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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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경공부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8강 탕자들

  • 관리자
  • 2023-06-14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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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복습

 

1. 숨겨진 보물은 예상하지 못했던 기쁨을 하나님 나라에 빗댄 이야기입니다.

2. 숨겨진 보물에서 가진 것을 팔아 땅을 산 사람의 행동을 윤리적으로 따지면 안 됩니다.

3. 사마리아 사람은 모범의 예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서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구분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4. 율법교사의 질문과 예수의 답이 맞지 않아 누가 공동체의 편집으로 봤지만, 김 교수는 이웃을 대상으로 보는지, 주체로 보는지에 대한 차이로 보았습니다.

5. 김 교수는 누가복음의 맥락이 아닌 실제 상황으로 여기고 율법교사의 위선을 공격하기 위해 사마리아 사람이야기를 꺼냈다고 주장합니다.

 

8강 탕자들

 

탕자들

 

미국에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다음으로 유명하고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 중 하나가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여러 예술작품에도 등장하는 이 이야기의 초점은 거의 둘째 아들에 맞춰져 있습니다. 먼저, 저자는 이야기의 배치를 살폈습니다. 누가복음에만 있는 오늘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잃어버린돈 이야기와 오늘의 이야기를 엮여 있고, 모든 세리와 죄인이 예수께 나아오며 예수의 적대자들은 불평을 터트렸다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소위 잃은시리즈의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저자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못마땅해하였다라고 한 말을 민수기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결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누가복음을 편집한 이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세리와 죄인 그리고 예수님의 적대자를 민수기 14장에 등장하는 히브리들 그리고 모세와 아론과 대조하려고 일부러 이야기를 배치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들이 야훼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던 것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모습을 이스라엘(유대)에 대해서는 거부하면서, 교회(그리스도교)의 편을 드는, 누가복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으로 봤습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대사(‘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를 근거로 이와 같은 해석을 따르지 않습니다. 큰아들이 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그의 것이 큰아들의 것이라면, 유대인들은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되고, 복음을 따라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야기를 풀 다른 실마리를 찾습니다. 결국,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 인물에 주목합니다. 아버지, 큰아들, 작은아들. 그런데 이런 구분마저 저자는 글이나 책으로 의미를 찾으려는 이들에게 중요하지, 말로 뜻을 전달했던 당시 방법과는 달라서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결국 저자는 다른 이야기를 찾습니다.

 

형제간의 전쟁

 

저자는 탕자의 이야기를 자식에 대한 편애를 드러내는 옛이야기로 봤습니다. 그래서 미드라쉬에 나오는 왕과 두 아들의 이야기, 1984년 영화 아마데우스’, 1992년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같이 가족 구조 속에 있고, 모든 문화에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미드라쉬에 나온 이야기에서 왕은 깨끗한 큰아들보다 더러운 작은아들을 더 사랑했고,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가족은 아니지만, 나이는 많고 타고난 재능은 없는 살리에리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난봉꾼이었던 모차르트가 등장합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도 형은 타고난 낚시꾼이지만 작은아들은 건달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세 이야기에서 큰아들()과 달리 작은아들(동생)이 부모(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개연성(실제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개연성 높은 이야기엔 가족의 생활과 사랑 그리고 이를 방해하는 경쟁이 있습니다.

 

저자는 오늘의 이야기가 비유의 형식에 맞춰 압축되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배경(핵가족은 산업화 이후에 등장했고 이전에는 거의 대가족 형태를 유지)과 등장인물의 상황(부자)을 고려하면 대가족이어야 하는데, 아버지와 두 아들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아버지는 가족 중에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아내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지 않은 자식들도 아버지 재산의 일부로 여겼고, 가족의 일에 있어서는 못할 일이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저자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 인물과 그 관계에서 실마리를 찾고자 합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가 받을 유산의 몫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저자가 사는 서양에서는 이런 행동이 진취적인 모습으로 비칠지 몰라도 동양에서는 부모가 죽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건 예의에도 어긋날뿐더러 배은망덕한 놈이라는 욕을 먹기 일쑤인 행동입니다. 저자는 고대에서도 동양처럼 여겼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더 나아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죽으라는 의미의 몹쓸 말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청중들은 최고 권력자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떻게 행동했을까?’ 쉽게 예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상을 뒤엎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당시 통용됐던 상식을 외경 중 하나인 집회서의 말씀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말인즉슨, 자식에게 의존하는 것은 명예의 오점이니 죽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권력(재산)을 양도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오늘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행동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오히려 집회서에서는 큰아들에게는 재산의 2/3를 주고, 나머지 아들들에게 1/3을 나누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자식에 관한 차별이 아니라 큰아들에게는 가족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당시에 아버지가 재산을 자식들에게 나눠준다고 할 때는,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죽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도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 두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아버지의 이런 행동은 사람들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은아들은 돈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때마침 그 지방에 흉년이 들어 생존을 위협받는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결국 그는 이방인 밑에서 일하게 되었고, 율법에 불결한 짐승으로 분류되어 피해야 할 짐승인 돼지를 키우게 됐습니다. 그는 단순히 가족들과 멀어진 게 아니라 율법과도 멀어졌습니다. 저자는 엘르아살의 예를 들어 그가 조상의 전통도 외면했음을 지적합니다. 작은아들이 더 갈 곳 없는 곳으로 추락하고 나서야 이야기는 다른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다른 흐름으로 이어지려면 작은아들의 회개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저자는 이를 회개라고 봐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회개의 징표가 보이지 않고 그저 제정신이 든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단지 자기가 처한, 궁핍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는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아버지의 일꾼들은 먹을 것이 남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그의 관심은 오직 생존에 달려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만약 그가 부유했다면, 회개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입니다. 둘째, 누가복음을 편집한 이들이 이 행동을 회개라고 봤다면 조금 더 정확한 단어를 써야 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초대 교부 성 어거스틴도 작은아들의 회개로 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작은아들은 자기를 아버지의 일꾼으로 써달라고 말해야겠다며 돌아갑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떠시겠습니까? 그간 그의 모습으로 보아 그의 회개와 복귀에 숨은 의도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보자마자 그를 측은히 여기고,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에 청중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그가 참 바보 같다 혹은 명예나 권위가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다운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예수께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은 여인을 예로 들 정도로 아버지는 권위나 권력은 본인에겐 없는 것인 양 행동했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제자인 시몬이 여인의 행동을 비판했을 때, 예수가 그들의 모습과 비교하여 시몬을 비판했던 것처럼 아버지는 작은아들에게 일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보여주듯,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며,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작은아들이 의도했던 아버지의 일꾼이 아니라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의 잘못을 묻지 않았으며, 회개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기독교 설교에서 이 본문을 복음의 메시지로 해석한다고 비판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 큰아들은 유대교, 작은아들을 기독교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작은아들을 유대교 혹 이스라엘로 봐도 올바르지 않은 해석입니다. 알레고리를 썼기 때문입니다.

