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후찬양예배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헨리 나우웬 신부가 쓴 사순절 묵상집을 읽으며 그동안 갖고 있었던 몇몇 단어와 마주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규정하는 단어였습니다. 하나님, 기도, 감사, 하나님의 뜻 혹은 그의 의지, 용서. 이렇게 무게가 느껴지는 단어였습니다. 묵상 때, 들었던 생각은 겉으로만 기독교인인 척을 하고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삶의 중심은 언제나 저였고,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나 그의 뜻대로 사는 것은 그저 양념처럼 곁들여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헨리 나우웬 신부는 내 온 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저 말이나 가벼운 고백이 아니라 내 마음에 하나님으로 가득 차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존재가 내 안에 가득 차 도저히 나라는 존재가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부끄러워졌습니다. 제 신앙이 얕고 좁아보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과연 그렇게 사는 게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분들은 분명 있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헌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은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 역시 얕고 좁게 여겨왔던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교회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를 곱씹어 보십시오.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 감사하다는 말, 하나님의 뜻대로 혹은 이끄는 대로 살겠다는 고백, 내 죄를 용서받음 같이 나 아닌 타인의 죄를 용서하겠다는 믿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올해 2024년의 사순절을 평소 자신이 당연하다 혹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을 되새기며, 진짜 그 말이 담은 의미를 살고 실천하고 있는지 곱씹고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1세기 고린도라는 도시이며 그곳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재건된 곳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의도적으로 로마인을 이곳으로 이주하게 유도하는 정책을 폈고, 좌우로 바다가 연결되어 동과 서를 잇는 해상무역의 중심이 된 곳이어서 외국인들이 많았던 곳입니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여 번성했고,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었습니다. 다만, 지리적 요인과 상업적 요인으로 인해 자유로운 문화가 발달하다보니 한계를 넘어선 부분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유흥과 퇴폐라는 이미지가 덧붙여지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 교회를 세웠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사야 29장 1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지혜로운 자의 지혜를 폐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 서로를 뽐냈습니다. 수사학이 발달한 그리스 문화는 상대방을 논리로 설득하고 수준 높은 철학적 논제를 다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지혜가 가장 큰 덕목이었습니다. 20절에 등장하는 현자, 변론가, 학자가 그런 이들입니다. 또한 로마의 다양한 신전을 통해 전해지는 여러 신들의 이야기가 삶의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갈피를 잡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의 어떤 지혜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오히려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에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난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이 활동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끊임없이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라면 그에 걸맞은 표징을 보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 그의 삶 자체가 메시지이며 표징인데 당시 유대인들은 이를 전혀 알지도, 눈치채지도 못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구했고 로마인들은 그들을 보호하는 신을 숭배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에겐 무엇이 있어야 했을까요?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된 이유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십자가 사건은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보기에 그건 거리끼는 일일 뿐이고, 어리석은 일로 여겨질 정도로 철저하고 명백히 실패였습니다. 예수님은 몇몇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더 많은 자국민들에게 외면당했고, 로마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채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은 일로 치부하는 이 사건이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의 기적이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세기의 고린도와 2024년의 서울은 어떻습니까? 많이 다를까요? 학문과 문화는 더 발달했고, 자본은 누군가에게는 넘친다는 표현도 모자를 정도로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은 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변합니다. 책이나 SNS 같은 소셜 미디어에도 자기계발이나 행복해지는 법 같은 글과 영상이 넘쳐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의 삶은 변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발달된 학문과 다양한 문화가 담을 수 없는 길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의 길은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고 길이며 아무도 그 길로 가지 않고, 인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은 그 길을 가야하는데, 세상 속 기독교인조차 세상의 지혜를 따르기에 교회가 세상의 다른 공동체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속 고린도의 기독교인들과 다를까요? 그들보다 더 나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본문을 관통하는 말을 저는 다름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출애굽기 20장의 말씀은 십계명입니다. 야훼는 히브리를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면서 그들을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로 세우기 위해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것이 히브리가 주변 다른 민족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성전정화사건은 성전 속에서 세상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이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성전은 하나님의 뜻과 율법이 지켜지는 곳이어야 하는데, 사람의 욕망으로 가득 차 세상 속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9편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와 아닌 자의 다른 점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지 않고 산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 사람이라고 나누는 의미가 사라집니다. 내가 세상 사람이라고 구분하는 그들과 다른 점이 없는데 하나님이 어디에 살아있다는 것입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다양한 문화와 욕망이 꿈틀대는 고린도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어리석음으로 판단되는 길을 걷도록 요구합니다.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판단할 뿐,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세상 그 어떤 지혜보다 뛰어나며 위대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그 지혜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다름은 여기서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십자가 사건을 보고 들으며 삶을 변화시키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뛰어난 지혜나 화려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어리석고 바보 같더라도 예수님이 보여주고 하나님이 인도하신 그 길을, 그 삶을 걷기 위해 살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지금 우리는 2024년 서울에서 살아갑니다. 복잡하게 발달된 문화 속에서 세상의 지혜는 우리를 더 혼란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이 정도면 됐어.’ 혹은 내가 생각하는 믿음의 말을 당연하게 여기며 온전히 나를 하나님의 길로 가지 못하게 방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발 하나만 걸치고 있는 모습을 바라지 않습니다. 온 몸을 하나님께 드리길 원합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길로 걷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때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으킬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세상의 지혜를 거부하고 낮은 자로 이곳에 오셔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