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수요성경공부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11강 만찬 12강 세상 다시 그리

  • 관리자
  • 2023-06-28 10:20:00
  • hit537
  • 58.122.40.57

지난 시간 복습

 

  - 스캇 교수는 주인과 청지기 모두 불의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자가 금지된 율법이 지켜졌기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졌다고 주장합니다.

 - 김창락 명예교수는 예수 당시 불의하게 축적한 부를 청지기가 불의한 방법(횡령)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올바르고 평등한 관계를 만들었기에 주인(예수)이 칭찬했다고 해석했습니다.

 -  담임목사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라는 말씀에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나누는가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용서하지 않는 종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희생 담긴 용서(사랑)를 가르쳤습니다.

  - '용서하지 않는 종은 헤아릴 수 없는 용서를 입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넘치는 그 나라를 살아야 할지 가르쳐 줍니다.

 

11강 만찬

 

저자는 오늘의 이야기가 복음서에서 세 가지의 형태로 남아있다고 알려줍니다. 누가복음, 도마복음 그리고 마태복음입니다. 누가복음과 도마복음은 유사하지만, 마태복음은 조금 변형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마태복음의 이야기를 살피고 누가복음과 도마복음으로 넘어갑니다. 마태 공동체는 오늘의 이야기를 알레고리로 해석했습니다. 누가복음과 도마복음에서는 그냥 잔치였는데, 마태복음에서는 혼인 잔치이며, 나라의 임금이 주인공입니다. 첫 번째 초대한 이들이 거부하자, 왕은 큰 화를 내며 군대를 동원해 살인자를 처벌하고 동네를 불살라버렸습니다. 이런 표현은 마태 공동체가 로마의 유대 학살을 경험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첫 번째 초대받았던 이들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초대를 거절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했던 예언자들마저 괴롭히고 때리며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로마에 의해 민족 전체가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두 번째 초대받은 이들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였습니다. 마태 공동체는 교회가 아무나, 만나는 대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이야기에서처럼 쫓겨나 슬피 우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마태 공동체는 예수의 이야기를 1세기 팔레스타인의 상황(마태 공동체의 상황)에 맞춰 알레고리로 해석했습니다.

 

 

  누가복음

 

저자는 누가복음과 도마복음을 비교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서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누가 공동체는 처음 초대받았던 이들의 거부보다 다음에 초대받은 이들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누가복음엔 두 번째로 초대받았던 이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이야기를 꺼낸 장소는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이었고(1), 그곳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상석(윗자리)을 골라 앉는 것을 보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합니다(7~14). 저자는 예수가 처세의 지혜를 도덕적 진술로 바꿨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당시 사회의 인식과 반대되는 지혜 즉, 역설적인 지혜의 예가 오늘의 이야기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다음에 초대받은 이들이 가난한 사람, 시각 장애인 등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공동체 역시 알레고리로 해석해 처음 초대받은 이들을 유대인으로 보았고, 다음에 초대받은 이들 즉,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공통점과 다른 점

 

저자는 세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의 공통된 부분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해석을 풀어갑니다. 만찬을 베푼 주인(부자)의 목적은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초대받은 이들이 참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 만찬에 초대받은 이들은 이를 거부합니다. 주인이 냉대받고 수치심을 느낄 만한 상황입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모두 주인은 크게 화를 냈지만, 마태복음은 그들이 겪었던 유대 학살로 이야기를 풀었고, 누가복음은 아무나(잔치에 참석해도 자신의 명예가 높아지지 않는 사람) 초대합니다. 공통점은 주인의 명예가 크게 실추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공동체나 마태 공동체는 주인의 초대를 하나님 나라의 초대로 여겼고, 처음 초대받았지만, 거부한 이들을 유대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초대된 이들을 초기 기독교 공동체로 보았습니다. 다만, 달랐던 점은 누가복음은 그들의 관심에 맞게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로 풀었고, 마태복음은 새로운 형태로 변화한 교회(기독교)로 풀었다는 점입니다.

 

  진짜 이야기

 

저자는 예수의 잔치 이야기가 엘리트 세계가 아니라 길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잔치의 주인공임을 지적합니다. 당시 상황에서 예수가 마태복음의 이야기처럼 유대 학살을 알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해석이 예수의 진짜 이야기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바리새인의 지도자가 연 만찬에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잔치에 초대되어 서로 상석에 앉으려는 이들은 그들의 욕망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 나라엔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갈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는 가르침이었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날카로운 비판이었습니다. 뒤이어 등장하는 오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 귀족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켜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고 하나님 나라(구원)에 당연히 갈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 잔치를 외면했고, 그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했던 이들(가난하고,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갈 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2강 세상 다시 그리기

 

저자는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예수의 비유를 연구했습니다. 우리가 이 책으로 처음 공부했을 때, 저자는 예수를 유대인, 갈릴리 사람, 농부(소작농)로 유형화했습니다. 예수가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 제안한 하나님 나라(저자는 대안이라고 말함.)의 단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그가 몸담았던 예수 세미나에서 역사적 예수가 말했을 가능성이 높은 비유를 좌표로 삼아 책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면 예수가 다시 그린 세상(대안)의 이미지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 책의 제목이 ‘Re-Imagine the World’입니다).

