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금주의 설교

수요성경공부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9강 불의한 청지기 10강 용서하지 않는 종

  • 관리자
  • 2023-06-21 09:47:00
  • hit629
  • 58.122.40.57

지난 시간 복습

 

  • 탕자들은 예수가 적대자들에게 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탕자들에서 아버지는 한 아들만 편애하지 않고, 두 아들 모두 사랑하였습니다.
  • 하나님, 큰아들을 유대교, 작은아들을 기독교로 여기는 것은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지양해야 할 해석법입니다.
  •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를 사는 기쁨을 보여줍니다.
  • 탕자들에서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잘못을 윤리적으로 문제 삼는 것은 올바른 해석에서 어긋납니다.

 

9강 불의한 청지기

 

저자는 오늘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두 가지의 관습적 생각을 들었습니다. 하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자를 하나님으로 여기고, 다른 하나는 당시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산을 횡령당한 부자의 입장에 공감하기에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에 어떤 숨은 뜻이 있는지 골머리를 앓는 것입니다. 부자는 왜 자기 재산을 축낸 청지기를 칭찬했을까요?

 

고대의 노력

 

오늘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본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 바로 뒤에 붙은 8b~13절과 관련해 C. H. 다드라는 신학자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는 여기서 이야기에 대한 세 가지의 독립적인 설교를 위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시도는 8b에 나오는 세상의 자녀빛의 자녀에 대한 설명을 곁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도는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에서 사용된 방법으로 매우 일찍 덧붙여진 것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세상 사람들과 교회 사람들을 구분해서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에 나오는 방법도 다른 관점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여긴 것입니다. 두 번째 시도도 땅과 하늘이라는 대비되는 주제로 푸는 방법인데, 첫 번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 번째 시도는 15장의 세 이야기(‘잃은시리즈)와 연결 짓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경의 장과 절이 구분되어 15장과 16장을 구분하지만, 예전엔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공동체는 오늘의 이야기를 예수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정의 일부(9:51~19:27)로 보았습니다. 저자는 잃은 아들의 이야기와 불의한 청지기의 이야기에 비슷한 점이 있다고 봤습니다. 잃은 아들과 청지기는 자기에게 위임된 것을 횡령했고, 아들은 굶주려서, 청지기는 해고당함으로 죽을 위기에 빠졌습니다. 아버지의 용서와 주인의 칭찬은 아들과 청지기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를 연이어 배치한 후에 자기만의 해석을 덧붙이고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19~31)로 넘어갑니다. 저자는 151~2절에서 불평하는 바리새인14~18절에서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의 배치가 예수가 죄인과 사귀는 것,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용서 그리고 바리새인을 거절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편집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저자는 누가 공동체가 어려운 이야기를 풀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고 있기에 바른 해석을 위해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의 노력

 

저자는 여러 학자가 이야기를 정확히 알려고 노력했지만, 세부 내용이 생략되고 압축된 이야기를 정확히 알기 어려울뿐더러 당시 상황에 관한 정보도 없어서 이를 이해하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분명히 지적한 부분부터 시작합니다. 땅의 주인은 부자였으며, 빚의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그곳에 살지 않는 로마의 지주들이 땅을 크게 소유했고 날로 그 규모가 커졌습니다. 라티푼디움이라고 불리는 대농장 형태로 땅이 운영되었습니다. 갈릴리의 농민들은 세금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빚을 질 수밖에 없었는데, 농사가 잘 안되어 소출이 적으면 얼마 되지 않은 땅을 뺏기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유대에 살지도 않는 지주들의 땅은 커져만 가고 그들은 땅을 관리하기 위해 청지기를 고용했습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조선의 노비로 여기면 안 됩니다. 이들은 당시 글도 읽을 줄 알며 주인의 일을 돕는 고급 인력이었습니다. 오히려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마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지주에게 위임받은 권한으로 전횡을 일삼으며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오늘 이야기에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늘려야 함에도 오히려 낭비한다는 소문으로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해고의 위기에 처한 그는 사문서위조와 회계 조작을 통해 주인의 재산을 더 잃게 했습니다.

