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불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며 축복합니다.
이제 우리는 종교개혁의 달을 지나 다시 창조절을 지나고 있고, 머지않아 곧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계십니까? 사실 15세기 중세 유럽에서 일어난 개혁은 종교개혁이라기보다는 교회개혁에 가깝습니다. 이 교회개혁은 교회가 교만하고 타락한 조직,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개혁가인 마틴 루터, 쟝 칼뱅, 울리히 츠빙글리 혹은 100년 전 스위스의 얀 후스는 교회의 교만과 타락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이들 중 누군가는 잘못을 고발했고, 또 누군가는 사람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고자 했으며, 또 누군가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조직하여 교회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무엇이었을까요? 예, 바로 당시 교회의 구성원, 특히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교회의 권력을 독점했고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졌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이 예루살렘 성전의 권력을 독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당시 유럽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과 똑같이 당시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교회에 충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성경을 사람들의 편을 가르는 도구로 악용하고 죄인을 적으로 몰아세우고 벌을 면하게 해줄 증서를 산 사람들만 하나님께 구원받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와 하나님을 같은 존재로 착각하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개혁가들은 ‘오직 말씀으로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하나님께 영광으로만’이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으로 옮기게 했고 그 은혜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누구나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지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체적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십니까? 목회자가 성경을 잘 해석해서 핵심만 알려주길 원하지 않으십니까? 마치 유명한 학원 강사에게서 족집게 강의를 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학생들이 유명 강사의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 시험을 잘 친다면, 누구나 강의만 들으려고 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질 좋은 강의를 많이 들어도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내 실력은 좋아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공부도 그런데 신앙은 어떨까요. 우리가 주일예배 때 설교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고 해서 그 이야기가 우리의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설교의 성경 해석은 설교한 목회자의 신앙이지, 우리의 신앙이 아닙니다. 설교는 같은 시대를 사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전달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생활을 돕는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합니다. 신앙은 직접 성경을 읽으며 해석하고 묵상하면서 내가 삶으로 실천하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혁하려 했던 이들이 지도자들만 교체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그저 지나가는 사건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신앙을 개혁하며 삶을 변화시켰기에 지금까지 그 의미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개혁의 대상이 되지 않고 그 주체가 되려면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하며 그대로 살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수요성경공부의 가을학기가 끝나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야고보서를 함께 나눴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내용은 그동안 배웠던 사도 바울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야고보서는 믿음만이 아닌 실천하는 믿음이라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누구의 말이 옳은 걸까요? 아무래도 영향력이 센 사도 바울의 말이 옳은 걸까요? 그래서인지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믿음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구호가 난립했고, 믿기만 하면/ 교회를 다니기만 하면 구원받고 축복받는다고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엔 사도 바울의 주장만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한들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않으면, 실천하지 않으면 구원의 길은 멀어진다는 주장이 생겨났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사도 바울의 주장 중 일부분만 떼서 절대적인 가르침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믿는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것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율법으로 억압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가르침이었다는 역사적 배경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당시 약자로 차별받았던 병자나 굶주렸던 이들, 육체적으로 고통 받았던 노예들이 교회만 나오면 네 삶이 행복해질 거라는 이야기가, 그들을 위해 기도만 하는 것이 어떤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었을까요? 병이 낫지 않고 그들의 배가 채워지지 않으며 여전히 주인이 그들을 잡아먹을 듯 달려들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자의 곁에 서서 차별하지 말라고 외치며 육체적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묻지 않고서야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불필요하다, 의미없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기도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하기 싫어 도망 다녔던 요나와 다를 게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도 바울의 주장이나 야고보서의 내용 중 하나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을 강조한 이야기가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억압받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 야고보서의 내용이 믿음만 가지면 선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믿음’만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보이려면, 우리에게서 ‘믿음’이 드러나려면 실천하지 않으면, ‘믿음’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한다고 해서 그 ‘믿음’을 따르는 시대가 지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룻기입니다. 유대 베들레헴에 살았던 나오미와 엘리멜렉은 두 아들과 함께 기근을 피해 모압 땅에 잠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타지에서 두 아들과 엘리멜렉이 죽고 말았습니다. 나오미와 두 아들의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세 여인의 보호자가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이에 나오미는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고 두 며느리와 헤어질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두 며느리 중 오르바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시어머니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시어머니를 가족으로 여기고 신앙도 어머니의 신앙을 따르며 죽음까지 그와 함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나오미와 룻은 어떤 관계였던 걸까요? 당시 이스라엘에서 남편은 가족의 보호자이자 주인이었습니다. 남편이 없으면 아내는 아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모두 없으면 그들의 재산은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넘어갔습니다. 그 재산을 가져간 친척은 가족의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을 낳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 아들이 장성했을 때, 넘겨받았던 재산을 돌려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에게는 가혹한 법이었지만, 당시 가족과 공동체의 재산을 유지할 수 있게 했던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면서 이방 여인인 모압 출신 며느리를 데려가야 했습니다. 당시 이방인은 늘 약자였고 차별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나오미는 자기 혼자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쉽고 안전했을지 모릅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젊은 룻이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 다른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자기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극심한 슬픔에 빠져 있었고 어쩌면 자기가 살아있는 것조차 저주할 만큼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극한의 슬픔과 괴로움에 빠지면 주위를 챙길 힘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 챙기기도 벅찹니다. 그런데도 나오미는 자기를 따르겠다는 이방인 며느리를 품어주었습니다. 힘들면서도 선함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나오미와 룻은 친척 남자인 보아스를 만나 대를 잇게 되었고 그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사실 룻기는 쓰인 시기를 보면, 바빌로니아 포로기 때인지 포로 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로 돌아온 때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룻기를 보면, 결국 하나님은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겪은 나오미와 룻을 지켜주셨습니다. 이는 고통 받는 이스라엘을 끝내 축복의 길로 이끄실 거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하게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룻기를 유대의 큰 명절 중 하나인 오순절에 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나오미의 자세입니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교회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교회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오미는 당시의 약자였던 이방인 며느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방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불편하며 위험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차별받고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따르겠다는 며느리를 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어서 한 선행이 아니라, 내가 지금 너무 행복해서 한 선행이 아니라 너무나 큰 불행 속에서도 차별과 불이익을 감수한 일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사랑으로 대하고 끊임없이 조언합니다. 룻이 불평과 불만 없이 나오미의 말을 따랐던 것은 나오미의 사랑을 알고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룻이 보기에 나오미는 세상의 모든 저주를 당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기를 품어주고 함께 살길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룻은 나오미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지나며 교회가 개혁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된 현실이 몹시 슬펐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다시 느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눴던 개혁의 주체가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현재 우리가 야고보서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오미가 룻을 대하는 모습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것은 삶에서 신앙이 어떻게 실현되는가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을 성서일과의 말씀 중에 마가복음 12장 28~34절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늘 주일낮예배 때 읽고 나누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말로만, 기도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했던 것처럼 내가 손해 볼 것을 감수하고, 불편할 것을 감수하고, 불이익이 있을 것을 감수하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분 좋을 때, 행복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불행이 닥쳐도 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몸과 마음이 다친 이들을 외면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바리새인의 위선과 중세 시대의 교회 지도자의 교만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 신앙을 개혁하기에 힘쓰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