 

  좌표1: 누룩 이야기

 

저자는 누룩 이야기를 시작하며, 하나님은 불결하다는 다소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누룩 이야기를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눠서 생각합니다. 문장의 차원에서 누룩 이야기는 빵을 만들기 위해 반죽에 누룩을 넣는 여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몇 가지 보이는데, 하나는 여인이 누룩을 숨긴다는 것이었습니다(도마복음). 그리고 반죽의 양인데, 밀가루 서 말이었습니다. 이는 일상에서 빵을 만든다기보다 연회(잔치)를 위해 준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차원이 나오는데, 누룩 이야기가 하나님 나라의 은유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누룩은 부정적인 이미지였습니다. 시신이 부패하는 모습이 떠올라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누룩 없는 빵이 신성한 이미지였습니다. 여기서 긍정적이었던 요소는 밀가루 서 말이었습니다. 이를 듣고, 저자는 누룩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이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세 나그네를 대접하는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로부터 이삭이 탄생할 거라는 이야길 들었고 그는 세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보니 누룩 이야기는 한 여인의 일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잔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누룩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남았습니다. 예수는 누룩이 사라졌다는 기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불결하다는 뜻일까요?

 

누룩의 이미지를 상쇄하고자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빵의 크기(누룩으로 인해 작았다 커지는)를 근거로 처음엔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식으로 비유를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을 불결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불결하다는 생각은 예수의 행동을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습니다.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죄인으로 여겼던 병자와 유대인에게 비난받았던 세리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셨습니다. 그가 당시 사회의 기준으로 신성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원했다면, 유대 귀족이나 바리새인과 어울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가난한 자와 병자 그리고 세리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리고 유대 귀족이나 바리새인이 아닌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의 이런 행동과 가르침은 가난하고 병든(사회에서 차별받고 배제되었던)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부자가 되고 병이 낫는 것을 뛰어넘어 그들 자체로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당시 가난과 질병을 하나님의 저주 혹은 징벌이라고 여겼던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화육) 성과 속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하신 것처럼, 예수의 삶은 당시 죄인을 정하는 기준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죄는 폭력이나 절도 같은 개인의 죄가 아닌 사회적 의미로서의 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런 행동과 가르침은 당시 지배계층이던 유대 귀족과 바리새인들에게 커다란 도전이고 위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자부하던 자신들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여겼던 이들의 편이라는 가르침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좌표2: 빈 항아리 이야기

 

빈 항아리 이야기는 손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곡식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들고 가던 여인은 손잡이가 부서져 곡식이 새는 걸 알지 못했고, 도착해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새 비어있는 모습으로 비유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예언자 엘리야를 만난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는 빈 항아리 이야기와 대척점에 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기근 탓에 죽을 위기에 놓였지만, 예언자 엘리야의 제안대로 진행하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빈 항아리 이야기는 모든 것이 채워졌다가 끝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항아리가 다시 채워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개입 없이 오히려 하나님의 부재와 같이 여겨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빈 항아리 이야기를 누룩 이야기와 비교하며 하나님 나라가 당시 소외된 사람들, 여성, 불결하다고 여겨졌던 사람들과 일치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오면(누룩이 부풀어 올라 빵이 되면) 그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사라진다(빈 항아리)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지만, 이미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이 부재하지만 현존한다는 역설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부자가 되는 기적은 없었습니다. 병자들의 병이 나아도 그들이 다시 사회 속으로 예전처럼 돌아갔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하나님 나라는 그들 속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포할 때도, 그들을 부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기적을 만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겨자씨 이야기와 씨뿌리는 이야기에서도 그런 기적(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하는)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전제적인 힘을 휘두르는 모습은 로마의 황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로마의 팍스 로마나와 대척점에 있습니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그가 주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선전하는 팍스 로마나와 당시 사회적 약자가 중심에 서는 하나님 나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저자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묵시문학(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이야기)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와서 그들의 욕망이 채워지는 기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당시 청중들의 통찰력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치유와 기적을 행하는 자기의 모습을 보고 왕적 메시아를 떠올리는 이들에게 이 능력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당시 예수의 적대자들은 그의 능력이 사탄에게서 왔다고 비난했기에 예수의 행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뤄졌다고 하는 주장을 바르게 판단할 통찰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좌표3: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

 