 

회계

 

이야기는 부자의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에 그 자리를 잃게 될 위기에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소문이 났다는 말의 원어인 그리스어는 디아발레인으로 속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저자는 이 말을 부당하게 고발되었다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청지기에게 별말 없이 일을 그만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청지기는 단 한 마디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그에게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대리자로 그 역할을 해왔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그곳에 살지 않는 로마의 지주들이 청지기(대리인)를 통해 갈릴리 사람들의 땅을 빼앗고 그의 재산을 늘려가는 모습에 불만이 가득한 상황이었습니다. 땅을 빼앗긴 사람들은 로마 지주들의 대농장에서 일하거나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가 유대를 지배하는 것도 화가 나는데, 땅마저 빼앗기니 불만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로마 지주들이 운영하는 대농장은 당시 경제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는 작물만 재배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생존과는 전혀 관련 없이 그들의 대농장은 오직 돈을 위해 운영됐던 것입니다. 그런 일에 앞장설 수밖에 없던 청지기는 보이지 않는 주인 대신으로 여겨졌고, 이들에게 불만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청지기는 로마의 지주로부터 쫓겨난 것입니다. 그 이후 청지기는 어떻게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요? 땅도 없고 돈도 없는 상황에서 땅을 파는 노동을 할 수도 없고, 남의 자선에 기대 빌어먹는 것은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됐습니다. 사람들의 인식도 부정적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주인에게 빚진 자의 이자를 탕감해주어 이미지를 개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횡령했음에도 오히려 그를 칭찬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주인은 왜 청지기를 칭찬했을까요? 칭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불의한 청지기를 어떻게 칭찬할 수 있었을까요? 어떤 부분이 청지기가 슬기롭게 대처했다는 것일까요?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횡령해서 해고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슬기롭게 대처했다며 칭찬받았습니다. 물론 청지기가 빚의 이자를 탕감해주어 빚진 자들의 인심을 다시 살 수 있었고, 주인에게 피해가 크지 않았다면 그동안 그가 가져다준 엄청난 이익을 봤을 때, 크게 나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지기도 주인에게 가져다줄 엄청난 이익으로 인해 생긴 그간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고 사람들에게 호의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주인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기꾼

 

저자는 청지기가 한 행동은 생존을 위해 한 행동이긴 하지만, 자기를 해고한 주인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보고 청지기를 사기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간 받은 마음의 상처와 저지른 일을 바로잡기 위해 법의 한계를 넘어 복수를 감행했다고 봤습니다. 불의한 주인에게 복수를 했다고 해도 그 행위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유대에서 이자는 법(토라)으로 금지되어 있었는데, 상업의 발달로 조금씩 바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자 금지 규정은 생활필수품에 대해 이자를 받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지배계층은 토라를 교묘히 빠져나갈 방법을 마련했고, 이후 그들은 더 과감하게 부를 축적했습니다. 저자는 지배계층의 못된 욕망에도 불구하고 토라는 지켜졌기에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부자 농부

 

저자는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부자 농부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주인과 청지기의 불의한 행동을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는 방식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폅니다. 근거로 창세기 41장에 나오는 요셉의 한 일화를 언급합니다. 이집트의 7년 풍년 이후 7년 흉년을 예상한 요셉은 풍년 때 큰 창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 이후 흉년의 시기에 자기 가족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노예로 판 형제의 행동도 옳지 않았지만, 흉년을 예상한 요셉이 그 정보를 모든 사람에게 공유하지 않은 것 역시 옳은 행동이라고 보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을 팔았고, 그의 선견지명에 의해 살게 되었습니다. 부자 농부도 요셉처럼 풍작 속에 더 큰 창고를 짓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습니다. 큰 재산으로 즐기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했던 부자 농부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 셈이 됐습니다. 저자는 풍년 이후 이어질 흉년에 많은 사람이 부자 농부의 재산을 나눠 갖게 될 거라고 예상하곤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다고 봤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는 처음 들을 땐 이해할 수 없는 억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에서도 이뤄진다는 이야기로 봤습니다.

 

조금 다른 해석

 

한신대 김창락 명예교수는 1절에 등장하는 부자와 8절에 등장하는 주인을 다른 인물로 봤습니다. 8절에 등장하는 주인의 원어인 그리스어 퀴리오스를 주인이 아닌 ()’ , 예수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는 그가 불의한 빚을 탕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청지기의 살려는 의지에서 나오는 기민함과 슬기로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청지기가 한 행동의 내용이 아니라 기민함과 슬기로움이 칭찬의 근거였다면, 어떤 나쁜 짓이라도 수행 방법만 탁월하면 괜찮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자인 스캇 교수가 8절 초반까지를 진짜 예수의 이야기로 보고 이후 8b~13절을 후대에 덧붙인 해석이라고 봤던 반면 김 교수는 9절까지를 진짜 예수의 이야기로 봤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본받아야 할 모범 이야기로 봤는데, 다른 학자들이 이 이야기를 모범 이야기로 보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김 교수는 당시 상황을 봤을 때, 부자는 가난한 이들의 상황을 이용해 노동력을 착취하고, 빚을 주며 땅을 강탈했습니다. 만약, 부자가 정당하게 자기의 노력으로 부자가 되었다면 그의 재산을 지켜야 하지만, 부당하게 착취와 강탈로 부자가 되었다면 그의 재산을 지켜주는 것이 옳은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래서 9절에 불의한 재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이 사라져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물이 사라지는 방법이 다소 충격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읽으니 9절까지 이야기가 잘 풀립니다. 김 교수는 예수가 불의하게 얻은 빚을 탕감해주는 청지기의 행동을 칭찬한 것은 당시 가치 체계를 전도시키는 혁명적인 선언이었다고 봤습니다. 이는 예수가 그들에게 당시 살고 있는 사회의 가치 기준이 아닌 전혀 새로운 가치 기준에 의해 행동하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10강 용서하지 않는 종