 

이제 큰아들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저자는 큰아들을 중년의 남성으로, 아버지의 일을 잘 감당하고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일 것으로 예상합니다. 하지만 그는 잔치에 초대받지 못했고, 집 근처에 와서 아버지의 일꾼에게 묻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큰아들도 아버지의 권위와 결정에 반하는 행동을 감행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작은아들 때와 마찬가지로 큰아들을 달랩니다. 하지만 큰아들도 이번에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았다는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이 받은 모욕감과 상처에 울분을 토합니다. 이에 아버지는 다시 한번 자세를 낮춥니다. 저자는 큰아들에게 얘야라는 호칭을 써 친밀감을 나타내면서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고 말함으로써 큰아들을 달랬지만, 이 말은 자신의 모든 권위를 포기한 것과 동시에 작은아들에겐 큰 위협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경쟁

 

탕자 이야기는 오늘 처음 했던 일반적인 가족 이야기 중에서 형제간의 경쟁을 소재로 했지만, 기존의 유형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일반적인 이야기에서는 경쟁 관계가 해소되면서 극적인 결말로 끝납니다. 그래서 누가 공동체는 오늘의 이야기를 죄인/잃어버린 양과 작은아들을, 예수의 적대자와 큰아들을 비교하려는 의도로 배치했는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그 의도에서 벗어났습니다. 어떤 한 아들이 우위를 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형제의 관계도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가 일반적인 가족 이야기를 비틀어서 만들었다고 가정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런 예가 많았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유다의 형제들과 요셉과 베냐민이 그랬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예는 에서와 야곱일 것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였고, 삼촌이자 장인이 된 라반의 양을 훔쳐냈지만, 그가 선택받은 것은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그의 의지대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청중들은 이야기를 들을수록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두 아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처벌하는 대신 사랑했지만, 그의 명예와 위신 그리고 권위는 땅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어머니의 면모를 발견합니다. 작은아들을 기다리는 모습,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부둥켜안고 입맞춤하는 모습은 아버지라기보다 어머니와 잘 맞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아버지의 이런 모습이 당시 근본적인 남성적 위계질서에 도전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야기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바람대로 서로를 환영하고 함께 살 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갈등의 불길이 타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이 이야기를 한 의도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생각해 볼 문제

 

1. 어려웠던 부분이나 궁금했던 점을 말씀해주세요.

2. 다른 해석(한신대학교 김창락 명예교수)

 

김 교수는 저자의 의견처럼 잃은시리즈가 누가 공동체의 편집으로 배치되었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김 교수는 누가복음 15:1~2가 실제로 그러하진 않았을지라도 이런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봅니다. 무슨 말이냐면, 세리와 죄인 모두가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이지 않았고, 예수가 모든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하는 와중에 그곳에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가 투덜거릴 가능성도 적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했다는 것, 바리새인과 율법학자가 이를 두고 불평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 교수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잃은시리즈를 하나의 주제로 해석합니다. 잃음의 애석함과 찾음의 기쁨을 부각하면서 찾는 일의 귀중함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잃었던 것을 찾는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을 비판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비판하고 이들에게 경고하는 이야기로 해석합니다. ‘잃은시리즈 중에서 잃은 양은 마태복음 18장에도 나오는데, 이 둘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제자들이었지만,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교육적 의미를 담았지만, 누가복음에는 비판과 경고의 메시지가 담겼다는 것입니다. 또한, ‘잃은시리즈에 등장하는 대상인 양이나 아들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았다, 옳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작은아들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이야기의 초점은 그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2절의 말씀처럼,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잃었다 찾았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 참된 삶으로 인도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사회에서 버림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그들의 권리를 회복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적대자인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에게는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며, 죄인들을 차별했던 그들의 행동을 비판하며 그들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다음 주 공부할 이야기

 

- 9장 약은 청지기(141~156, 성경 본문: 누가복음 161~8)

- 10장 용서하지 않는 종 (157~172, 성경 본문: 마태복음 1823~34)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예수의비유새로듣기 #버나드브랜든스캇

 

* 위 글은 한남교회 수요성경공부 교재인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버나드 브랜든 스캇 저)'를 요약 및 첨가해 발제한 것입니다.

* 발표자는 허준혁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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