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18일(3월 17일 화)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 마가복음 8:1~26
1.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마태와 마가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와 마태(15:32~39)의 이야기는 거의 비슷한데 마가복음 2~3절에는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의 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무리가 나와 함께 지낸지가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불쌍하구나. 만일 내가 그들을 굶주린 채 집으로 흩어 보낸다면 길어서 쓰러져 버릴 것이다.”
2.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데 기본이 되는 것이 ‘의식주’입니다.
이것을 구하는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이것만이 인생의 목적이 된다면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피조물과 비교하여 인간다운 삶이란, 의식주의 문제를 뛰어넘는 그 무엇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금수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금수만도 못한 사람들이 금수보다 낫다고 착각하는 세상입니다.
3.
“빈들에서...구할 수 있겠습니까?(4)”
그는 이미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똑같은 질문은 합니다.
이것을 통해 과거에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인간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면 이미 받은 바 은혜가 충만함에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고난의 때에 더 큰 고난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반드시 극복할 수 있음을 믿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4.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와서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표적을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바알세블을 들먹이거나 다른 핑계를 대면서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을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어떤 복음의 소식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눈도,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도 닫혀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들에게 어떤 표적을 보여주어도 믿지 않을 것을 아셨기에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5.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서로 다른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해하고자 하는 일에는 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소한 조항에 집착하면서 율법의 본래의미를 떠나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못하고 표적(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만을 구했습니다.
헤롯의 누룩은 그의 악덕과 음행, 살인, 하나님의 종에 대해 악의를 품고 있는 것 등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6.
가버나움 가까운 곳 서편 벳새다는 베드로와 요한의 고향이며, 오천명을 먹이신 곳이기도 합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눈 먼 사람을 만납니다. 이번 기적에서 특이한 점은 시력이 점차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단계적으로 치유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신앙도 단계가 있습니다.
그 한 단계를 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를 넘은 이들에게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뭔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아직은 조금더 훈현하고 나아가야 하는 단계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단계를 이겨나가면 뚜렷하게 신앙이 무엇인지 보일 것입니다. 보임으로 믿음것(히브리서 11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단계 한 단계 잘 넘으셔서 확고한 믿음을 가지시길 기도합니다.
7. 새기며 묵상하기
◾예수님의 표적을 고깝게 여기던 바리새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그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이미 우리 일상에 하나님의 기적은 편만합니다. 단지, 우리가 눈을 뜨지 못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소서.
말씀요약과 한 문장의 기도
p.s) ‘코로나19’가 더 확산되지 않고 진정되게 하시고, 한남공동체가 함께 예배하는 기쁨을 속히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교우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더욱더 열심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