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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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경공부

출애굽기산책(27) - 우상이란 무엇인가?

  • 관리자
  • 2017-04-26 07: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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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산책(27) 우상이란 무엇인가?
출애굽기 32:1-6

 

▪우상숭배의 근원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사십일 사십 야를 보내는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돌판에 계약의 내용을 새겨주셨습니다. 십계명,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으로써 그 계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 십계명의 내용 중에서 1계명은 나 외의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이며, 2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생겼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뎌지자, 백성은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 32:1)고 요구합니다. 그 요구에 아론은 백성에게 ‘금’을 가져오게 하여 ‘금 송아지의 형상’을 만들어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 하며, 그 앞에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곳에서 먹고 마시고 뛰노는(32:6)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판에 직접 새겨주신 계명이 도달하기도 전에 그들은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게 되는 시점을 보면 ‘두려움 혹은 공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잊게 해 줄 ‘그 무엇’을 인간을 요구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 실체를 가진 것이어야 합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불안함을 극복하고자 할 때에는 ‘보이는 것’으로 대체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숭배의 근원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성화상 파괴운동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승인한 이후, 330년 콘스탄틴황제는 1453년 오스만 술탄 마호메트 2세에 멸망하기까지 무려 1,123년이나 존속한 비잔티움제국을 세웁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성당에는 강렬한 원색과 황금으로 치장된 성화상이 즐비했습니다. 8세기에 ‘성화상 파괴운동’이 있었는데, 이 사건의 시작은 성화상이 우상이냐, 아니냐의 문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예수의 화상뿐 아니라 사도들과 마리아, 성인들의 성화상(아이콘)을 공경하는 일이 일상화되었습니다. 7세기경에는 이것이 일상화되는 과정에서 스스로 제작한 성화상을 성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화상들을 숭배하기 시작하면서 부작용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성상물을 가정집 문설주나 식탁, 외양간 등에 붙이고, 휴대용으로 제작하여 여행을 다닐 때 가지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이 악령을 쫓고 병을 치유하며 예언 능력과 복을 가져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레오 3세는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는 명분을 내세워 모든 성화상을 우상으로 단정하고 배척하는 종교정책을 수립합니다. 그러나 당시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는 <성스러운 성화상을 옹호하는 논문>을 통해서, 성화상을 반대하는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혐오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성화상 파괴론자들을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오랫동안의 논쟁과 갈등의 과정을 거쳐 843년 성화상 공경이 동방정교회 안에서 공인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와 다른 견해를 보였던 서방교회는 ‘성화상의 장식적 사용은 허용하지만, 성화상의 신적 숭배는 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가 유지하고 있는 성화상에 대한 입장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화상 혐오증’이라고 할 만큼, 성화상 배격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모든 형상을 금지하는 유대교의 전통과 아주 유사한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조금 세세하게 설명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 사도와 성인들의 모습을 그린 성화상마저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역사적인 논란을 고려하면, 무엇이 우상인지 가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새긴 우상’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페쎌’이며, 직역하면 ‘새긴 형상, 빚은 형상’입니다. 석재나 금속으로 조각하거나 흙을 빚어서 만든 어떤 모양을 뜻합니다.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0장 5-6절에서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이 계명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구절에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다른 곳에 무게를 두게 되면, 자칫 과격한 성화상 파괴자들처럼 종교적인 예술작품 자체도 부정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의 핵심은 예술행위의 금지에 있지 않고 숭배행위를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상숭배 금지란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을 마치 하나님처럼 숭배함으로써 그것들의 노예가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우상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단지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신처럼’ 숭배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얼마 전, ‘진돗개’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병을 고친다고 자녀를 학대하여 숨지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간혹, 기도원 같은 곳에서도 일어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들을 통해서도 일어납니다. 이런 경우, 진돗개는 만든 형상은 아니지만 ‘우상’입니다. 형상은 없지만, 안찰기도를 한다고 악령을 축출을 빌미로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하는 기도로 사람을 때려서 죽이는 일 역시도 우상숭배입니다.

 

‘신이 아닌 것을 마치 신처럼 의지하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탐욕이라는 우상

 

‘마치 신처럼’ - 여기엔 ‘맹목적’이라는 의미와 ‘탐욕적’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 없이 맹목적으로 의탁하면서, 자신의 탐욕을 취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2계명의 서두에 “너를 위하여”라는 말이 전제된 것입니다. 즉, 너의 욕망을 위하여 섬기면, ‘하나님이라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으며, 그 탐욕은 결국 우상숭배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탐욕은 ‘신에게로 돌아감’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에게로 돌아가면 당연히 우상숭배는 없겠지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우상숭배의 시작인 ‘탐욕’이 아주 교묘하게 우리의 일상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15:4-8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편 115:4-8).

 

두려움이나 공포라는 감정을 없애기 위해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는 것은 오늘날 시편에서 ‘은과 금’으로 우상을 표현했는데, 은과 금에 해당하는 ‘맘몬(물질주의)’이라는 우상으로 대표됩니다. 소위, 신자유주의 질서는 이 맘몬을 기초로 세워졌으며, 이 질서에 따라 움직입니다. 맘몬의 질서를 위해 인간은 소모품으로 사용됩니다. 우상은 교묘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은 ‘우상’이야말로 ‘최고의 신’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그 우상이 최고의 신이 아니라면, 자신의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할 수 없으므로 옳고 그름을 떠나 맹목적으로 신봉합니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속입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 들어와 있는 우상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예 종교가 다른 이들보다도 더 큰 문제는 ‘그리스도교’라는 우산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교를 뿌리로 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부르며, 그리스도교의 경전을 사용하면서도, 심지어는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과 삼위일체를 고백하면서도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기는 이들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자신들의 탐욕을 채웁니다. 이런 것들을 비판하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비판하지 마라!”고 응수하고, 아는 대로 100% 행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이용해서 “그러는 너는 100% 결점이 없느냐?”고 하면서 “너나 잘하세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반기독교’를 표방하는 이들은 개혁을 위한 건전한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일도 많지만, 언론에서는 어차피 자극적인 소재들을 뉴스로 다루다 보니, 극히 일탈적인 일들을 보도하는데 그치고, 일반인들은 그것을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고,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반성하고 회개하는 종교개혁적인 신앙고백까지도 왜곡 당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판하려면, 치부를 드러내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교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복합적인 문제로 인해 ‘교회’가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해도 ‘침묵’하는 이상한 현상이 한국에서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양’ 즉 ‘교회의 양적인 크기’가 ‘곧 진리’가 되어버린 이상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 나의 우상은 무엇인가?

 

사랑과 집착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집착’은 우상입니다. ‘스토커’가 그 단적인 예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는 자녀의 스토커로 활동합니다. 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입니다. 과연, 요즘 우리의 아이들은 행복할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게 하고 소홀하게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취미생활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라면 그 취미생활은 복의 통로이지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한다면 우상입니다. 우상숭배를 단지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 타종교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안에 우상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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