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가 자주 들립니다. 기후 위기에 관한 이슈는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이나 직장에서 일하는 어린 직원, 커피숍에서 일하는 직원, 하급 공무원, 교사, 서비스업체 직원 등 우리가 흔히 볼 수 있고 어쩌면 우리의 자녀일 수도 있는 그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막말을 내뱉는 이야기를 쉽게 보며 교통사고를 내고도 돈이 없다며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가해자, 신체가 약한 상대에게만 공격적인 위협을 가하는 사람들,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 청년들의 뉴스가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이런 뉴스를 보면, 정말 세상이 망할 때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어쩜 저럴 수가 있을까 하며 함께 속상해지기도 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온라인에서 악플을 달고 인신공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젊거나 어린 세대들의 문제가 사회화될 때, 꼭 같이 나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육’입니다.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교육계 종사자들의 문제라는 게 아닙니다. 사회 전체가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교육’은 가르치고 기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가르쳐 왔습니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등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수준은 세계적입니다. 문맹인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고, 세계 유수의 대학에도 많이 진학하며 우리나라 국민의 교육열도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왜 청소년들이 힘들고 불행한 걸까요? 사회적 문제가 끊이지 않고 학부모의 갑질 문제와 교사의 자질 문제도 나올까요? 우리는 가르치기만 했지, 기르지 않았던 건 아닐까요? 지식으로 머리는 채웠는데, 그 지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을 하지 못하게 만든 건 아닐까요? 우리는 머리만 지식으로 가득 차 있을 뿐, 가슴은 텅 빈 듯한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지만, 실제로 착하게 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남을 도와야 한다고 배웠지만, 실제로 남을 도운 적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해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실천할 의지도 없습니다. 오히려 남을 돕거나 착하게 사는 사람을 비방하고 깎아내립니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니 다른 사람의 선한 행동이 꼴사납게 보이는 겁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부모는 자식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했지만, 빗나간 노력이 자식의 삶을 자기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는 배우는 과정을 대학교에서 끝냅니다. 교육은 대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끝납니다. 이후에 배우는 것은 직장에서 일에 관련된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모든 교회에는 교회학교가 있습니다. 교회학교는 사회의 학교와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교회학교를 졸업하면 교육은 끝납니다. 더 이상의 교육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옳은 일일까요? 제가 아까 문제라고 말씀드린 걸 보면 이게 옳은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드시죠? 사실 우리에게 교육은 끝이 없어야 합니다. 이건 비단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머리에 지식을 넣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12년의 교육과정이 끝나면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사회에 진입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또 다른 교육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배웠던 것을 사회에서 잘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 사회는 많이 다릅니다. 학교에서는 ‘빨간 불에 건너지 말고, 초록 불에 건너야 한다.’라고 배웠지만, 사회에서 그 말대로만 했다가는 융통성이 없다거나 꽉 막혔다는 불평과 핀잔을 들을 것입니다. 그럼 사실 당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는 칭찬받은 행동이 사회에서는 불평을 듣거나 혼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배운 것을 뒤로 하고 사회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학교에서 배운 것은 사회에서 쓸모없는 게 많습니다. 제가 간단한 예를 들었지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학교에서 배운 간단한 성경 지식으로 살아갑니다. 당연히 학교에서 사회에서 부딪치는 일이 많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뒤로 밀리고 사회에서 경험한 처세술보다도 뒤로 밀립니다. 그러니 교회에서의 가르침은 사회에서 쓸 수 없고 오직 교회에서만 쓸 수 있게 됩니다. 교회에서만 필요한, 사회에서는 쓸모없는 가르침일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교육은 어린이부터 연세 많으신 장로님, 권사님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그렇듯 교회를 다닌 경력이 오래된 분들은 교육이 필요 없다고 여기거나 이제 나이가 많아 힘들다고 포기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티브이에서 늦은 나이에도 학업을 이어가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대부분 사람은 그런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감탄하고 칭찬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그것을 핑계 삼지 않고, 경력이 오래되어도 늘 새롭게 배우고 도전하는 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는 어른들을 위한 교육이 없는 걸까요? 이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이 어린이나 젊은 세대에겐 사회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중요한 가르침임을 깨닫게 하고, 어른과 어르신들에겐 우리의 신앙이 더 성숙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식으로 머리만 채우는 게 아니라 그 지식이 가슴을 거쳐 온몸을 통해 실천할 수 있음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1서입니다. 지난 집회 시간에 요한1서를 읽으며 시대적 배경과 환경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기억나십니까? 간단하게 다시 말씀드리면, 요한1서는 기원후 100년쯤 쓰였습니다. 당시 유대 이스라엘은 로마와의 전쟁으로 인해 성전이 불타 사라졌고,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꾸리게 됐고, 이곳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를 이방인들에게 강요했고, 이방인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그리스철학을 토대로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이에 요한1서의 기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지침을 전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으로서 가졌던 차별도 편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저주받은 병자라고 격리했던 이들을 찾아가셔서 위로하셨고, 로마의 앞잡이라고 욕했던 세리와도 함께 식사했으며, 그들이 마주치기조차 극도로 싫어했던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설교하시며 만나는 사람을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사셨습니다. 이는 율법을 악용하여 사리사욕만을 챙겼던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과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올바르게 알았고, 이를 사랑으로 실천했습니다. 무엇보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던 유대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율법에 얽매이기보다 힘들고 고통받아 괴로워하는 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셨습니다. 결국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불의한 재판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의 기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이외에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과 더불어 그에 걸맞게 살아야 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를 강조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그에 걸맞은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 역시 중요했습니다.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적용하는 게 아니라 율법이 지닌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말씀대로 나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1서의 배경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갈등과 분쟁이 많은 상황이었고, 이는 정치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위협과 두려움이 늘 존재했음을 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너무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1서의 기자는 예수님 역시 그렇게 사셨고 우리에게도 똑같은 사명이 주어졌음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기자는 우리가 보기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무겁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셨다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아까 저는 ‘빨간 불에 건너지 말고, 초록 불에 건너야 한다’라고 학교에서 배웠지만, 사회에서 항상 그렇게 실천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학교에서 배우지만,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 보이는 법과 보이지 않는 규칙에 영향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식민지라는 정치적 상황과 유대교라는 종교적 배경, 유대인 남자라는 생물학적, 사회적 정체성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와 비슷한 상황 속에 놓인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소위 세상이라고 불리는 규칙과 법에 영향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더 높은 곳에 두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차별받고 외면당했던 이들을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여겼을 편견과 선입견도 예수님은 극복했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선교 대상이 아니라고 했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의 눈물겨운 호소로 그의 딸도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런 삶의 실천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죽음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1서의 기자는 그가 세상을 이기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에 걸맞은 삶의 실천을 이어갈 때,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성경은 세상을 이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학엔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람은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을 때, 어떤 사람도 동물이 아닌 사람은 없지만, 동물 중에는 사람이 아닌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동물은 사람의 필요조건이고 사람은 동물의 충분조건이 됩니다. 그런데 필요충분조건은 서로 필요하면서 충분한 조건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 됩니다. 두 조건 사이에 차이점이 없고 같을 때, 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이기는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으니, 우리도 그처럼 산다면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요한1서 기자의 말처럼 너무 무겁게 여기지 말고 예수님처럼 차별과 편견을 걷어내고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가족을 존중하며, 이웃을 아끼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느 하나 부족하거나 모자라지 않게 주어진 사명을 삶으로 살아내는 우리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거둠기도를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