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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을 만들지 못한다(출애굽기 20:1-17)

  • 관리자
  • 2016-03-13 08: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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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을 만들지 못한다(출애굽기 20:1-17) 한남교회 오후(20160313)

 

1. 우상이란?

'idol''=우상/ 이것은 그리스어 eidos에서 온 것으로 '모양'이나 '형상'을 뜻하는 말인데, 이 말의 어원은 eidlon으로 이미지만 있고 빈 것, 헛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빈 것, 헛된 것을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의 우상인 'idol', 무엇을 보고 왜 그렇게 열광합니까? 껍데기만 보고 그토록 열광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내면을 보지 않고,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보지 않고, 오로지 화려한 겉모습만 봅니다. 그들은 통해서 자신들 내부에 있는 욕망이나 불만 같은 것들을 대리만족 합니다. 그래서 ‘idol’은 대중에게 소비되는 이미지가 되어갑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는 없고, 결국 인기가 떨어지면 절망하게 됩니다. 이게 오늘날 idol의 초상입니다.

 

히브리어로 우상은 ‘페쎌’이라고 하는데 뜻은 ‘새긴 형상, 빚은 형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라는 단어는 우리 현실에서는 ‘배타적인 종교언어’로 주로 사용됩니다. 우상숭배라고 하면 우리는 주로 제사, 단군상, 부처상 등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단군상 목을 자르고, 부처상을 훼손하거나 사찰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거나 페인트로 붉은 십자가 낙서를 하는 것 등을 신앙적인 행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상이라는 의미가 그런 것일까요?

 

우상을 섬긴다는 것, 그것은 한 마디로 헛것, 실체가 없는 빈껍데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란, 인간 자신을 위해 스스로 만든 것을 마치 신처럼 숭배함으로써 그것(짐승 bestia 계13:17)에게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상숭배란,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의탁하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탐욕을 취하려는 행위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는 말은 이제 우상이 형상을 넘어서 우리 마음에 내재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탐욕에 빠지면, 맹목적으로 채우려 합니다. 이런 탐욕에 빠지게 된 이유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상숭배를 단순히 외적인 형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2. 불안한 인간

왜 우상을 만들까요?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보니 늘 불안합니다.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온 이후, 인간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불안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거한 땅은 '에덴의 동쪽' '놋(nod)'이었습니다. 놋이란 히브리어로 '방황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제애를 깨뜨리고 살아가며 방황하는 인간군상은 모두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이란 '안식 없음, 편안함 없음'이라는 뜻입니다. 왜 편안하지 않고, 안식이 없을까요? 그것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이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고,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에도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지리적인 좌표를 물은 것이 아니라,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은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라는 말씀이며, "왜 너는 형제애를 나누며 살아가야할 자리를 깨뜨렸느냐?"는 실존적인 질문인 것입니다.

 

불안한 인간, 그는 그 불안을 대체할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찾습니다.

그래서 재물을 가지면 덜 불안할 것 같고, 명예나 권력을 가지면 덜 불안한 것 같습니다. 불안을 덜기 위해서 1)외적인 대상을 소유하려고 하며-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 2) 사람에게 집착하며-사랑은 집착이 아니다, -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사람이 취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런 소유의 방식을 성공했다고 부추기고, 어떤 종교는 이런 소유의 삶을 채워주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3. 소유냐, 존재냐?

일찌감치 에리히 프롬은 <소유나 존재냐?>라는 책을 통해서, 소유하는 삶이 아닌 존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만이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에서, 소유의 삶이 추구하는 거대한 것, 맘몬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작은 것과 소소한 것들 속에 참된 아름다움이 들어있음을 말했습니다.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소유하고 집착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더욱더 인간을 불안하게 할 뿐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런 삶에 빠져 사는 이들의 주인이 되고, 마침내 불안을 이런 식으로 해소하려고 하던 이들은 그들의 노예가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소유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면, 누가 누구를 소유한 것인지 지혜롭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간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이 다시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지 않으려면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에 거하려면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4. 안식일 법은 인권선언

불안의 반대말은 안식입니다.

고대근동의 도시의 신들은 모두 지배 권력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계급사회를 합리화하고, 노예는 노동력을 획득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지배 권력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그들의 질서였습니다. 만신전(판테온)이나 오벨리스크, 피라미드 같은 것들이 그런 입장들을 공고화하는 역할을 했으며 스스로 위계질서를 내면화하게 하여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만신전은 말 그대로 ‘만 가지 신’을 모신 곳인데, 신마다 주특기가 있고, 다스리는 지역이 있고, 신들 사이에 계급이 있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최고신은 ‘제우스’입니다. 신들 사이에도 위계질서가 있는 것처럼, 인간들 사이에서도 당연히 위계질서가 있다는 것을 내재화시키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오벨리스크나 피라미드는 어떻습니까?

오벨리스크는 태양신 Ra를 숭배하기 위해서 만든 탑인데, 24M자리 오벨리스크를 하나 만들려면 사람들이 일렬로 24M 늘어서서 정으로 쪼아 만들어야 하는데 무려 7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매일매일 뙤약볕 아래 앉아서 정으로 돌을 쪼는 것이죠. 피라미드는 말할 바도 없지요. 그러니 고대근동에서 노예로 살아간다는 것은 노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아주 어릴 적부터) 죽을 때까지 안식 없이 죽도록 일만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5절에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는 말씀이 이해가 가시는지요.

 

5. 노예의 삶에서 해방시키시는 하나님

그런데 유일하신 신이라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그는 도시의 신이 아닌 광야의 신이요, 지배 권력의 신이 아닌 합비루의 신이요, 유일한 신이십니다. 유일신이시니 신들 사이에 계급 같은 것들도 필요 없으며, 모두가 그의 피조물이니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평등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한, 노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안식도 없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죽이라고까지 한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인권선언’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이유들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으면 우리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그들을 옭아매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돌 판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5. 신앙의 신비

종교란 무엇입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말씀처럼, 건강한 종교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옭아매는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옭아 매였다’는 것은 ‘사로잡힘’ 혹은 ‘중독’과 같은 말입니다.

오늘 우리를 무엇이 사로잡고 있습니까? 골로새서 3장 5절에 있는 것들이 아닙니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없이 사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놓아버리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없이 살아보니까, 놓아버리니까 홀가분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맛볼 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탐욕(소유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탐욕을 버리면, 그것이 곧 ‘우리의 속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을 깨끗하게 했다는 것은 ‘외식하는 신앙’이 아니라는 증거요, 우리의 신앙이 ‘헛되지 않다’는 증거며, 깨끗하기에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채워지면 불안이 사라지고, 잔잔한 바다와 안전한 포구처럼 평온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우상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골로새서에 나오는 우상들은 모두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을 대할 때, 단군상이나 부처상 같은 것들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보다도 더 일차적인 것은 ‘내 안에 있는 우상’이며, 사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우상’과 평생 싸워도 부족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상은 빈 것, 헛것, 껍데기입니다. 이것을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우상에 매이면 우리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섬기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가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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