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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 2024년 8월 4일 성령강림후 열한째주일

  • 관리자
  • 2024-08-04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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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샬롬! 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지난 7월 중순부터 어린이부 여름성경학교와 청소년부 여름수련회를 진행했습니다. 여름성경학교는 함께 예배드려요라는 제목으로, 청소년부 여름수련회는 생명 평화 순례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두 프로그램을 선생님들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감사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특히, 어린이부 때는 물놀이할 때와 청소년부 때는 외부 프로그램이 많아서 날씨가 궂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 비는 우리의 프로그램을 비켜 갔습니다. 비는 밤에만 왔고, 우리가 프로그램을 마친 뒤에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런 것이라는 걸 가르쳐 주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한남교회에 오고 처음 교회학교의 여름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어린이부와 청소년부 친구들이 어떻게 이 시간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저에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풍성했던 순간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신 교우들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에베소는 당시 지중해 동부 지역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항구가 있어서 상업이 성행했던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로마의 신을 모시는 큰 신전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발전된 도시에 있었던 에베소 교회는 발달한 로마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켜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냐는 질문에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하실 겁니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했습니다. 그 대답으로 베드로는 예수님께 칭찬받았습니다. 그건 베드로가 올바르게 답해서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압도할 만한 큰 건축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굳건히 지켰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도 가이사랴 빌립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로마의 신전과 발전된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끊임없는 유혹을 견디고 때로는 무서운 협박과 공포를 견뎌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로마 문화의 유혹과 압박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도록 요구했고, 그 길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는지였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4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윤리에 대해 말합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도로 인정하지 않고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에겐 그의 삶을 뒤바꿀 만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의지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나와 함께하자고 했던 것처럼, 바울에게도 그런 경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이전의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 안에 갇혔다고 표현하며 자기의 삶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부르심을 받았으니,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으로 부른 에베소 교인을 가리킵니다. 이들 역시 스스로 신앙을 선택하고 결정했다기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2절과 3절에서 그 질문의 답이 나옵니다. 겸손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고 인내와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겸손은 그리스 원어 ταπεινοφροσυνη(타페이노프로쉬네)’이며 영어로는 ‘humility’입니다. 자기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겸손은 모두의 미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높이고, 자기의 장점을 드러내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너무 겸손하면 안 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모두가 높아지려고 하니 나만 겸손하면 오히려 손해라는 겁니다. 그런데 겸손은 말 그대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고 여전히 그 가치는 존재하고 인정받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귀족은 책임을 진다.’입니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와 권력은 그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를 수반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 이들은 비판받습니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반대되는 갑질이라는 단어를 탄생시켰습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윤리적으로 훨씬 낮은 수준으로 사는 모습이 자주 드러났습니다.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무시하고, 그 위에 군림해야 자기가 높아진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겸손의 반대인 교만과 아주 비슷합니다. 물론 우리 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그들이 가진 율법을 무기 삼아 죄 없는 사람들까지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비판받았고, 끝까지 죄를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이 아닌 당시 로마 사회에서도 겸손을 비굴하다는 부정적인 요소로 취급했고, 반대로 유대교 내에서는 겸손을 긍정적인 요소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의 교만을 두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무너뜨리고 낮은 자를 들어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겐 무엇보다 뛰어난 모범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는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자기를 높여 달라는 욕심도 없었고, 높게 봐달라는 의도도 없었습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두고 내려오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온유함은 그리스어 πραυτής(프라우테스)’이며 영어로는 ‘gentleness’입니다. 