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후찬양예배를 기억하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불의와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테러의 위협 속에 놓인 유대인들, 끝나지 않은 전쟁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야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튀르키예 출신의 한 기자는 중동에서는 평화가 너무 비싸다고 말했습니다. 어디서 사고파는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평화의 가격이 세계의 곳곳마다 다르면 안 됩니다. 모쪼록 고통당하고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비극의 중심에 있는 그들이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독교인은 진심으로 바랄 때,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말로도 하고 마음속에서도 합니다. 10년 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부산에서 열렸을 때,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새벽마다 모여 기도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세계의 어떤 교회에 가도 새벽마다 기도회를 여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쉬웠던 점은 새벽기도의 결과로 교회의 성장밖에 말할 게 없는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몇만 명, 몇천 명이라는 숫자가 전부였습니다. 어떻게 기도의 결과로 사람이 늘어났다는 걸까요? 한국교회에서는 바라는 걸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뤄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오래전, 우리의 어머니들은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새벽에 일어나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조상신께 빌었습니다. 오직 내 자식과 내 가족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변하지 않은 채로 빌 대상만 바뀌었습니다. 교인들은 내가 바라는 게 이뤄지면 기도에 응답받았다고 여겼고, 이뤄지지 않으면 응답받지 못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 교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디언의 기우제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과부와 재판관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어느 고을에 재판관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표현은 그가 이방인이며 식민지 사람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사람이라는 상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에 반해 과부는 당시 사회에서 가진 것 없는 약자였습니다. 남편이 죽었으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과부는 다른 남편이 생기지 않는 한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도 모자라 소송에 휘말렸습니다. 그를 적대시하는 누군가가 과부의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사고, 팔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가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땅을 사고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남성의 몫이었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재산으로써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남성이 죽으면 그의 아들이 유산으로 물려받거나 남동생과 형수가 결혼하여 그 재산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과부는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나 봅니다. 불행이 닥쳤어도 과부는 낙심하지 않고 재판관을 찾아가 자기의 권리를 찾아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다가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이 약자 중에서도 약자인 과부의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 과부는 재판관을 줄기차게 쫓아다녔습니다. 재판관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과부가 자기를 찾는 모습을 사람들이 본다면, 그에 대한 평판이 안 좋아질 것이고 여론은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무엇일까요? 한국교회는 이 이야기를 교묘하게 비틀었습니다. 기도의 본질은 놔두고 그저 기도는 이뤄질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교인들은 개인의 복을 빌거나 성공을 위한 기도만 했고, 결국 기도는 교인의 욕망을 이뤄주는 도구로 폄하되었습니다. 새벽에 깨끗한 물을 떠 놓고 조상신께 빌던 선조의 모습과 비교해도 기도하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 다른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건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가 뜻하는 기도 즉, 예수님이 가르친 기도는 지금 말씀드린 기도와는 아주 다릅니다. 기도의 본질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나 혹은 가족을 위해 기도하더라도 명예나 성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나나 가족이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고 헌신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에서의 명예나 성공이 나 혼자 잘 나서 된 것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게 해달라는 겸손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려야 그 속에서 온전히 나를 걷어내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나옵니다. 우리는 거기서 기도의 모범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그의 나라를 오게 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구하고, 우리가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빕니다. 먼저 기도의 대상을 나에게서 먼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나와 내 욕망에서 멀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꼭 필요한 것만 가지면 됩니다. 기도에서 내 욕망을 걷어내고, 그 빈 곳을 하나님 나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고통받고 억압당하는 이들이 회복되는 곳입니다. 주위를 돌아보고, 지금 이곳에서 불의가 이뤄지는 곳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그의 생명과 평화가 이뤄질 때,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건 이뤄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만으로 충분할까요?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우리는 기도가 이뤄지도록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복권에 당첨되도록 기도한 이에게 하나님이 복권을 먼저 사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기도가 이뤄질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서 기도는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들린다고 말하는 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기도하겠다고 말한 뒤로 어떤 변화도 없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기도를 그저 그들이 믿는 신에게 부탁해 보겠다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내내 비참했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기도가 우리에게 그렇게 하찮은 행위일까요? 아닙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강력한 행동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겠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그 뜻이 이뤄질 때까지 온몸과 마음을 다하겠다는 굳은 결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제가 최근에 읽은 ‘아몬드’라는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 윤재는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어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윤재는 상황에 맞게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법을 하나씩 배워야만 했습니다. 학교에서 차별받고 따돌림당하는 윤재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곤이라는 친구를 만나 관계를 맺고 우정을 쌓습니다. 그러다 곤이 위험에 빠지자, 윤재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돕습니다. 그것이 목숨을 위협받는 아주 무서운 일이었음에도 말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위한 실천은 내게 이익이 생기는 일도 아니고 내가 누구에게 베푸는 게 아닙니다. 설령 내게 피해가 되고 희생이 필요한 일이더라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온몸과 마음을 다했다고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그들을 억압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도가 이뤄지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울부짖으면서도 그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을 실천해야 했습니다. 그 행동으로 손가락질당해도, 권력자로부터 압박을 받더라도 실천하라는 게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욕망으로 가득 차고 불의가 넘칩니다.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여기저기서 벌어집니다. 사회적 재난에 무책임한 정부에 어떤 요구도 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들이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우리가 바란다고 고백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 생명이 숨 쉬고 이익이나 욕망이 아닌 평화를 이루는 모습이 아닐까요? 기도는 그 나라를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내 욕망을 채우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는 기도를 하고, 현실에 낙심하지 말고 기도가 이뤄질 때까지 진심으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설교 : 허준혁 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