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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찬양집회] 2024년 7월 7일 성령강림후 일곱째 주일/ 맥추감사주일

  • 관리자
  • 2024-07-07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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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요즘 날씨가 꽤 변덕스럽습니다. 비가 온다는 예보에도 비가 오지 않다가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도 하고, 비는 오지 않아도 습도가 높아서 우리의 생활을 불쾌하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슈퍼컴퓨터를 동원해도 종잡을 수 없는, 변덕스러운 날씨와 마주합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세운 계획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한때는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은 하루 동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유행한 뒤에,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무슨 법칙까지 만들도 필요 없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을 썼던 사람들은 하루 종일 되는 일이 없어 속상하다는 의미였는데, 그게 당연하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었습니다. 그 말뜻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삶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바라는 대로 삶이 이뤄졌다면 그것이 비정상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습니다. 삶은 내가 바라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바라는 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되,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엔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 일이 훨씬 더 많으니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면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도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음먹은 대로 일이 하나 이뤄지면, 그 기쁨은 예전보다 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감사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행복이라는 시간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시간을 헤아리면 행복보다 훨씬 더 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대로 삶이 펼쳐지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도 없고, 가끔 마음대로 펼쳐지는 순간이 생기면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짧은 행복의 순간을 놓치면 그 사람의 삶은 불행만 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을 잡고, 함께 기뻐하고 행복을 느끼면 감사할 일이 넘쳐날 것입니다. 무엇보다 행복의 순간은 물리적 시간으로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머리에 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살다가 문득 그런 순간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우리의 삶은 그때를 추억하며 다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또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행복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시는대로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6월 중순이나 말의 보리 추수를 끝낸 우리는 그 수확의 감사로 7월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예전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쌀이 없어서 보리의 추수를 기다렸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계신 권사님과 장로님들은 대부분 그 시대를 사셨습니다. 그런데 가끔 손녀, 손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 그런 시대가 있었나요?’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일 겁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그렇게 힘든 시기를 견뎌 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달리 어딜 가나 먹을 게 넘쳐납니다. 매해 음식물 쓰레기가 엄청나다는 뉴스가 끊이질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 대부분이 도시에서 살기에 맥추감사주일은 이제 의미가 사라지고 필요 없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권사님과 장로님이 사시던 먹고 살기 힘들었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 감사함을 더 잘 느끼지도 못하고 표현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먹을 것이 넘쳐나도 그것이 당연한 듯, 내가 돈을 버니까 먹고 살 수 있는 거라고 여깁니다. 쌀밥 한 공기에도 감사하던 때는 사라지고, 소고기가 넘쳐나도 감사할 줄 모르는 때가 된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오직 나만 보입니다. 사회에 살면서도 사람과의 관계보다 오직 나만 신경 씁니다. 그러니 공감 능력은 크게 떨어집니다. 최근 뉴스를 보면, 슬픈 소식이 너무 많습니다. 화성의 한 공장에서는 불이 크게 나서 아직 인명피해의 규모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특이점은 이주노동자들의 피해가 크다는 것입니다. , 시청역에서는 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운전 방향을 거스른 역주행도 모자라 가속해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동료의 승진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에 참석했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런 죽음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요? 나와 내 가족이 아니니 상관없다, 어쩔 수 없다고 여겨야 할까요? 우리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비극적 사건에 함께 슬퍼하고 유가족이 느낄 극심한 고통에 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웃의 슬픔에도 공감하지 못합니다. 화재의 희생자 분향소를 설치하는 사람들에게 저들이 나라를 위해 죽었냐?’고 말한 파출소장이나 큰 교통사고가 났음에도 길에 쓰러진 피해자보다 먼저 자기 차를 살폈던 사람을 보며 더 큰 상처를 받습니다. 정말 이런 비극적인 일이 자기 가족에게 일어나도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야만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오직 자기만 보고 다른 누구는 보이지도 않는 게 지옥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생명과 평화와 정의가 어디에 있을까요? 오직 내 안위와 행복만 찾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라면 그곳은 살육이 난무하는 전쟁터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세례요한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세례요한은 너무도 허무하게 그 생을 마감했습니다. 17절에서 29절까지 그의 죽음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당시 세례요한은 옳은 말, 바른 말을 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 대상이 권력을 가진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롯을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엔 혈육끼리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습니다. 특히, 그 시대의 상류층은 그들의 피가 우월하다고 여겼고 그렇게 혈육끼리 혼인하며 권력을 유지했기에 친족 간의 결혼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권장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인 이유는 그가 자기를 포함해 권력자들을 비판했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그를 지지하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제가 본 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14절에 헤롯은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세례요한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얘기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보고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떠오른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예전에 세례요한과 함께 활동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예수님의 모습에서 세례요한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겹쳐 보인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세례요한이 살아 있을 때, 사람들에게 보였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보였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나 다른 옛 예언자를 떠올린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추측하게 합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은 실로 허무했지만, 그의 삶은 많은 이들의 머리와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죽었음에도 그를 기억하는 다른 이들에게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최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했던 두 권사님을 하나님 품에 안겨 드렸습니다. 우리는 유가족의 슬픔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두 권사님의 장례 일정을 함께하면서 저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삶이 짧고 유한한 만큼 더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와 죽음은 짧고 유한한 삶의 끝이 아닌 다른 영역으로의 전환이기에 살아있는 우리는 두 권사님의 삶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의미 있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이전의 삶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산입니다. 이런 유산은 물리적인 시간과 상관없습니다. 행복의 순간을 잘 잡아 감사를 드릴 줄 아는 사람은 유산의 순간마다 유산을 물려준 그분이 떠오를 것입니다.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이 떠오르면, 시간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비록 육체는 흙으로, 대자연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제자와 추종자들에게만 나타났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와 몇몇 추종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모른 척하거나 부정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이들에게는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다는 공포와 협박을 극복하고 그 사실을 증언했고, 무엇보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살고자 했습니다. 그의 삶과 가르침을 되살리려고 했고, 머리와 마음속에 담겼던 예수님의 모든 것을 재연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고, 그가 다시 사신 의미 또한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과 같은 삶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삶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 여기고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그에 감사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도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감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거부했던 유대의 기득권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도 거부했으며 그들의 능력으로 부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이 둘의 끝은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들의 죽음은 누구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잘 받아들이는 방법은 잘 기억하는 것입니다. 잘 기억했다가 어느 순간 떠오른 그 시간으로 우리는 그와 함께했던 그 삶을 다시 떠올리게 되고 그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채워지면 그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한 생명으로 우리와 함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며 그대로 살아내려는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또한, 그 과정 중에 우리가 행복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감사할 줄 알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길입니다. 함께 두손 모아 거둠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설교자 : 허준혁 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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