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영성
출 33:12-14 / 요 14:6
지난 주일 오후에 강단 위에 올려두었던 카라를 계단 쪽에 내어놓고 물을 흠뻑 주었습니다. 지붕 공사를 해서 비 가림이 좋다 생각했는데, 카라를 놓고 보니 카라가 자라기에는 더없이 좋은 자리입니다. 새벽예배를 마친 후, 카라를 보니 꽃잎과 이파리 끝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일액 현상’에 의한 이슬입니다.
▪일액 현상이란?
제 몸에 남는 물을 배출하는 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슬 중에서 가장 맑습니다. 이슬은 수증기가 기온 차로 응고되어 생기는 이슬이 있고, 비가 내린 뒤에 생기는 비이슬이있습니다. 그리고 겨울에 성에나 눈 같은 것이 얼어있다가 아침 햇살에 녹아 이슬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만, 모두 일액 현상으로 만들어진 이슬보다 맑지는 않습니다.
식물의 일액 현상을 통해서 어떤 상징을 봅니까?
내일 목이 마를지라도 오늘의 필요만 간직하는 것이 식물입니다. ‘내일의 염려는 내일에 맡기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또한, ‘비움의 영성’입니다. 비움의 영성은 소유, 채움으로써 삶의 승패를 좌우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비움의 삶이요, 비움의 영성이요, 그래서 거듭남의 영성입니다. 카라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면서 느낀 단상들입니다.
▪카라의 재발견
그런데 카라를 보다가 꽃잎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꽃술을 보다가 이와 비슷한 식물을 떠올렸습니다. 천남성이라는 식물인데, 천남성 꽃에도 선명한 줄기가 있어서 곤충이 꽃술까지 길을 잃지 않고 찾아오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이유는 향기가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향기로 곤충을 유인하지 못할 뿐 아니라 벌이나 나비 같은 곤충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개미 같은 곤충들이나 그를 찾습니다. 그러니 곤충이 한 마리라도 오면 지극정성으로 안내합니다. 길을 따라 길죽한 꽃 안으로 들어온 곤충은 그들이 좋아하는 ‘엘리이오솜’이라는 물질을 정신없이 먹습니다.
엘라이오솜은 특히 개미가 좋아하는데, 제비꽃 씨앗을 감싸고 있는 것이 엘라이오솜입니다. 제비꽃 씨앗을 창고에 쌓아둔 개미들은 씨앗 겉면에 있는 엘라이오솜만 먹고, 나머지 음식물쓰레기에 해당하는 씨는 집 밖으로 버립니다. 씨앗을 옮기는 과정에서 흘린 것들과 그들이 먹고 버린 씨앗에서 제비꽃은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비꽃 씨앗은 날개가 없어도 사방팔방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남성과의 식물이나 카라 같은 종류의 꽃들은 곤충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차려진 곳에는 길이 없습니다. 음식을 먹은 다음 곤충들은 길이 없어 어디로 갈지 당황하게 됩니다. 당연히 몸부림이 심해지고, 그러는 사이 꽃은 수정합니다. 수정을 마치고 나면, 꽃잎 아래쪽이 열리고, 곤충을 밖으로 떨어집니다. 참으로 신비한 식물의 세계죠. 카라도 모양새를 보니 식물학적으로 천남성과에 속할 것입니다. 천남성의 열매는 빨갛게 익는데, 아주 먹음직스럽지만, 독성이 강해서 절대로 먹으면 안 됩니다. 과거에 재래식화장실에 구더기가 끌면 천남성 열매를 따서 두어 개 집어넣으면 구더기가 전부 죽었다고 합니다. 독성이 강한 친구죠.
▪ 길
요한복음 14장 6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짧지만, 그리스도교의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진리는 주저리주저리 길지 않고, 아주 간명합니다. 그 진리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길, 진리, 생명으로 표현된 말씀은 모두 ‘예수’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영생’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를 믿는 자는 그를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을 보시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입니다.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 = 생명’, ‘생명=진리’, ‘진리 = 예수’, ‘예수 = 길’ 이런 도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동양에서의 길은 ‘도(道)’입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길 위에서’, 즉 ‘일상의 삶’에서 득도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길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그 길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영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광야
요한복음의 ‘길’은 그냥 ‘길’이 아니라, 출애굽의 ‘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의 이 길과 구약성경의 이 길은 서로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을 들으신 후, 그들을 광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광야’가 의미하는 바는 ‘험한 길’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에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에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 간절히 구합니다. 이미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이니 30년 이상 광야생활을 했음에도 아직도 ‘주의 길’을 보지 못했고, ‘주의 백성’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세에게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가시는 길이요, 그 길은 쉼의 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실현됩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광야생활’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내가 친히 가리라 = 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 = 그 길을 따라 내게로 오라’ = ‘예수님께로 오라’. 결론, ‘쉼, 안식’.
‘길’에는 이런 관계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라 ‘험한 길’이고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좁고 험해도 그 길이 ‘생명의 길’이므로 ‘기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협착하고 찾는 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쉬운 길, 쉬운 짐
마태복음 11장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나 위대한 성인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오상(五傷)의 영성’에서 말씀드린 대로, 오상은 예수님이나 성 프란치스코 같은 성인만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충분히 우리의 일상에서 새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까?
‘비움의 영성’입니다.
소유하는 영성이 아니고 존재하는 영성입니다. ‘가난의 영성’이라고도 하고 ‘거룩한 가난’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만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음의 창고’를 비우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8장 24-25절에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가 더 쉽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 말씀을 왜곡하기도 하고, 이단 중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전 재산을 다 바치라고 겁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묻겠습니다.
“마음의 창고를 비운 백만장자와 돈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한 걸인’ 그중 누가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누가 더 가난한 마음을 가진 것일까요?”
가진 게 많다고 반드시 집착이 더 많은 것은 아닙니다. 또 가진 게 없다고 꼭 집착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잣대는 ‘재산의 총액’이 아니라 ‘집착의 총액’이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힘을 빼야 합니다. 욕심과 집착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창고를 비우지 못합니다. 운동선수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힘을 빼라, 어깨, 팔, 손에 힘을 빼라!”
‘비움의 영성’은 우리를 ‘길’로 인도합니다. ‘길’은 곧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진리’이므로,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것이 곧 ‘영생의 삶’이요, ‘구원의 삶’입니다. 이 길은 험난한 길이지만, 예수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이요, 함께 하시는 길이므로 쉽고 가벼운, 누구나 걸어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을 걸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