 

저자는 오늘의 이야기를 마태복음 1823~34절로 정했습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21~22절은 이야기의 앞부분으로서 제자 베드로와 예수의 문답이 이어졌습니다. 23절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34절에서 끝났습니다. 많은 학자는 35(혹은 34절까지)을 예수의 이야기로 보지 않고 마태 공동체의 편집으로 봅니다. 이야기의 흐름도 조금 다르고, 무엇보다 나의 하늘 아버지라는 표현이 마태 공동체가 주로 쓴 표현법이기 때문입니다.

 

조심하는 게 낫다

 

저자는 마태복음 18장 처음부터 시작된 예수와 제자와의 대화를 교회 질서에 대한 설교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다음 19장 시작(‘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서,’) 부분인데, 설교의 끝에 이런 표현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지 물었고, 예수는 어린이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답했습니다. 저자는 이런 모습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은 여전히 제국적인(로마)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얘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이야기 직전에도 용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뒤이어 베드로가 예수께 형제에게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는 일곱 번이 아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은 당시 유대의 수 개념에서 완전함을 의미했는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것은 용서의 횟수를 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그러면서 오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마태 공동체가 내린 비유의 결론(35)이 원래 이야기와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왜 그럴까요?

 

세 장면

 

오늘의 이야기는 크게 세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왕과 종 사이의 빚 이야기, 종과 동료의 빚 이야기 다시 왕과 종 사이의 두 번째 빚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왕과 종을 서로 비교할 수 있게 구성되었습니다. , 두 가지가 다른데 하나는 빚의 크기이고, 다른 하나는 용서를 구하는 이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저자는 이야기 속의 왕이 로마의 황제가 임명한 분봉왕을 가리켰을 것으로 봤습니다. 그 이유는 이야기에 나오는 돈의 크기 때문입니다. 만 달란트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천문학적 액수였습니다. 달란트라는 단위도 크고 10,000이라는 숫자도 크니 금액이 적을 리 없었습니다. 보통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지금 단위로 환산하면, 2023년 하루 최저 시급이 9,620원이니 8시간으로 계산하면 76,960원 약 80,000). 그러니 한 달란트는 48천만 원입니다. 그러니 만 달란트는 한 사람이 갚을 수 있는 금액은 아닌 셈입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로마가 세금을 거두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와 만난 사람들 첫 시간 기억나세요? 세리 삭개오 하면서 어떻게 로마가 당시 유대에 세금을 걷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직접 세금을 걷지 않고 가장 많은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겠다고 한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겼습니다. 일종의 최고가 낙찰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걷게 된 세리는 다른 하급 세리들에게 일을 맡겼고, 하급 세리들은 또 다른 하급 세리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이렇게 로마는 세금을 걷었고, 세리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유대 사람들의 고혈을 빼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왕인 주인과 종은 돈 많은 주인과 그 집 노비라기보다 왕과 그의 부하(관리)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후 저자는 로마 황제로부터 위임받은 분봉왕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자리를 얻고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는지 논했지만, 이야기의 흐름과 맞지 않아 생략하겠습니다. 저자는 분봉왕이 권력을 얻기 위해 벌인 사투를 근거로 예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왕을 떠올렸고, 빚의 크기를 통해 로마의 조세 도급제도를 생각했습니다. 당시 베드로와 제자들이 자비가 없고 자기 이익에만 혈안이 된 분봉왕을 떠올렸다면, 자신과 아내 그리고 자녀를 비롯한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갚으라고 한 명령이 당연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빚을 갚을 수 없었던 종이 말미를 주면 갚겠다고 무릎 꿇고 애원하자 마음을 바꾸어 그의 빚을 탕감해주고 그를 풀어주었습니다. 당시 왕은 냉혹하고 무자비했습니다. 특히, 자기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이 왕은 자비로웠습니다. 막대한 빚을 탕감해준 것입니다.

