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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 2025년 2월 2일 주현절 넷째주일

  • 관리자
  • 2025-02-02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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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 자리를 열어주시고 모이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쁜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또한 바라기는 추운 날씨만큼이나 슬프고 괴로운 일로 고통스러워하는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자비가 함께 하시어 그들의 슬픔과 괴로움이 사라지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되길 온 맘으로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예레미야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예레미야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너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나라를 구할 영웅의 탄생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럼 기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법한데, 예레미야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그는 저는 말을 잘할 줄 모릅니다. 아직 너무 어립니다.’라고 답합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가 모름지기 말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도 예언자 학교가 있었고 그곳에서 예언자를 키워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다소 어렵거나 이해가 안 되는 말도 쉽게 풀어주거나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능력을 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예레미야는 말을 잘 못한다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밀어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상대를 설득하거나 어려운 것을 쉽게 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에게 너를 보내든지, 무슨 명령을 내리든지 그대로 가고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그런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님의 손이 예레미야의 입에 닿고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표현이 어디 있을까요? 예레미야는 더 이상 거부하거나 밀어낼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를 두렵게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까지 밀어냈던 것일까요? 보통 인간에게 두려움은 두 가지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약함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견디지 못할 일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면 누구나 두려울 것입니다. 가능하면 그 일을 비켜 가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처리해 주었으면 하고 바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변의 영향 때문입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생기면 누구나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예레미야는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예레미야가 태어나던 때는 유대의 개혁 군주였던 요시야 왕 때입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은 기원전 609년 이집트 파라오와의 전투 중 므깃도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그 이후 유대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혼돈에 휩싸이게 됩니다. 친이집트파와 친바빌로니아파가 서로를 위협하며 나라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파의 힘이 더 센지 살피면서 하나님이 아닌 강대국의 힘을 빌려 이 상황을 모면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요시야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멀리하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할 수 있었을까요? 두렵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예언자가 되라는 명령을 받아들인 이후 자신의 삶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풍전등화 같은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예언자는 그의 목숨도 폭풍 앞에 촛불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한쪽의 의견을 대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친이집트파나 친바빌로니아파 어느 쪽에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누구나 이 자리를 내던지고 도망갔을 것입니다.

 

여기서 성서일과로 가보겠습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본문은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와 시편, 고린도전서와 누가복음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며 본문을 살피면서 네 편의 이야기가 하나의 큰 서사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예레미야는 강대국 사이에서 혼돈에 빠진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시편의 말씀은 711~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의로운 분이시니 나를 도우시고 악한 사람과 잔인한 폭력배가 위협하는 위험에서 구해달라는 간구의 기도입니다. 또한, 주님은 나의 반석, 요새니 내가 숨을 곳이며 구원하는 견고한 곳이라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절망에 빠진 이가 주님은 내가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부터 나를 받아 주신 분이기에 오직 당신밖에 희망이 없다고 외치는 절망의 기도입니다. 이 말씀은 야훼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을 수 없는 기도입니다. 이 사람은 분명 이집트의 고된 삶에서 울부짖어 해방의 가나안 땅으로 탈출했던 히브리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야훼 하나님이시기에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을 확신했기에 가능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서신서인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131~13절입니다. 이 본문은 사랑에 관한 말씀 중에서 모르는 분이 안 계실 정도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랑은 무엇이며,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은 이가 행해야 할 것이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크기가 모든 비밀과 지식을 가져도 심지어 사람의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사도 바울은 친절하게 4절부터 실천 내용까지 설명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하지만, 그가 베푼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을 잘 실천하지 않습니다. 몰라서일까요? 아닙니다. 너무나 잘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도 말하고, 예수님도 가르치셨고, 사도 바울도 편지로 전했지만, 사람들은 사랑을 잘 실천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으며, 힘들고 괴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일이 아닙니다. 혹시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바쳐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이런 일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아무도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겁니다. 어떤 바보가 그런 일을 하겠냐고 되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분이 계시죠. 누가복음 421~30절을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서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펼쳐 희년의 말씀을 선포하신 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고향 회당에서 말씀을 읽으시고 오늘, 이 땅에서 이뤄졌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 모두가 아시는 대로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차별받는 이들을 위해 병을 고치셨고, 함께 식사하셨으며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의외인 건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차갑게 날선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들먹이며 걔가 걔야?’라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무리 고난의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또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을 봐왔다고 하더라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여기서도 사람을 살려봐라.’라는 식의 반응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불의한 사람들에게 엘리야 시대에 구원받은 사렙다 여인의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병을 고친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전하며 고향을 떠납니다. 어떤 잘못을 해도 결국 율법으로 구원받을 거라는 착각에 빠진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라고 다를까요? 아까 말씀드렸던 예레미야의 상황과 예수님이 고향에서 맞닥뜨렸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외부의 상황과 나의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내 상황이 어렵다고, 예언자의 소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며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그 소임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전하며 유대 사람들이 하늘 백성이 되길 빌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십자가게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두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얻습니까? 무엇을 깨닫습니까? ‘, 역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죽을 위험에 빠지거나 결국은 죽겠구나. 그러니까 나는 힘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니까 그냥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까요? 이런 생각은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대로 사는 동물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이라도 예레미야처럼 살아봐야겠다. 두려움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것처럼 실천해야겠다.’라고 고백해야 우리는 아주 조금씩 그리스도인의 길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시편 71편에서 도움을 청하는 기도는 예레미야나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길을 걷다가 위험에 처한, 위기에 놓인 이들이 청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원초적인 두려움에 놓인 우리를 도와준다는, 구해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를 결단하고 누구나 뻔히 알 수 있는 고통과 어려움과 힘듦이 예상되는 길을 걸어갈 때, ‘두려워 마.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거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길을 걷지 않는 이들에게 생긴 두려움은 직접 해결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한 그 길을 걷는 이들이 두려워하지 않게끔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직접 임하십니다.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 사람은 다를까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람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으면서도, 내 것을 내놓음으로써 손해 볼 것을 뻔히 아는데도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워 마. 내가 네 삶에 늘 함께 할 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에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예레미야도 예수님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상황에서 아니 우리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그 명령대로 살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모쪼록 우리가 귀를 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물론 모든 순간에 예수님처럼 또는 예언자 예레미야처럼 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두렵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에게 임하셔서 그와 함께하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 때문입니다. 모쪼록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쑥쑥 커나가길 바랍니다. 두려움은 누구나 갖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두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실 것이기에 할 수 있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며 소중한 한주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함께 거둠기도 드리겠습니다.

 
 
설교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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