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올해 더위는 정말 역대급이었습니다. 매년 뉴스에서 올해가 최고라고 보도했는데, 올해가 정말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올해의 더위가 앞으로 다가올 여름 더위 중에 가장 덥지 않다는 겁니다. 뉴스에서 매년 올해가 최고라고 보도했던 말을 돌려보면, 올해의 더위가 가장 덜 더운 거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어린이부 친구들보다 어린 아이들은 봄과 가을을 느끼지 못하며 무더운 여름과 춥지 않은 겨울만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공기가 우리를 맞이하니 더운 여름도 잘 난 것 같습니다. 오늘은 9월의 첫째 주일, 창조절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창조절은 원래 교회력에 없던 절기인데,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된 기존 절기에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억하고 이제 우리 앞에 와 있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자 세계의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이 정한 절기입니다. 사실 환경 오염 문제와 이에 대한 대응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90년 세계교회협의회는 ‘창조세계의 보전’이라는 선교 주제로 열린 회의는 이제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환경 문제를 사회 문제로만 치부하지 말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보전한다는 선교적 사명으로 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후 회의마다 환경 이슈는 빠지지 않고 등장했으며 그 용어도 점점 바뀌어 지금은 ‘기후 위기’라는 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 중 가장 앞에 있는 창세기를 읽으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를 과학자들과 창조론이니 진화론이니 싸울 때만 쓰고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를 우리가 망치고 무너뜨려 왔다는 데는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직, 간접적인 어떤 행동이 창조 세계를 더럽히거나 그 질서를 위협한다면 그 행동을 신앙의 이름으로 멈춰야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0년이 넘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상황은 계속 악화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선택이 많지도 않고 남은 시간도 길지 않습니다. 인류의 최대 위기인 상황에서 우리는 창조절을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2천 년 전, 유대 이스라엘도 최대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지배는 갈수록 교활하고 악랄해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자치권을 준다면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헤롯 같은 인물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귀족 사제들의 후예인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을 잊은 지 오래였고 자기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었습니다. 처음 유대를 개혁하고자 했던 바리새인들 역시 사두개인과 로마의 유혹에 넘어가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유대는 포기하지 않고 독립을 꿈꾸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품에 칼을 차고 다니며 로마 귀족이나 사두개인들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일반 유대인들은 살인적인 삶을 견디며 하나님이 보내신다던 메시아가 어서 오기를 간곡히 바랄 뿐이었습니다.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러워지자 메시아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비를 오게 하겠다, 뱀에 물려도 죽지 않는다, 높은 곳에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며 사람들을 유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위선을 들추시고 그들이 죄인이라고 욕하던 이들을 구원하시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득권이 만든 두터운 헤게모니를 부수고 새로운 세상, 즉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걷지 못하던 사람을 걷게 했고, 보이지 않던 사람을 보이게 했으며,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서 귀신을 몰아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기적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로마를 무찌르고 새롭고 강력한 유대를 만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로마와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고도 그 나라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살지 못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율법을 이유로 구원의 권한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들에게 있다고 왜곡한 것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몸소 보여주셨는데,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대에 살던 바울이라는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거스른다고 평가받았던 예수라는 자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죄를 묻기 위해 여기저기 쫓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위에서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 체험 이후 바울은 명예와 재산, 모든 것을 버리고 그가 살아왔던 길의 반대 방향을 택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율법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했던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나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신앙을 갖게 된 이들에게 바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그 자체였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율법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유대인들과 다투었으며 그를 따르는 이들도 그랬습니다. 결국 집사 스데반이 유대인들에 의해 죽게 되었고, 이후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 교인들은 바울이 말했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라는 말을 절대적인 가르침으로 여겼고 이런 바울의 가르침은 나중에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쭉 역사가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잘 믿고 따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욕심이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의 머릿속의 교리로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게 어떤 상황이냐면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만, 그 예배가 자기 삶을 바꾸지 못하는 지금의 교회와 비슷하게 된 것입니다. 여전히 교인들의 머릿속에는 바울의 가르침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의 삶은 공동체 내에서도 부자와 빈자, 귀족과 노예,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문화와 유대문화를 두고 분열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나 계급의 문제로 사람을 차별하고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하며 갈등이 깊어졌던 것입니다. 예배 후에 공동식사를 나눴는데, 어느샌가 부자들은 예배 전에 식사를 마친다거나 귀족과 노예가 같이 앉지 않고 따로 앉는다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을 죄인 취급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이게 과연 바울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이들의 행동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일갈합니다. 