 

예상을 깬 건 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사실도 잊은 채 그는 동료의 멱살을 잡고 돈을 갚으라고 강요했습니다. 그의 동료도 조만간 갚겠다고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동료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감옥에 집어넣고 돈을 갚을 때까지 가뒀습니다. 그러자, 감옥에 갇힌 동료를 불쌍히 여긴 다른 동료들이 왕에게 이 종의 행태를 고발했습니다. 결국 왕은 그 종을 다시 불러서 내가 한 것처럼 너도 그랬어야 하지 않았느냐며 그를 처벌(감옥에 보냄)했습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었으니 아마도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저자는 왕의 극단적인 일 처리에 관해 경제나 정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명예를 손상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어 큰 벌을 내렸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왕이 종을 용서하면서 나라 전체의 빚을 경감시킬 생각이었지만, 종이 왕의 생각을 시작하지도 못하게 만든 셈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메시아적 맥락

 

저자는 오늘의 이야기를 1세기 갈릴리 유대인의 삶 속에서 이해하려면 이야기의 이면을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왕을 메시아로 보는 것입니다. 왕은 막대한 빚을 엄청난 용서를 통해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유대에는 희년법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뤄진 적은 없는 유명무실의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왕(메시아)으로 인해 희년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은 종이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왕으로 모든 권력이 모이는 이런 체제는 근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고 봤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유대 분봉왕처럼 위계질서 속의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고 욕망을 끊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누군가가 용서를 베풀거나 희년을 선포해도 모두의 희년이 되진 못할 것입니다. 결국 감옥에 갇힌 종의 동료들이 용서하지 않은 종을 고발한 것도 최고 권력자인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메시아가 왕의 권한으로 빚을 탕감해주는 희년을 이뤄내도 모두에게 희년이 되지 못한다고 봤습니다. 그 사고방식 자체가 로마의 것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는 이렇지 않다는 뜻으로 베드로에게 이야기를 전했다고 봤습니다.

 

조금 다른 해석

 

스캇 교수는 금액의 크기를 근거로 이야기 속 왕이 실제 로마 황제나 유대를 다스렸던 분봉왕일 것으로 봤습니다. 그러면서 역사적 근거(로마가 유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만 달란트를 배상금으로 요구했다는 요세푸스의 기록)를 인용하며 로마의 조세 도급제도와 후견인-의뢰인 제도를 덧붙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할 때, 로마 황제나 유대의 분봉왕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예가 없었습니다. 예수의 청중들이 대부분 당시 기득권자에게 핍박받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에 하나님 나라 이야기에서 왕은 실제 왕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가 실제 왕을 가리켜서 말했다면, 그의 잘못을 비판하고 허위를 폭로하는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당시 왕이 만 달란트나 되는 거액을 빚진 종을 용서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자도 언급했듯 만 달란트라는 금액은 왕과 종 사이에 실제 존재했을 금액이라기보다 가르치기 위해 든 예(‘하늘만큼 땅만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태복음 25장과 누가복음 19장에 함께 기록된 이야기(달란트 비유, 므나의 비유)를 보면 누가복음엔 실제 있었을 법한 단위로 소개되지만, 마태복음엔 이번처럼 엄청나게 부풀린 금액으로 소개되었기에 그 금액이 실제를 가리킨다기보다 교육적 의미가 있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마태 공동체는 예수의 이야기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고 편집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주로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가르치는 데 집중합니다. 예수를 훌륭한 율법교사의 모습으로 그립니다. 마태 공동체의 상황은 내부나 외부의 갈등과 분쟁이 많았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서로의 죄를 용서하라는 메시지로 전달하고, 더 나아가 35절을 통해 너희가 서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하지만, 마태 공동체의 상황과 예수가 이야기를 전달한 상황과 배경은 분명 달랐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희생을 담은 용서)이 먼저이고, 그 이후 사랑을 받은 우리에게 똑같은 사랑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마태 공동체의 가르침은 우리가 용서를 베풀면 하나님도 용서를 베풀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 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행동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5절의 해석은 마태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은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 엄청난 빚을 진 종을 용서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입은 종은 자기 동료의 빚을 용서해주지 않았습니다. 스캇 교수의 말처럼 제자들은 아직도 로마제국 혹은 유대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엔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는데, 정작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동료를, 이웃을 정죄하고 용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예수가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며 용서라는 의미를 가르쳐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생각해 볼 문제

 

  • 어려웠던 부분이나 궁금했던 점을 말씀해주세요.

 

다음 주 공부할 이야기

 

  1. 장 만찬(173~184, 성경 본문: 누가복음 161~8)
  1. 장 다시 세상 다시 그리기(185~218)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예수의비유새로듣기 #버나드브랜든스캇

 

* 위 글은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교재인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버나드 브랜든 스캇 저)'를 요약 및 첨가해 발제한 것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