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늘말씀은 욥기 2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욥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입니다. 착한 부자였다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을 원망했다가 나중에 깨달은 사람쯤으로 아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니면 착한 부자였다는 것만 기억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욥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뭘까요? 방금 말씀드린 두 가지일 것입니다. 엄청난 부자라는 것과 착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성경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욥기 1장을 보면 그의 재산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에겐 양이 칠천 마리가 있었고, 낙타도 삼천 마리, 겨릿소는 양쪽에서 겨리를 끄는 소를 말하는데, 겨릿소가 오백 쌍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소도 천 마리 있는 거죠? 그리고 암나귀가 오백 마리가 있었고 노예도 다수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자녀도 아들이 일곱 명, 딸이 세 명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은 부족함 없이 가족과 재산이 풍성한, 말 그대로 성공한 부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냥 성공한 부자가 아니라 엄청나게 성공한 부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모습은 착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정말 착했던 걸까? 나쁜 부분이 하나도 없었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재산이야 수치로 증명이 가능하지만 착하다는 것은 주관적인 기준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엄청난 재산을 모으면서 어떻게 착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부분을 읽고 나서 어느 정도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쉽게 지나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그의 아들들은 생일마다 잔치를 벌였고 그때마다 누이들을 불러 같이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욥은 그 잔치가 끝난 뒤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 자식들을 위해 자식 수만큼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욥이 모를 수도 있는 자식들의 죄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욥의 마음을 ‘자식들을 생각해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려고’라고 표현합니다. 자기 자신도 아니고 자식들을 위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오히려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치거나 나쁜 짓을 할라치면 엄하게 꾸짖으면 될 일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욥기는 그의 재산을 알려준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착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욥이 자식들을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다고 알려줍니다. 어쨌든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욥이 자식을 위해 이 정도 했으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어쩌면 약간 강박증 환자처럼 착함이나 의로움에 집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욥기는 오로지 순수하게 그가 부자이고 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하나님이 그를 챙기는 것을 보고 사탄이 질투할 만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질투가 일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그의 선함을 의심하고 그를 시험하고자 한 것입니다. 첫 번째 시험은 그의 자식과 재산을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의 침략으로 재산을 잃었고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렸으며 강풍이 몰아쳐 남은 재산과 자식을 없애버렸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쁜 일은 연이어 온다고 해도 이건 정도가 심했습니다. 이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욥과 같은 재산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탄의 계략으로 욥은 거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사탄의 바람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고 감탄만 나올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탄은 의심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의 몸에 문제를 일으키면 분명 그의 뜻대로 될 거라고 여긴 것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됩니다. 바로 욥에게 너무나도 큰 질병이 생긴 것입니다. 그의 온 몸은 악성 종기로 뒤덮였습니다. 그는 너무도 가려운 나머지 잿더미 위에서 옹기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질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졌고, 이런 저주를 받은 사람은 성 안에 같이 살지 않고 성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저주가 옮겨 올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은 분명 엄청난 죄를 지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죄의 무거움을 판단하기보다 저주의 모양이나 깊이를 보고 역으로 죄를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선한 부자로 알려졌음에도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는 죄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그를 쫓아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 밖 잿더미 위에서 쪼개진 옹기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다 못한 그의 아내가 욥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는 엄청난 재산을 가진 부자였으며, 자기도 모르는 자식의 죄를 위해서 속죄 제사까지 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었습니다. 당시에는 자식을 많이 낳은 것도, 엄청난 재산을 가진 것도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라고 여겼지만, 불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었을 때, 외세의 침략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연재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외세의 침략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자연재해는 하나님의 저주라고 여기기에 충분했습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을 당하거나 운 나쁘게 병에 걸리면 하나님의 저주로 여깁니다. 특히, 건강에 좋다는 것을 빼먹지 않아도 병에 걸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본인이 그 입장이 되면 쉽게 하나님을 저주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욥의 아내가 했던 것처럼 우리의 신실함을 지킬 수 있을까요?
오늘 주신 하늘 말씀을 포함하여 성서일과의 이야기도 궤를 같이합니다. 먼저 시편 26편은 정직한 사람의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스스로 올바르게 살며 주님만을 의지했다고 말합니다. 악한 것과 멀리하며 선한 것을 따르려고 노력했다고도 고백합니다. 그러나 기도문을 잘 살펴보면, 그의 주변엔 선을 멀리하게 하는 유혹도 많고 악을 실행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선을 따르고 주님의 법도를 따르려는 자기를 지켜달라는 말로도 느껴집니다. 마가복음 10장의 이야기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주신 부부의 연을 마음대로 끊어도 되냐고 묻습니다. 바리새인은 모세가 이혼증서를 쓰고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모세의 가르침 사이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증서를 쓰고 이혼해도 된다고 허락한 것은 남성의 악한 마음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남성은 아내와 이혼증서를 쓰고 쉽게 이혼했습니다. 원래 이혼증서는 여성에게 재혼할 자유를 주는 증서였습니다. 당시 재산권이 남성에게 있었기 때문에 여성은 이혼하면 생존을 위협받을 수 있었는데 결혼한 여성이 이혼증서가 없는 채로 다른 남자와 만나면 간음으로 처벌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혼하려면 1년 임금에 해당하는 돈과 결혼 때 보냈던 결혼지참금도 돌려줘야 했습니다. 결국 재산에 여유가 없다면 쉽게 이혼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남성들은 이 법을 악용해 이혼을 쉽게 하고 아내를 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허락했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율법의 빈틈을 이용하는 사람의 악한 마음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율법을 공부한 바리새인들이 올바르고, 정직하게 살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정죄하며 율법의 구멍을 이용해서 그들의 자리를 보전하고 이익을 취하려는 악한 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옳고 바른 삶을 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배워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이들조차 이 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롭고 신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뜻을 곧게 세우려 하지만 주위에서 끊임없이 유혹하고 악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특히 지금 이 시대는 무엇이 옳은가, 바른가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관계가 얽혀 복잡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참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힘이 들고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참된 가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난 집회 때, 함께 나눴던 말씀 제목을 기억하시나요? ‘Just do it!’ 그냥 어떤 실천이라도 해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의롭고 신실한 삶을 사는 것은 크고 거창한 일을 실천하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작은 부분을 실천하며 깨닫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점점 커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살 때도 제조 회사를 살펴 윤리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마치 음식 재료를 살 때, 원산지를 살피고 영양 성분을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몇 년 전에 한 음료수 기업은 대리점에 물건을 강매했다가 갑질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대부분 사실로 밝혀져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고 불매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그 기업은 다른 제품이 코로나에 효과가 있다고 허위광고를 했고, 판매량이 급증하고 주가가 급등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조사에서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들의 윤리적 문제가 불거져 다시 불매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이런 실천은 큰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실천은 개인을 무척 불편하고 수고롭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이런 실천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제 이런 실천이라도 해야겠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귀찮고 티도 나지 않고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고 해도 이들의 신념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그들을 정말 힘들게 하거나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 다가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욥의 아내처럼 ‘언제까지 당신이 신실함을 지킬 수 있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선택은 어때야 할까요? 오늘 우리에게 주신 욥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신실하게 살고 있다면 그 신실함을 유지하는 마음에 응원이 되었으면 좋겠고, 신실하게 살지 못했다면, 신실함을 유지하며 사는 이들을 지지하고 응원하게 되면 좋겠고, 신실하지 않게 살았다면, 신실하게 사는 삶을 꿈꾸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