이 말은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상냥함, 친절함, 관대함, 얌전함, 고상함, 우아함 등입니다. 우리말로 '온유하다'는 성격이나 태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에 등장하는 온유함은 개인적인 의미라기보다 사회적인 의미로 봐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과 예의와 연관됩니다. 예를 들면, ‘은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부드러운 깃털이 되기도 하고, 날카로운 칼날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리 의도가 선하다 하더라도 그 의도가 잘 전달되느냐, 의도와 다르게 오해하느냐는 주로 말하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쉽게 잊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라 맞는 말을 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계신 권사님, 장로님들처럼 삶의 여유와 품위를 가진 분들이라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먼저 떠올리고 공동체가 올바른 길로 나가기 위해 한 번 더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 의미가 퇴색되거나 반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 겸손의 의미를 살피면서 느꼈던 것처럼 지금까지도 그 의미가 변하지 않고 존중받는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겸손과 온유를 그리스도인의 특징 또는 성령의 열매로 여겼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래 참음은 어떨까요? 그리스어로 μακροθυμία(마크로쒸미아)’, 영어로 ‘patience’입니다. 다른 사람의 화나는 행동을 참는 것입니다. 화를 참는 것은 결코,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를 키우거나 차를 몰거나 아파트에 살면서 나쁜 이웃을 만나면 아무리 화를 참으려고 해도 불쑥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상대의 단점을 포용하는 능력 또한 성령의 열매로 간주했습니다. 우리가 생명과 평화의 사도로 살려면 인내는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렇게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는 어떻게 보면 한 개인에게 도덕 교과서처럼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도 바울의 목적은 그리스도인 개인이 착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더 큰 목적은 교회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라는 공동체가 성령의 은혜와 축복으로 굳건히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교인 각자의 출신과 성분도 달랐고 성격도 다양했고 바라는 것도 다양했고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가 타고난 대로 행동했다면 고슴도치 같은 사람만 남았을 것입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그것이 상처인지 모르고, 자기도 누군가에 상처받으면서도 그것이 상처인지 모르며 아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모인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기본적으로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위 세 가지가 위대한 가치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교회라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안에서 굳건히 설 거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교회를 세웠지만, 그 교회에서 또한 수많은 갈등과 분열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포함한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아가페 즉,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태도인 그 사랑을 말합니다. 상대방의 약점과 단점을 포함하여 그 특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허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서로를 대하고, 자신을 낮추며, 부드러운 말로 대화하는 우리 한남교회 교우들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12년 전에, 너무 오래전인가요? 하하.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여 시청률도 꽤 높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였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서 신선했던 점은 등장인물마다 자기가 처한 위치에 걸맞은 품격을 가졌다는 점이었습니다. 남자주인공은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소장이었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가 의뢰인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은 걸 보고 건축사무소의 손해가 될 것이 뻔한데도 그 부당함을 풀어줍니다. , 다른 인물은 돈 많은 건물주였는데, 일면식도 없는 고등학생의 억울함을 자기가 가진 부와 권력으로 풀어주었습니다. 이들뿐 아니라 드라마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이 자기의 자리에서 그 역할 어쩌면 의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내고 있었습니다.

 

아까 저는 말씀을 시작하면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대답과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그에 걸맞은 품격을 보여줬거나 보여줘야 함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품격은 뭘까요? 최근 신학대학원을 같이 다닌 동기들이 함께 모인 적이 있었습니다.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 일하다가 타이완에서 선교동역자로 일하는 친구가 잠시 귀국해서 모인 자리였습니다. 서로 근황을 물어보며 이야기하던 중에 한 친구가 사람이 모인 곳은 다 비슷하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 사람과의 복합적인 관계를 매끄럽게 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다가 나온 얘기였습니다. 그때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마냥 고개를 끄덕일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맞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에게 사람이 모인 곳은 다 비슷하다.’라는 이야기가 그대로 적용되면 안 되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처럼 산다면, 그 사람들이 모인 곳과 다르지 않다면 과연 우리의 신앙은 무엇으로 구분될지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은 뭔가 다르고, 그 품격이 느껴진다고 할 때,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높이려고 상대를 깎아내리지 않고, 진심으로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부드러운 태도로 대하고 상대의 실수나 잘못도 부풀리기보다 진심으로 조언하면서도 스스로 고칠 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 시작되는 한 달 동안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갖추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작성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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