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道) 2016-06-19/오후찬양예배
행 9:1-19
<소로우에서 랭보까지, 길 위의 문장들>이라는 책에는 ‘길’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윤희기라는 역자는 번역자 서문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나 하늘로 돌 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인은 지상의 삶을 ‘소풍’이라고 불렀고, 그 삶의 과정은 이 지상의 길을 걷는 ‘소풍’이었으며, 소풍 가는 길에 바라본 이 세상은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소풍 가는 길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온통 아름다워 보일 것이요, 숨겨진 보물을 찾는 설렘이 있는 삶일 것입니다.
‘길을 걷는 행위’는 ‘새로운 시작과 관련이 있습니다.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선 이스라엘,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를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했던 예수, 사울이 핍박하던 예수를 만난 다메섹 도상, 이 모든 길 위의 삶은 ‘새로운 시작’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길은 우리의 이상과 희망과 염원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문인과 철학자들이 길을 걸으며 사유를 시작한 것도 ‘길 위의 삶’이 ‘새로운 시작’과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길 위에서 길을 묻다>라는 책도 있는데, 결국 ‘길’ 위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1. 길은 ‘걷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는 그 책에서 ‘걷는 사람은 시간의 부자’라고 합니다. 빨리 가면 시간을 벌어 좋을 것 같은데 대충 지나치게 되고, 결국은 시간에 쫓겨 산다는 것입니다. 천천히 걷기를 통해서 이전에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던 것들을 만나게 됩니다.
길은 처음부터 길이 아니었습니다.
‘걷는 곳이 길이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요즘처럼 걷기가 뜸해진 세상에서는 있던 길도 없어집니다. 이젠 ‘길’이라고 하기엔 어색한 ‘도로’는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라 ‘자동차’를 위한 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인위적인 길이 아니라 구불구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물길과도 같은 길, 그런 길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누군가 걷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어 누군가 또 걸었습니다. 직선의 거리가 아니라 구불구불 이어진 길이지만 그 길이 걷기에 가장 좋은 길이었던 것입니다. 길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 걸어갔다는 것이요, 혼자 걷는 외로운 길이지만 그래서 외롭지 않은 것입니다. 길을 걸어갈 때에는 늘 동행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입니다. 그리고 앞서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상징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길은 이미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이며, 신앙의 선조가 걸었던 그 길입니다. 맨 처음에는 길 같지도 않은 길이었지만, 그들이 걸어간 길이 있었기에 우리는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걷기를 마칠 때 혹은 걷는 길에 내 뒤를 걸어오는 이도 있을 터이고, 보이지 않아도 내 앞에 걸어가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미 난 길을 걸어가지만, 동시에 그 길을 걷는 일은 길을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길을 길이게 하는 걸음이지요.
2. 막다른 길, 곁길을 걷는다면 걸었던 만큼 돌아와야 합니다.
길은 직선이 아닙니다.
이쪽에서는 출발이지만 저쪽에서는 끝일 수 있고, 길의 끝에는 늘 시작되는 길이 있습니다. 길의 끝, 그것은 바다 혹은 하늘 같지만, 거기에도 길은 있습니다. 상징적으로 보자면,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끝이 아니라 또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환상을 만납니다.
‘도상에서’,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러 가는 길 위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의 열정은 여느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로는, 예수를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 사울의 삶은 다메섹 도상에서 끝이 납니다. 그 삶이 끝나자 바울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그 길이 진리의 길이었기에 끝까지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신앙적인 확신이 강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되면 보수화되고 견고해집니다. 자기와 다른 신앙을 인정할 줄 모릅니다. 이것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이단이라 주장하는 보수기독교와 한기총 같은 단체에서 봅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왜곡된 사실을 신념화시켜서 비난하는 것은 바리새인(율법주의자)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2013년 부산에서 제10차 WCC총회가 열렸을 때 보수기독교단체와 교인들이 반대데모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대부분 왜곡된 사실들이었습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이들의 비방은 십계명중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9계명을 어기고 있는 셈입니다. 단순한 이웃이 아닌 같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거짓 증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WCC는 전 세계 140개국에 산재한 유수한 정교회와 개신교회들 349개 교단과 그 속에 속한 5억 6천만이 속해 있는 세계 최대의 연합기구이며 한국에서는 정통교회인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성공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정교회 대교구가 회원교회로 참여하고 있는 세계적인 교회연합기구입니다. WCC의 목적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로, WCC의 목적은 예수님의 최후의 기도의 핵심적 목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세상의 모든 인류와 모든 피조물이 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믿고 예수님 안에서의 일치를 이루고자 합니다. 둘째로, WCC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시고 장차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신앙운동입니다. 그 길을 가는 이들과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든 회의를 장시간의 토론에 거쳐 합의를 이끌어 냅니다. 어떤 의제는 몇 년씩 걸리기도 합니다. 그런 의제 중에서는 민감한 문제들도 있습니다. 일례로 성소수자의 문제, 동성애 문제 등도 포함되지요. WCC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아직 내리지 못했고, 여전히 토론 중입니다. 그런데 반대하는 쪽에서는 이런 것들을 빌미로 사탄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성숙한 모습이 아니지요.
