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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 2024년 12월 1일 대림절 첫째주일

  • 관리자
  • 2024-12-01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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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나온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아시는 대로 예수님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뭔가를 기다려 본 적이 있으신가요? 사랑하는 사람을 한시라도 빨리 보려는 마음에 약속 장소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거나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림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도 하고 긴장을 잔뜩 주기도 합니다. 황지우 시인은 그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기다림을 절묘하게 표현합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어떠신가요? 방금 이 시는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표현했지만, 만약 기다리는 상대방이 내가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심지어 오늘 만날 약속이 돈을 갚아야할 사람과의 만남이고 그런데 아직 내가 그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그 마음은 시의 주인공처럼 낭만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초조하고 불안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림은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오늘 본문의 데살로니가의 교인들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기다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실 그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기이한 자연현상을 하나님의 의도로 생각했고, 그들을 두렵게 했던 일들이 실제로 벌어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일로 불의한 세력을 쓸어버리면 그 뒤에 예수님이 하고 나타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울 거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21장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벌벌 떨었던 자연현상이 아니라 그 이야기에 덧붙여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절의 변화와 함께 변하는 나무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잎이 돋으면 여름이 오고, 잎이 떨어지면 겨울이 올 거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일이 생기고, 사람들 사이에 전쟁과 기근, 테러가 일어나 혼란스러워지면 하나님 나라가 올 테니 그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이 위협받는 상황 가운데서도 그날을 기다리며 굳건히 믿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공동체 밖에서는 유대교인들의 시기와 질투, 박해가 있었고 로마 사람들도 이들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휘황찬란한 그들의 문화를 보고 거부하기는 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그날이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기다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다가오면 밖에서는 성탄 트리와 장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예전엔 성탄 캐롤이 거리마다 시끄럽게 울려 퍼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성탄절이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들뜸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이 진심으로 기다려지고 기뻐서였을까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도 다 아는 그의 탄생이 중요했던 게 아니라 평소에 갖고 싶은 선물을 받거나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벤트를 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모두가 즐겁고 흥겨워하니 같이 어울리는 것입니다. 성탄절 하면 아름다운 트리와 화려한 빛의 잔치가 떠오르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멋진 선물로 가득 차 있으니 여기에 예수님의 태어난 의미가 낄 자리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제 딸에게 진심으로 성탄절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생일인데 왜 네가 선물을 받아야 하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선물을 주기 싫어서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은서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을 걸 받겠다는 그 생각이 얄밉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니지 않나요?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왜 누군가가 선물을 받아야 할까요? 만약 선물을 받아야 할 대상이 있다면 예수님이거나 아니면 성탄절에 춥고 배고프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자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보다 내가 가르친 대로 살기를 바라실지도 모릅니다. 성탄절은 아주 화려하게 치장하고 성대하게 보내면서 예수님은 뒷전이니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라고 하면 그건 뭘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했던 히브리들도 그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기에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도 거룩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구약 성경 레위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거룩함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어여삐 보지 않으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2024년을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보다 친구나 동료, 이웃 앞에서의 존재감을 더 큰 가치로 여기는 듯합니다. 좋은 집, 멋진 차, 명품을 갖지 않고는 뭔가 위축되고 실패한 삶 같다고 여기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대할 때, 차등을 두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해야지, 차등을 둘 수 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성경에서 본 예수님은 분명 그랬습니다. 어린이나 여자, 이방인이나 종 같은 이들을 대할 때와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을 대할 때는 분명 달랐습니다. 지금의 기준과는 정반대로 한 겁니다. 가진 것 없는 어린이나 여자, 차별받는 이방인이나 종 같은 이들을 따뜻하게 대하시고 부와 권력을 가진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은 꾸짖거나 차갑게 비판하셨습니다. 현대 사회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이미 아시고 그에 맞게 대응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과 반대로 살아갑니다. 그럼 구약 성경 레위기에서처럼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또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섰을 때, 흠 없이 설 수 있을까요? 부끄러워서 몸둘 바를 모르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그가 가르친 기도에서도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길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어떤가요? 내가 바라는 것, 기대하는 일, 이뤄졌으면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 속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내용은 얼마나 포함되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공동체가 가득 차고 서로 그 사랑을 나누기를 바란다고 썼습니다. 사랑은 표현해야 합니다. 드러내야 합니다. 그저 마음에 품고 있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은 감출 수 없다고 말이죠. 사랑하는 마음은 서로를 너무 아껴서 그 마음을 숨길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가족을, 친구를, 동료를, 이웃을 사랑하게 되길 바랍니다. 직접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기 힘들다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나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이웃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 욕망을 채워달라는 기도보다, 나는 쟤보다 낫지 않냐며 교만한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자기 재산의 전부인 렙돈 두 닢을 바치는 과부의 마음을, 우리에게 사랑을 채워달라는 기도를 원하실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거 아시죠? 기도만 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요. 공부하지 않고 시험 잘 보게 해달라는 것, 로또도 사지 않으면서 로또 당첨되게 해달라는 것, 이웃에게 사랑을 표현하지도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떼쓰지 말고 이제 그만큼 컸으면 어른으로서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신앙 경력을 합하면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과연 우리의 신앙 경력대로, 예수님께 배운 사랑을 나누며 살고 있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가 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인 대림절을 맞아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성탄절을 그저 설레고 기쁠 일이라고만 여기고 기다리기엔 우리의 신앙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사랑해서 그들에게 진심 어린 중보기도를 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변을 살펴보고 눈에 보이는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어쩌면 예수님이 대림절을 맞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또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거둠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작성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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