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너게에서 사랑의 사도로 요한회헌신예배(20160320오후)
마가복음 3:13-19
오늘 오후찬양예배는 요한회 헌신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헌신’이란, ‘몸과 마음을 바쳐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헌신예배’는 몸과 마음을 바쳐 힘을 다해 드리는 예배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헌신예배라고 하면, 순서를 맡고, 특별찬양하고, 강사를 초청해서 강연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헌신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예배를 통해서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고, 마음을 다잡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을 따서 지은 경우가 많습니다. 요한회도 그럴 것입니다. 성경에 요한은 세례요한과 사도요한이 나오는데, 누구일까 여쭤보려다가 세례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사람인 사도 요한 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사도 요한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 살펴보면서, 요한회에 속해있는 모든 회원들이 사도 요한을 본받아 살아가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권면하고, 요한회를 통해서 한남교회가 예수님의 뜻을 이뤄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사도 요한은 누구인가?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1인으로 그 이름의 뜻은 ‘예수님은 의로우시도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요한복음, 요한서신, 요한묵시록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학자는 요한복음의 저자는 요한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이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달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당시 풍미하던 영지주의자 마르키온의 가현설을 반박하기 위해서 쓰인 것입니다. 가현설은 이원론에 입각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두 가지로 나누어 하나는 선하고 하나는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흑과 백, 하늘과 땅, 영과 육, 낮과 어둠, 남과 여, 삶과 죽음 등입니다. 그 중에서 어느 하나만 선한 것인데, 문제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더러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도 문제지만, 영생의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도 이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의 화육도 십자가의 죽음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영지주의’라고 하는데, 오늘 날에도 영적인 것을 너무 좋아하시는 분들이 빠져서 교묘한 이단사설에 빠져서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요한계시록은 영적인 언어가 가득한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95년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초대교회 탄압정책에 의해 파트모스(밧모섬) 섬으로 유배되었을 때 쓴 책입니다. 이듬해 도미티아누스가 죽자 곧 사면되어 에베소에 돌아와서 요한복음과 서신을 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쓸 때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초대교회를 탄압하는 로마제국 황제의 명에 따라 유배지에 와 있습니다. 엄중한 시절이지요. 이런 시절에 대놓고 로마황제나 로마제국에 대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요한묵시록은 상징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은 그런 상징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오늘날 요한계시록은 성경 중에서 가장 해석하기 난해한 성경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강의도 많고, 해석도 다양하지만 문제는 ‘요한계시록’을 강조하는 이들 중에 자기의 해석을 너무 확신하면서 이상한 길로 바지는 분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을 반박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육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밝히고, 그리하여 십자가 사건도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세세하게 다뤘는데, 요한묵시록에서는 영적인 이야기만 하니 저자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 요한은 야곱의 아들로 마가복음 3:17절에 보아너게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있었으니 과격하고 욱하는 성격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마태복음(20장)을 통해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랐던 진짜 이유를 알 수 있는데, 혁명을 통해서 로마제국을 무너뜨리면 각각 예수님의 오른 편과 왼 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사도 요한이 쓴 것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일부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다혈질이고 과격하고 욱한 성격의 사도 요한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제를 담은 요한서신을 썻다는 것도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톨릭에서는 기독교 성인으로 12월 27일 축일로 지키고 있으며, 동방정교회에서는 5.8일을 축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의 바탕에 서있는 개신교에서는 기독교 성인들이 우상화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심지어는 중세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비잔티움에서 꽃 피웠던 'icon성상‘까지도 우상이라고 배척한 결과로 개신교회의 상징물은 예순의 형상이 없는 십자가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인 예술 활동과 우상숭배를 동일시하는 데서 온 부작용이었습니다. 상징들이 갖는 종교적인 측면들과 영성적인 측면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 예) 스위스 칼빈박물관 뒤편의 성베드로성당
서론이 조금 길었습니다만, 사도 요한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하고 증거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아 유배를 당한 상황에서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묵시록’을 남깁니다. 요한회가 이렇게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하고 증거하는 모임이셔서, 요환회를 통해서 한남교회가 든든히 서가길 바랍니다.
2. 요한은 인격적으로 신뢰의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이었다.
요한복음 19장 26-27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마리아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하시고, 요한에게 “이 분이 너의 어머니시다.”고 하십니다. 이때부터 요한은 임종 때까지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고 합니다. 내 어머니의 아들이 되어달라는 것, 그것은 예수님이 요한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요한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신뢰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차마 다 하시지 못한 일을 맡기시고, 여러분은 그 일을 이루시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동역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시고, 여인들이 부활의 소식을 알리자 가장 먼저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는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다가 베드로가 먼저 들어가게 했습니다. 아마도, 누가 예수님의 오른 편에 앉을 것이냐는 다툼 끝에 예수님께서 섬김의 도를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이후에 요한의 삶이 변화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윗자리에 앉기 좋아했던 요한이 겸손한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젠 일인자가 아니라도 괜찮다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요한에게는 영안이 열렸습니다. 요한복음 21장 7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 오셨을 때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개역성경 21장 7절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할 적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바로 요한입니다. 요한은 성령강림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서 포교활동을 활발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갈리디아서 2장 9절에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을 ‘교회의 기둥’이라고 합니다.
요한회 여러분, 교회의 기둥이 되길 바랍니다. 교회의 기둥이시되 겸손함으로 섬기시어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여러분을 신뢰하시고 일을 맡겨주실 귀한 선교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3. 요한의 삶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요한은 ‘천둥의 아들’이었으나,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임이라”는 것도 복음의 핵심이지만, 요한서신을 통해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요한의 설교 주제는 ’항상, 서로 사랑하라!‘이었답니다. 그런데 매일 같은 말을 반복하니까 신도들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같은 말만 한다하자 요한은 ”사랑은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사도가 된 요한은 100년 경 90세의 나이로 사도 중에서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편안히 임종했다고 전해집니다. 요한회 여러분, 선교회의 이름을 요한회라고 한 이유는 요한을 본 받아 요한처럼 살고자 함이 아닙니겠습니까? 요한이 사랑의 사도였던 것처럼, 요한회가 한남교회 사랑의 사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