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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계시지 않는다(2)

  • 관리자
  • 2016-03-27 08: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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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계시지 않는다(2) 한남 오후예배(20160327)
마가복음 16:1-13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2절에 ‘안식 후 첫날’은 오늘날의 주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무덤을 찾은 이유는 1절에 있는 대로 향료를 시신이 바르기 위함이었습니다. 향료를 바르는 일은 무덤에 안장하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인데, 이렇게 안장하고 난 뒤에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장례가 서둘러 치러졌음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재판과 처형과 장례식 모두 속전속결입니다. 악한 일은 이렇게 속전속결로 이뤄진다는 상징을 여기에서 봅니다. 그에 반해서 정의로운 일은 그 결실을 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악이 득세하는 이유입니다. 악한 일은 과정을 생략하고, 선한 일은 과정을 중요시합니다.

 

자연을 보십시오.

절대로 과정을 건너뛰면 제대로 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화약 비료와 유전자조작과 항생제로 만들어진 농산물과 축산물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돈을 버는 것은 땀 흘려 일하는 농부가 아니라 ‘독약의 군주’에서 ‘생명공학 사업가’로 변신한 몬산토 같은 대기업입니다. 다이옥신, 고엽제를 생산하던 화학기업 몬산토가 성장호르몬을 개발하고 유전자조작 씨앗을 만들어서 자신들이 만든 화학비료와 씨앗이 아니면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합니다. 과정을 생략하고 만들어진 농축산물을 먹는 인간, 그 인간이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든지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결과로 열매가 맺든지 부끄럽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조금 느리고, 답답하고, 성과도 적은 것 같겠지만 그래서 좁은 길이요, 사람들이 많이 걷지 않는 길입니다.

 

무덤, 그것의 상징은 악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가두는 무덤, 죽음 같은 곳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할 천사와 같은 이들을 예비하셨습니다. 천사는 무덤에서 예수를 찾은 이들에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을 가리켜 줍니다. 그러자,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두려워합니다. 공포심을 느꼈습니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벌벌 떨며 넋을 잃었습니다. 천사가 전해준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가 무덤에 없다는 사실, 갈릴리로 가셨다는 사실은 진실입니다. 그 진실 앞에서 인간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을 대면한 인간, 그것이 진실일까 두려워하는 인간을 봅니다.

진실을 보는 순간은 두려운 순간입니다. 그 진실과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이겨내야 하고 극복해야 할 두려움입니다. 진리를 대면했을 때 생기는 두려움을 잘 극복하시어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믿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귀신에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몸을 보이셨으나 믿지 않았고,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던 이들 역시도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으며 보이셨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죽음을 슬퍼하던 이들 중 두 사람에게 다시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이 두 사람이 남은 제자들에게 알렸으나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진리는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여인들과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예견하셨음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도 없는 현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기적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래서 오늘날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들은 넘쳐나지만 신실한 신앙인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믿지 못하는 것은 같습니다.

 

여러분은 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스스로 ‘믿는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자신이 만든 신을 믿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그러면 자기가 만든 신을 ‘예수’라고 했다고 해도 예수가 아닙니다. 너무 쉽게 믿는다고 하지 마십시오. 고민하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제자 중에서 의심 많은 제자로 알려진 도마가 있습니다. 의심이 많다기보다는 솔직한 신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날에는 추호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이들보다 믿기가 더 어려운데도 말입니다.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의 전제조건은 죽음입니다. 죽음, 고난에 파묻히는 것도 바람직한 신앙이 아니지만, 그것 없이 부활의 영광만 좋아하는 신앙도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님은 부활절마다 축하를 받았습니다. 그런 축하의 자리 속에서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우리의 부활이 아니겠습니까? 무덤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부활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신앙적인 행동일 것입니다.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계시지 않는 곳에서 예수님을 찾지 말고, 빈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지 말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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