저자는 이야기의 주제를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봤습니다. 누가 공동체가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모범 이야기로 본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을 근거로 한 일종의 알레고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사마리아 사람을 좋은 이웃으로 보는 이방인의 관점이 아닌 예수 당시 유대인 청중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유대인에게 사마리아 사람은 잠재적인 적 혹은 나쁜 사람이며 누룩 이야기의 누룩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더 나아가 당시 사회적 관계가 아닌 대인 관계를 경쟁과 갈등이라고 말하며 청중이 강도 만난 유대인으로 보고 사마리아 사람을 조력자 혹은 영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의 후견인은 될 수 없기에 당시 경쟁적 사회 환경과 관계없는 새로운 관계를 그렸다고 주장하고 그 관계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저자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식사가 이런 모습을 잘 드러냈다고 보았습니다. 굶주림과 기근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함께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협력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묵시적인 미래(새로운 세상의 모습)가 아니라 지금 함께 식사를 나눔으로 일어나는 협력이 가난하고 병들어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실제로 이뤄져야 할 변화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에서 살기 어려운 어른이 아닌 어린이에게 더 적합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로마 황제(부와 권력을 가진)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존재는 식민지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어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자는 그래서 예수가 꿈꾸는 새로운 공동체를 새롭게 구성되는 가족에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모습은 피를 나눈 직계가족이 아닌 새로운 가족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당시 가족 내에서 전권을 누리는 권위적이며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탕자들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머니 같은 모습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당시 아버지가 지닌 권위를 모두 내려놓고도 두 아들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아버지가 누릴 것은 잃었던 작은아들이 돌아온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는 이야기를 통해 경쟁과 갈등이 아닌 희생과 사랑으로 새로운 사회(하나님 나라)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당시 지배자(유대 귀족, 바리새인)들은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인물로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더 나아가 그가 가르친 기도에서 빚을 탕감하라고 하고(아람어로 죄와 빚은 같은 단어) 빚 때문에 땅을 잃고 쫓겨나는 당시 유대인들의 상황에서 불의함을 지우며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혁명적인 일을 벌였습니다. 사회에서 규정한 죄인(더 나아가 그들이 적으로 간주하고 욕했던 이방인)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동등한 존재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저자는 앞서 정한 세 좌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상은 듣는 이들이 경험한 새로운 세상이었다고 봤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이지만, 그들의 욕망이 모두 반영된 사회는 아니며, 사회에서 차별하고 배제하는 책임은 그런 행동을 한 이들에게 있으며, 하나님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죽음/ 상징으로서의 제국/ 반역자 예수

 

이제 저자는 예수가 왜 죽임을 당했는지 살핍니다. 이유는 세 좌표에서 보이는 당시 유대 귀족을 위시한 유대 지배층과의 갈등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 비유되는 정결함은 누룩으로 인해 불결해졌고, 그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당시 로마제국과 비교되었으며, 공생애로 인해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많아졌기에 빌라도 총독은 유대 사회의 갈등과 불안 요소가 로마의 통치에 위협이 될 거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경쟁과 갈등 속에서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며 체제에 순응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경쟁과 갈등을 없애고 평화를 이루는 모습이었기에 로마가 바라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이야기(비유)의 핵심입니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면 예수의 가르침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단서는 하나님 나라는 제국주의(로마제국)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나 솔로몬 시대의 유대와도 달랐습니다. 예수가 가르친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은 당시 사회에서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웠던 것은 당시 사람들은 로마제국과 다른 모습임에는 공감했지만, 다윗이나 솔로몬 시대의 유대를 떠올리며 예수를 그 나라로 이끌 지도자의 모습으로 상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당시 청중이 예수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봤습니다. 보통 이야기(비유)‘AB와 같다라고 얘기하는데, 예수의 이야기는 ‘AB 같은 C와 같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청중은 예수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는 실패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사람들도 예수의 이야기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뜻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씩 고쳤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예수의 의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처음 해석할 때부터 알레고리가 등장했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로마제국과는 달랐지만, 같은 의미 구조로 해석되었습니다. 결국 예수가 우려했던 왕적 메시아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남았고, 이는 로마의 유대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예수의 이야기는 본래 의도(사회를 전복하는 비유로서의 의미)는 상실되고 제국적 의도(체제를 지지하고 순응하는 이야기)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저자는 예수가 왜 급진적인 방법을 택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여 그가 어떤 사회를 꿈꾸었는지 입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저자는 그를 혁명가나 사회운동가가 아닌 시인에 더 가깝다고 말합니다. 혁명가나 사회운동가는 시인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변화가 창조적 개인이 꿈꾸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꿈꾸는 세상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지만, 대신 그가 반대했던 세상을 파악하는 게 더 쉽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인들을 억압했던 율법에 반대했고, 불의한 로마제국의 질서에 반대했습니다. 또한 폭력적인 방법을 쓰는 것에서도 반대했습니다. 그의 변화는 밖이 아닌 안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자는 예수의 꿈이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체제를 바꾸는 게 아니라 지배 체제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폭로하는 모습에서 시작되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상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묵시적인 모습(하나님이 왕인 나라나 기독교를 세우는)이 아니라 유대교 안(당시 사회에 반대하는)에 머물렀다고 봤습니다. 이렇게 예수는 이야기(비유)를 통해 반역을 꾀했고 그 이야기는 청중이 기대하는 세상(-세상)을 꿈꾸게 했습니다. 그 결과가 십자가로 이어졌어도 당시 예수는 지배했던 사회 체제를 교정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예수의비유새로듣기 #버나드브랜든스캇

 

* 위 글은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교재인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버나드 브랜든 스캇 저)'를 요약 및 첨가해 발제한 것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