목적지로 통하는 길을 여러 갈래 길인데 ‘오직 한 길’, 자신들이 걸어가는 길만이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이 걸어가는 길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는 곁길, 혹은 막다른 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로마서의 ‘오직 믿음’은 맞는 말이지만, 그 믿음의 모습이 획일적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양한 길이 있으며, 그 길 끝에는 또다시 시작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막다른 길목 혹은 경로에서 이탈한 길을 걸어갔다면 다시 그 길을 돌아 나와야 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 상징은 돌이킴이요, 회개입니다.
3. 길은 한문으로 ‘道’입니다.
도의 뜻은 이치, 근원입니다.
그리하여 옛 성현들은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길이 아닌데 길처럼 호도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단 사설이요 사이비입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걸어가 보지 못한 길을 걸어갔던 것처럼 말합니다. 그들의 모든 길은 ‘물신’이라는 ‘우상숭배’로 통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도 반성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곧 교회의 지위가 되고, 헌금액수에 따라 믿음의 척도를 재는 일은 없어져야 합니다. 그런 것은 정도가 아닙니다. 바른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지위나 헌금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작, 이런 중요한 문제에는 무관심하면서 혐오증을 유발하여 내부의 문제를 잠재워보려는 시도가 WCC같은 단체를 용공이단 단체로 몰거나, 사회적인 약자들을 향한 혐오증을 유발해 분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치에 어긋나지요. 도가 아니요, 길이 아닙니다.
부패한 정권이 위기에 처하거나 국론분열이 일어나면 국론을 하나로 모아 자신들을 향한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분쟁을 일으킵니다. 국가 간의 전쟁일 수도 있고, 인종 혹은 종교 간이 전쟁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혐오증을 유발하는 데 성공하면 부패한 정권은 자신들의 정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어떤 중요한 문제들을 덮기 위해 연예인의 추문을 뉴스로 도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3S인 SPOTRS, SEX, SCREEN은 권력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통치수단이지요. 이런 점과 WCC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증오하는 것은 닮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도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는 이들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이단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명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처단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는데 오늘 1절 말씀에 보면 ‘살기가 등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그가 걸어가던 그 길이 잘못된 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은 그가 걷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를 핍박하던 사울을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그릇으로 택하였습니다(15). 예수님의 환영을 만난 후 눈에 비늘 같은 것이 씌워졌던 사울의 눈에서 비닐이 벗어지는(18) 것은 이제 그가 새로운 눈으로 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드디어 그는 길이 아닌 길, 이치에 맞지 않는 길을 벗어나, 제대로 된 길을 걸어갑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을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도’라고 표현했습니다. ‘도’란 곧 ‘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진리는 십자가로 통하며, 십자가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걸어갈 길을 가늠하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안식은 ‘쉰다’는 뜻이 있습니다. 무엇에서 쉬는 날입니까? 단순히 노동을 쉬는 날이 아니라,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쉬는 날입니다. 안식일만큼은 세상의 지위도 내려놓고, 세상의 근심 걱정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런 쉼을 통해서 ‘올바로 사는 것이 무엇이구나!’ 깨달음을 얻는 날입니다. ‘내려놓음’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평안함이 곧 영적인 경험이며, 그것이 지속되는 것을 영적 생활이라고 합니다. 주일은 이렇게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돌아보는 날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날들은 그 깨달음을 삶으로 살아가는 날입니다.
길을 걷는 것, 그것은 걷겠다는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은 가볍게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가볍습니까? 오래 걸어도 걸을만합니까? 무겁다면 비우십시오.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걷는데 거추장스러운 것은 무엇인지 구분하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시인의 노래처럼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