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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의 기도(잠언 30:7-9)

  • 관리자
  • 2017-03-03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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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의 기도(사순절 1주 오후-/20170303/봉사단 헌신예배)
잠언 30:7-9

 

천상병 시인은 <귀천(歸天)>이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아름다운 시를 읽고 천상병 시인(은 참으로 멋지게 생긴 분이셨을 것이라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귀천하여 ‘아름다웠더라 말하리라’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참으로 그 삶도 행복했을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진을 통해서 만난 그분은 멋지게 생기지도 않았고, 살아생전에 죽음의 고비를 많이 겪기도 했고,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서 6개월간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자식도 낳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인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난 뒤에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다 알 수 없다.’는 당연한 깨달음을 깊게 새겼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임도 새겼습니다.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이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해가지만, 결국은 제 뿌리로, 온 곳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계절적으로 가을만 돌아가는 계절인 줄로 알았는데, 봄도 겨울에게는 돌아감의 계절입니다. 결국, 돌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옴이고, 온다는 것은 곧 가는 것입니다. 이런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도 물러섬과 나아감의 합일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러섬’이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주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나아감’이란, 하나님의 뜻으로 조율된 마음을 가지고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러서신 후에 그곳에 머무신 것이 아니라,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섬김과 나눔과 돌봄의 삶을 살아가신 것입니다.

 

길을 걷다 보면 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보도 블럭 사이에 피어난 작은 꽃 한 송이가,
어쩌다 서울 하늘을 나는 나비 한 마리가,
거리 육교나 계단 후미진 곳에서 주름진 손으로 달고나 만드는 할머니의 모습이,
폐지를 잔뜩 싣고 힘겹게 언덕길을 오르는 이들의 모습이 나를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그 멈추게 한 것으로부터 힘을 얻고 나는 다시 걷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반칠환(1964-)이라는 시인은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시인을 멈추게 하는 것은 작은 것이고, 눈물 겨운 삶의 풍경입니다. 그리고 이 사소한 것으로부터 삶의 힘을 얻고 다시 걷게 됩니다. 멈추어 설 줄 알아야 다시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것처럼, 물러설 줄 알 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물러섬이라는 미덕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독교인의 물러섬, 그것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 곧 ‘기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봉사단 헌신예배에서는 자신의 처지에 따라 달리 기도를 드린 세 사람, 야베스와 아굴과 예수님의 기도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 야베스의 기도(역대상 4:9-10)

야베스의 기도는 역대상 4장 9-10절에 나옵니다. 그곳에서 야베스는 유다의 후손이라 것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름 ‘야베스’를 통해서 ‘그의 탄생이 어머니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산고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 자체가 ‘고통’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에게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자기 삶의 지평을 넓혀주시기를,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 없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고 숙명론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일들도 많습니다. 야베스는 자기에게 덧씌워진 고통의 숙명을 벗어던지기 위해 노력했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리서 마침내 그는 숙명을 극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베스 같이 기도하고, 숙명의 너울을 던져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굴의 기도(잠언 30:7-9)

 

아굴은 하나님 앞에서 두 가지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는, ‘허위와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달라’는 기도요, 둘째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허위와 거짓말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또한, 필요한 양식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참으로 정직한 기도입니다. 아굴은 풍요로움이 주는 유혹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부유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 시대는 어쩌면 이 기도가 진실하게 드려져야 하는 시대는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 예수님의 기도(마 6:9-13)

 

마르틴 부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가리켜 ‘신의 일식’이라고 요약했습니다. 눈에 드리운 과도한 욕망이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했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기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도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기도하셨으며, 하나님의 뜻에 대해 토달지 않고 온전히 “아멘!”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결단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시길 원하셨고,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을 이 땅에 펼치는 도구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야베스의 기도, 아굴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가 모두 필요합니다. 이런 기도를 위해서 우리는 잠시 ‘물러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물러서고, 습관적으로 살아가던 일상에서도 잠시 물러서야 합니다. 그렇게 물러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관조’라고 합니다.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관조하는 행위가 바로 ‘기도’요,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조율해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소풍을 와서 행복하고 즐겁게 지내다가 돌아갈 곳임을 알아, 하루하루를 소풍 나온 듯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 결론

 

봉사단 여러분,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시간, 봉사하는 시간은 모두가 잠시 ‘세상으로부터 물러서 있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지요. 그 물러섬의 시간은 또한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시간이기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라는 영역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전역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물러섬과 나아감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삶은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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