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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자설교 - 흙(土)

  • 관리자
  • 2016-06-12 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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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土) 20160612 오후찬양예배
창세기 2:4-9

 

바위에서 흙이 1㎖가 만들어지는 시간은 400년, 양질의 흙이 되기까지는 2천 년에서 2만 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생명의 키워내는 흙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흙의 사전적인 의미는, 지구의 표면을 덮고 있는, 바위가 부스러져 생긴 가루인 무기물과 동식물에서 생긴 유기물이 섞여 이루어진 물질입니다. 동식물에서 생긴 유기물이 섞여 각종 식물에 영양분을 품고 있는 것이지요.

 

‘흙’이라는 단어는 개역성경에 88회가 등장하는데 연관단어까지 포함하면 더 많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과 욥기 34장 15절에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창세기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존재가 인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을까?

흙 말고 다른 재료, 예를 들면 더 단단한 철이나 광물로 만들어도 좋았을 터인데 흙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흙으로 만든 것은 깨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다른 이유는 흙의 속성입니다. 흙은 생명을 키워냅니다. 생명을 품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땅’을 가리켜 ‘어머니’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깨어지기 쉬운 존재지만,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성서에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고, 토기장이의 소용대로 그릇이 만들어진 것처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소용에 따라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지어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작품이 되려면, 그가 사용하시고자 하는 대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의 다른 말은 이른바 ‘자존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웅현의 <여덞단어>라는 책에 자존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러합니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어떤 운명이건 어떤 위치에 있건 네가 처한 너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 자존이다.

 

남들과 다르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드는 환경에서 자존감을 가지고 살려면 스스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삶의 기준점을 바깥에 두고 남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안에 두고 나를 존중하느냐? 현실은 각 세대별로 살아야 할 상자에 살기를 강요합니다. 그 상자 바깥으로 나가면 손가락질을 하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나를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운명’이라는 말을 개인적으로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작품’이란 관점에서 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건 어떤 사람이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 역시도 그런 존재 중 하나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선이 아니라 자존감, 상대방을 넉넉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흙으로 만든 것은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점입니다. 즉,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연약함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것들을 도우시고, 그들을 대신해 간구하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가시는 분이십니다. 강한 것들을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것을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연약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겸손해집니다. 무기력함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이들과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가 아니라 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하는 것은 ‘더불어 삶’의 가능성입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합니다. 경쟁의 사회가 만든 폐단입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밟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을 선인 것처럼 포장한 사회입니다. 이른바 물신의 사회인 것이지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연약함까지도 부둥켜안습니다. 연약함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연약함, 인간이라는 존재가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흙에 대해 묵상하면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일과 관련하여 저주를 받은 뱀이 ‘흙을 먹을지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상징적인 내용이고, 실제로 뱀이 흙을 먹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창세기에 등장하는 뱀 역시도 우리가 보는 그런 뱀이 아니고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상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뱀이 흙을 먹을 것이다. 흙으로 만든 존재는 인간(다른 동물들도 있지만 대표적으로)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뱀은 끊임없이 인간을 유혹하고, 먹고, 인간은 뱀의 머리를 발꿈치로 밟는 관계가 지속할 것이라는 상징성입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처럼 되라는 유혹이 곳곳에 있지 않습니까? 에덴동산에서의 유혹이 일회성이 아니라, 인간이 이 땅에 살아가는 한에는 지속하리라는 상징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되게 해주겠다는 유혹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경쟁사회의 구도에 갇히면 이 일이 참으로 힘듭니다. 그 정도의 유혹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기고 싶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쟁구도에서 벗어난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에서, 자연의 흐름을 보면서, 자연을 닮은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신비함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경쟁구조의 사회가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고, 자신의 삶을 피폐화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초 접사 사진들을 찍었습니다.

얼핏 보면 지나칠 수밖에 없고,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담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눈의 한계를 인식할 뿐 아니라,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들 혹은 내가 나쁘다고 판단한 것들이 진정 그러한지도 다시 돌아보며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흙에서 온 존재요, 흙으로 돌아갈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허무합니까? 아닙니다. 흙이 생명을 피워낸다는 점에서, 생명을 품는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니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삶이나 죽음 이후의 삶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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