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쓸모있는 연장인가?
(디모데후서2:20-21)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그릇’으로 표현한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하나 정성껏 피조물을 흙으로 직접 빚어서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창세기 22장 1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라는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를 그릇에 비유한 말씀이 많습니다. '질그릇' 또는 '토기장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말씀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 외에도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하는 말씀과 이사야서 64장 8절에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라는 말씀, 이사야 45장 9절에 ‘질그릇 조각 하나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툰다’는 내용 등이 있습니다.
흙과 금 중에서 더 귀한 것은 생명을 품을 수 있는 ‘흙’이라고 합니다. 호접난 분갈이를 하다 보니 흙은 하나도 없고, 나무껍질과 이끼 같은 것들과 스티로폼이 전부입니다. 그래도 개중에 오래가고 잘되는 것을 보니 거기엔 조금이긴 하지만 흙이 들어있습니다.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가는 존재가 덧없는 삶이 아니라, 다시금 생명을 품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가 있으니 영생의 삶에 대해 묵상도 하게 됩니다. 질그릇과도 같은 나, 그런데 돌아보니 내 삶의 목적은 '질그릇'을 치장하는 삶이었으며, 무모하게도 금 그릇이나 은그릇이 되지 못해 안달하는 삶이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 때문에 기뻐하고, 필요하다면 질그릇을 깨뜨려서라도 그 안에 감춰진 보배,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하는 삶을 살았어야 하는데, 보배는 안중에도 없고 질그릇, 언젠가는 깨어져 버릴 그릇을 치장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흙 수저 금수저 논란이 있는 사회지만, 김제동 씨가 청춘콘서트 토크 콘서트에 출연자로 나와 “금 없인 살아도 흙 없인 살 수 없다.”는 재치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의 말을 옮겨 봅니다.
우리가 흙 수저 금수저 논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금수저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생각하기 전에, 금수저보다 더 나은 것이 뭔가 있을까. 우리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부터 생각해봐야 합니다. 첫 번째로는 쪽수입니다. 머릿수가 월등하게 많습니다. 그래서 저것들은 외롭고 우리는 덜 외롭습니다. 이러한 자부심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난리를 치고 자기가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르고 설치면, 흙들이 가서 덮어버려야 합니다. 내일 아침 당장 금이 없어져도 살 수 있지만, 흙은 사라지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소중한 존재인 겁니다."
'토기장이'는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금 그릇이나 은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막사발을 만드는 사람이요, 항아리를 만드는 사람이요, 질그릇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의 특징은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나 나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늘 사도 바울의 탄식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간직한 보배 때문에’ 미완의 존재물지만, ‘완벽한 존재’로 살아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은 본질이 아니라 존재물이며, 질그릇 안에 간직한 것이 존재요, 본질입니다. 물론, 이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씀이긴 하지만, 존재는 신, 본질을 가리키는 용어요, 존재물은 존재, 즉 신 덕분에 존재하는 것들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보배를 빛나게 하는 삶이 아니라 허상, 겉으로 드러나는 존재물인 질그릇을 드러내고, 그것을 꾸미기 위해 살아가니 본질과 비본질의 가치전도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요, 그 때문에 우리는 비인간화된 삶을 강요당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주신 말씀 디모데후서 2장 21절에는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면, 토기장이의 목적대로 사용되는 그릇이 되려면 ‘자기를 깨끗이 해야’한다고 합니다. 개끗하게 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는데 ‘선한 일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일이란, 지난주 주일예배 시간에 마테복음 25장 31절 이하의 말씀으로 ‘영생을 얻는 비결’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던 바대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것과 연결해서 생각하시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훈련이 되어, 온전함에 이르게 되면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하나님도 좋아하시는 일이요, 자신이 싫어하는 일이 하나님도 싫어하시는 일인 사람‘, 그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선한 일, 그것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방법이요, 깨끗하여지면 귀하게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금 그릇, 은그릇이 되면 귀하게 사용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질그릇이라도 ‘깨끗하면’ 귀하게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말씀입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이 있다고 했습니다. '큰 집'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 상징성 중에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각종 그릇이 상징하는 바는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요, 직분을 맡은 이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어느 그릇이 더 우월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각 그릇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그릇이냐가 아니라 "깨끗하냐,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제주도에는 '골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육지로 치면 '호미'같은 것인데 굉장히 날렵한 것이 마치 작은 낫처럼 생겼습니다. 김을 매거나 조개를 캘 때, 해산물 채취를 할 때 아주 요긴하게 사용됩니다. 호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돌 많은 제주땅에서 호미는 별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골갱이가 연장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됩니다. 제주도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어떨까요? 오히려 골갱이라는 존재는 생소한 것이요, 일반적인 것이 호미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골갱이보다 호미가 안성마춤인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호미냐, 골갱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용도에 따라 사용하고자 할 때 준비가 되어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텃밭을 가꿔 교인들이 공동식사를 할 때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아주 기쁜 목회경험 중 하나였습니다. 돌이 많은 텃밭을 가꿀 때 골갱이는 필수품입니다. 교회에는 잔디밭이 있었는데 잔디의 뿌리를 다치지 않게 잡초만 쏙쏙 뽑아내는 데는 골갱이가 제격입니다. 바다에 나가 조개를 캘 때에도 골갱이가 아주 유용합니다.