머릿속에만 있고, 행하지 않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믿음이 죽었다고 질타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바울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축복을 부르고 불신이 저주를 내린다고 가르쳤습니다. 믿기만 하면, 믿음만 있으면 뭐든지 될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교회를 대형으로 키웠고 그것이 절대 진리인 양 여겨졌습니다. 그 시기에 대한민국은 정부가 대기업 중심의 성장전략을 세웠고 그 전략이 세계 경제의 흐름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교회는 단지 그 흐름을 잘 탄 것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흐름이 아닙니다. 성장이 아닌 정체, 불황이며 세계 경제의 흐름도 불안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체기에 빠진, 불황으로 힘든 이들을 위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을 줘야 하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바울의 가르침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뭐든 된다는 생각이 여전히 팽배합니다. 그러니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대기업 회장이 되었다고 기뻐할 줄만 알지 그들이 어떤 정책을 펼쳤는가, 어떻게 기업을 운영했는가는 관심 두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가르침에 회의를 느낀 이들과 위로받지 못한 이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교회에 부족한 게 아니라 아예 없다고 불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왜 교회를 떠났는지에 관심이 없고, 그 사실을 안 이들의 반응조차 교회를 생각하기보다 떠난 이들을 탓하기 일쑤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벌어졌던 부와 계급으로 차별한 이야기, 출신과 문화를 이유로 갈등이 생긴 이야기가 그 공동체에만 적용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우리 시대에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신앙에 관심이 없고, 예배를 드려도 몸만 예배를 드릴 뿐, 마음은 걱정과 딴 생각뿐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하지 않습니다. 살아야지, 살아야지 하면서 살지 못합니다. 아마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건 바울의 가르침이 아니라 야고보 기자의 조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야고보서는 신앙이 머릿속에만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교인들에게 아는 것을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머릿속에만 있는 신앙을 삶으로 보이라고 말합니다. 그저 듣기만 하는 것으로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속는 것이라 말합니다. 마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만 많이 사두고 읽지 않으면서도 마치 자기가 책을 산 것이 읽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으면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거울 밖에서의 삶이 훨씬 더 깁니다. 거울을 보는 그 짧은 시간만으로 그를 판단하긴 어려운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신앙을 그대로 행하고 즉 실천하고 그것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율법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야고보 기자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 같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야고보 기자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방법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말합니다. 특히, 이웃 중에도 고난을 겪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는 것이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와서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전부라는 게 아니라 몸소 삶에서 고난을 겪는 이웃들을 돌보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고 조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겐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삶으로 살라고 하면 대단한 것, 거창한 것만 생각합니다. 갑자기 투사가 되어 거리로 나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거나 보육원이나 장애 시설에 가서 봉사한다거나 거금을 기부한다는 큰 것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 자체가 아직 우리가 그런 삶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질문을 바꿔볼까요? 살을 빼고자 하면 뭘 해야 할까요? 간단하죠? 덜 먹고 더 움직이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간단하지만 명확한 것을 두고 쉬운 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니 아예 굶거나 아니면 하나의 음식만 먹는 다이어트를 합니다. 결국 며칠이나 몇 달 가서 그 삶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맙니다. 그래도 이렇게 뭔가를 하는 분들은 낫습니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티브이나 유튜브로 다이어트를 어떻게 하냐는 영상만 찾아봅니다. 그래서 좋다는 방법만 수만 가지를 찾아놓습니다. 그러고는 하지 않죠. 방법을 찾는 것이 마치 다이어트가 된 것인 양 착각하고 그런 노력이 자기를 바꿔놓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아까 처음 말씀드렸던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가 뭘 해야 하냐고 물으면 역시 이것과 비슷합니다. 갑자기 환경 투사가 되어 길거리를 나가 피케팅을 하거나 쓰레기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하거나 기후 위기에 관한 영상만 찾아봅니다. 그러고는 뭐든 했다고 여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실제로 뭔가를 한 건 아닙니다. 머릿속으로만 했다면요.
그래서 제가 요즘 좋아하게 된 말이 있습니다. ‘Just do it.’ 예전에 나이키 광고문구로 유명했던 말입니다. 제가 청소년일 때, 나이키가 수많은 사람을 유혹할 때 썼던 말이 저 문구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 말이 다시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까 예로 들었던 다이어트에도 적용됩니다. ‘Just do it.’ 그냥 해. 말만 하지 말고. 그냥 해.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해보는 겁니다. 수많은 생각이 다이어트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죠. 기후 위기 시대에도 적용됩니다. ‘Just do it.’ 그냥 해. 분리수거가 됐든 에어컨 적게 쓰기가 됐든 그냥 하라는 거죠.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세상이 바뀌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해 볼까요? ‘Just do it.’ 그냥 해.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그냥 해. 뭐라도 좋으니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실천해 봐. 그렇게 우리는 실천해 봄으로써 우리가 지닌 진짜 나와 만나게 됩니다. 내 신앙과 마주하게 됩니다. 허울과 위선에 싸인 신앙이 아닌 진짜 나의 신앙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주일예배 때 목사님의 설교가 내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공부 때, 목사님의 가르침이 내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그 설교와 가르침을 살고자 했을 때, 내가 직접 살고자 했을 때, 그것이 내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절이 시작되는 오늘, 우리는 수많은 위기와 위험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그가 보내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완전한 율법에 이르는 길이며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성인이 되는 길이라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내 신앙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Just do it.’ 우리 모두 한번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앞으로 한 달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적어도 시도해 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