별과 혐오로 유대인을 학살하며 욕망을 좇았지만,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켜내고자 했습니다. 우리 역시 이들처럼 선택해야 합니다.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요. 우리의 욕망은 분명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빛을 선택한다면, 그리스도 예수에게 돌아선다면 우리 눈에는 그 길이 너무 어두워 빛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분명 그 길은 빛나는 자유의 길일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누리는 존엄을 지키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그런 빛나는 자유의 길로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모쪼록 그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제 시작되는 한 주 속에서 무엇이 빛인지, 무엇이 자유인지 느끼고 깨닫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모둠기도 드리겠습니다.

 
 
작성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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