그런데 간혹 골갱이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찾다가 못 찾으면 자루가 흔들거리는 골갱이라도 있으면 불편해도 그것을 사용하고, 호미가 있으면 그것을 사용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바로 들어 쓰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에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은 바빠요."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쓰시고자 할 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에는 시급한 상황입니다.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 못하더라도 다른 것을 들어 쓰실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그릇이든, 어떤 연장이든 그 종류가 무엇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깨끗한가? 준비되어있는가?" 이것이 중요한데 이 말씀을 바꿔 말하면 "지금 나는 쓸모 있는 연장인가?"하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옛날에 쓸모 있는 연장이었어, 또는 앞으로 쓸모 있는 연장이 될 거야!"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쓸모 있는 연장인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쓸모있는 연장이시길 바랍니다.
쓸모있는 연장은, 첫째로, 주인의 뜻에 따라 사용됩니다.
연장이 주인이 손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연장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자꾸만 우리의 뜻만을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도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주인의 뜻대로 사용되길 거부하고 주인을 움직이려는 연장 때문에 그리되었습니다. 한남교회는 하나님을 도구로 만드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용될수록 연장은 빛납니다.
한동안 창고 구석에 놓여있는 농기구들을 보면 녹슬고, 자루도 삭아버립니다. 그러나 주인의 손때가 묻은 연장은 비록 달았어도 녹슬지 않으며, 자루도 손때가 묻어 단단합니다. 지금 막 밭에 나가야 하는데 어떤 걸 쓸까요? 쓸모 있는 연장, 그것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에 사용되면, 주님의 도구가 돼 헌신하면 달아 없어질 것 같은데 더욱더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맛을 아는 사람들, 그 맛에 길든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하나님은 또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녹슬지 않고, 사용되지 않는 연장보다 더 오래 빛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손에 맞는 연장이 있습니다.
저 혼자 텃밭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가꾸고, 아이들도 흙을 만지게 합니다. 더군다나 교회 잔디밭은 교인들과 함께 가꿉니다. 그러다 보니 골갱이가 많이 필요해서 오일장에 나가 몇 개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과 함께 잔디밭에 잡초를 뽑을 때면 밭일을 별로 안 하는 교인들은 아무 골갱이나 들고 일하는데 늘 밭일을 하시는 권사님들은 집에 가서 자신이 사용하는 골갱이를 가져오십니다. 아무 표시가 없는 것 같은데 손에 잡아보면 본인의 것인지 아닌지 영락없이 아십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내 손에 쥐어지는 골갱이, 내가 찾는 골갱이가 있습니다. 그걸로 일하면 손도 편하고. 일도 능률이 오릅니다. 물론 다른 것을 가지고도 할 수는 있지만, 일꾼은 자기의 손에 가장 잘맞는 연장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손에 얼마나 잘 맞는 연장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손에 맞는 연장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 수많은 교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맞는 연장, 그래서 하나님 손에 들려 사용되는 연장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