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후찬양집회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기 전에 기억해야 할 게 있습니다. 제가 수요성경공부할 때,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성경을 읽을 때,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별 생각 없이 읽다 보면, 성경이 며칠 전에 쓰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게 맞을까요? 성경은 분명 그 본문이 쓰였을 때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인간이라면 쓰였을 때의 상황과 배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제 교회를 청소하며 오신 교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어린이들이 알 수 없는 말로 대화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 그냥 아이들끼리만 쓰는 은어이거나 신조어겠거니 싶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린이들끼리만 아는 말이 있는 게 아니라 어른들만 아는 말도 있었습니다. 요즘 한참 아이들의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유행했고, 한자를 잘 모르는 세대가 한자 표현에 익숙한 어른들의 격조 있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오해가 생겼던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라는 표현에서 ‘심심한’은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뜻입니다. 앞의 심심하다는 우리말이지만, 뒤의 심심하다는 한자가 포함된 표현입니다. 그래서 어떤 젊은이들이 유감을 표하는데 심심하다고 쓸 수 있냐고 불만을 늘어놓았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모르는 말을 쓰는 것은 비단 젊은이들에 한정된 얘기는 아니고 어른 세대도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서로의 상황과 배경을 이해하고 배려하면 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지만, ‘젊은이들은 이상한 말로 대화해’라든가 ‘어른들은 쓸데없는 한자를 써서 어렵게 해’라고 한다면 서로의 오해와 불신은 늘어만 갈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서두를 길게 얘기했냐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인 요한1서를 그냥 읽으면, 지금 우리 상황에 비추어 읽어도 크게 문제 되지 않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가 없고, 그 의미가 파악 가능한데 뭐가 문제냐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요한1서가 쓰였던 상황과 배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피상적인, 요한1서의 기자가 쓰고자 하는 의도와는 상관없는 수박 겉핥기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요한1서의 기자는 당시 그들의 공동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이 서신을 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흘러 그 상황과 배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그 상황과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서신을 읽는다면, 요한1서의 존재는 의미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글은 다른 어디에도 많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우리가 상황과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읽으면 아까 이야기했던 오해와 불신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럼 오해와 불신을 막기 위해 요한1서의 상황과 배경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책은 기원후 1세기쯤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때는 그리스철학이 유대에 널리 퍼져 있을 때였습니다. 유대인들도 나라가 망해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공동체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는데, 기독교 공동체에는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이들은 출신에 따라 성향이 매우 달랐습니다.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율법과 할례, 음식 규정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보다 뛰어난 예언자로 보았습니다. 이들이 많은 공동체에서는 할례나 음식 규정을 다른 이들에게도 강요해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반면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심취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스철학의 논리 속에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이해하고 해석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둘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논리를 다른 이들에게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이들 중 극단적인 사람들을 ‘영지주의자’라고 불렀고 이들은 나중에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이렇게 성향이 달랐던 이들이 한데 모여 있었지만, 초기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시리라 믿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혁명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이 그들의 생각처럼 이뤄지지 않자 차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다투고, 상대를 정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은 그런 상황과 배경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요한1서의 기자는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앞부분에 그들이 편지를 쓰는 목적을 밝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가지게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잘 사귀고 친하게 지내라는 말을 지금의 언어로 받아들여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기자는 하나님을 빛이라고 표현합니다. 요한1서나 요한복음을 보면 그리스철학에 영향을 받은 부분이 나옵니다.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영과 육, 선과 악 이렇게 둘로 구분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기자의 표현은 그리스철학에 익숙한 이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둠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영역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니 어둠 속에서 산다면, 그것은 우리가 거짓말을 하거나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서로 기독교인들과 사귐을 갖게 되고 이런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한 영지주의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은 영적 존재이고 실제 육신으로 살지 않았으며 사람들 앞에 잠깐 나타난 것뿐이며 영은 육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육신이 지은 죄는 영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요한1서가 쓰였던 상황과 배경을 살펴봤습니다. 어떻습니까? 문자 그대로 봐도 대충 의미가 보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상황과 배경을 고려하고 성경을 읽어야겠다고 생각되시나요? 아직 생각이 명확해지지 않으셨다면, 다시 한번 본문을 보겠습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은 빛이라고 이야기하고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맞습니까? 절대적인 존재인 하나님 안에 빛만 있고 어둠이 없다면 절대적인 존재라는 표현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철학의 이해에서 비롯된 논리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십니다. 우리가 알고 판단하는 범위를 하나님은 뛰어넘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빛에만 계시고 어둠에는 계시지 않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틀린 말이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 제가 상황과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요한 공동체에서 그리스 문화에 익숙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전하려면 이들이 익숙한 언어로 알려줘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소 자신들의 이해와는 달라도 비슷하게 설명해 준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 빛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선함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던 삶과 기준이 바로 빛이라는 영역 안에 존재합니다. 영과 육을 나눠 육신의 죄가 영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영지주의자들의 논리에 반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을 통해 죄를 사해준다는 성육신의 가르침을 이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육신을 하찮게 여겨 성도 간의 교제를 무시해왔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사귐을 갖게 되면 예수님의 피로 인해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았음에도 이들은 영과 육이 분리되어 영으로 인한 죄는 성립될 수 없어 ‘우리는 죄가 없다’라고 주장했는데, 기자는 참된 신앙에는 실천이 따른다고 가르칩니다. 교회 밖 세상이든 교회 안에서든 성도나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은 신앙에 따른 실천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요한1서의 기자는 그리스철학으로 예수님을 해석하여 엇나간 신앙을 갖게 된 영지주의자들에게 참 신앙의 본질을 서신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특수한 상황이 시간이 지나면서 보편화되어 많은 이에게 공감을 얻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성경에서 보면 시편이나 잠언 같은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 다른 본문들 심지어 시편이나 잠언조차도 구체적이고 특별한 상황이나 배경 속에서 쓰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전혀 다른 결론에 다다르거나 엉뚱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시대와 배경을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요한1서의 기자는 그리스철학의 논리로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하고자 했던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에게 참 신앙의 본질을 가르쳤습니다. 인간 예수님이 당시 유대 사람들을 위한 수많은 일들과 그 삶의 모습을 그리스철학이라는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썼기에 하나님을 ‘빛’이라고 말했고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선함이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기독교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보이려면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영과 육이 분리되어 죄가 없다는 영지주의자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며 악한 마음을 먹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거짓말쟁이임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 성경에는 마지막 10절의 말씀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우리가 죄 지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낼 뿐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는 게 아니라 영적 존재가 알고 깨닫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유진 피터슨 목사는 오히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빛 아래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참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사는 그 실천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시작되는 한 주 동안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고 그 안에서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두손 모아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