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23) 안식년과 희년(禧年)
출애굽기 23:10-13
십계명과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련된 법들은 모두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관련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종살이의 경험을 통해서 사회적인 약자가 당하는 아픔을 온몸에 새긴 이스라엘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그런 아픔이 없는 세상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은 구속하고 옥죄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을 위한 법입니다.
오늘은 안식일과 안식년에 대한 법에 대해서 살핍니다. 여기에 더해서 출애굽 본문은 아니지만,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안식일과 안식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안식일
안식일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를 마치시고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창 2:2)에서 유래합니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 날이며 거룩하게 하신 날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쉼, 그의 쉼을 따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도 함께 안식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가운데 거룩함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유일한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잘 지키면 나머지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계명들도 다 지키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안식일법은 그 모든 계명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은 ‘쉼’ 없이 노동을 착취당하던 이들에게는 해방의 소식입니다. 그들이 온전히 쉬려면 가축들도 함께 쉬어야 하고, 인간과 가축이 쉬면 비로소 땅도 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쉼’은 단순히 인간만의 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까지도 함께 쉼으로 확산합니다. 시편 8편에서의 ‘만물을 그(사람) 발아래 두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라는 뜻은 ‘구별된다.’는 뜻인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은 다른 모든 날처럼 똑같이 보내지 말고 구별되게 보내라는 말씀입니다. 보통이 날과 구별되는 것 중 하나가 ‘쉼’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행위’라고 하면 특별한 것을 자꾸만 떠올리는 데 ‘쉼’이 곧 거룩한 행위입니다. 거룩한 행위는 유별난 행위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룩하다거나 성령을 받았다거나 하면서 평상시와 다르게 행동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거룩하지도 않고, 성령을 받지도 못한 위선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성숙한 신앙은 일상의 삶과 신앙의 삶이 큰 차이가 없습니다.
▪안식년
안식일은 하루하루를 기준으로 삼아 지키는 것이지만, 안식년은 일 년 단위를 기준으로 삼아 일곱째 해가 되었을 때 지켜야 할 법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보십시오.
“여섯 해 동안은 땅에 파종하여 소산을 거두되, 일곱째 해에도 갈지도 말고 묵혀 두어서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이 먹게 하라. 밭뿐만 아니라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렇게 하라.”
더덕은 4년, 인삼은 6년 정도면 지력이 고갈되어서 뿌리가 썩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땅은 계속하여 같은 작물을 심지 않고 서로 다른 작물을 심어야 지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남도지방에는 논에 콩과의 식물 자운영을 심어 모내기하기 전에 갈아엎는 방법으로 지력을 유지합니다. 콩과의 식물들은 뿌리에 혹을 달고 있는데, 그것이 지력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칠 년째 되는 해에 파종하지 않고 휴경하면 지력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법을 만든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안식년에 대해서 이렇게 확장을 시킵니다.
땅을 묵혀두는 것은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아무런 인간의 수고 없이 안식년에 돋아난 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가난한 이들과 짐승의 몫으로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법전에서는 안식년을 확대하여, 빚을 탕감하는 해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또 안식년이 되면 종에게 자유를 주기도 합니다. 결국, 안식일과 안식년은 모두 ‘하나님 안에서 모든 만물이 편안하게 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날은 주인만 쉬는 날이 아니라, ‘소와 나귀’ 같은 짐승들도, ‘종의 자식과 나그네’도, ‘땅’과 같은 자연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삼라만상이 모두 ‘한숨 돌리는 날’입니다.
▪희년(禧年)=기쁜 해
레위기 25장 1-7절에는 안식년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8절부터 희년법이 등장합니다. 희년은 ‘기쁜 해’로, 안식년을 일곱 번 보낸 다음 해로 50년마다 한 번씩 지키라고 명령하신 규정입니다. 49년 일곱째 달 속죄일에 되면 뿔나팔을 불어 희년이 왔음을 선포하라고 합니다. 희년에 해야 할 일들을 레위기를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1)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공포하고,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고,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가라.
2) 파종하지 말고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포도를 거두지말라.
3) 거래를 할 때 속이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
4) 여섯째 해에 복을 주어 삼 년 동안 쓰기에 충분할 만큼 풍년이 들 것이다.
5)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팔지 마라.
6) 토지나 가옥을 팔았는데 무를 힘이 없으면 희년에 돌아올 것이다.
원상복구, 되돌림. 처음부터 다시 시작, 이런 말로 ‘희년’이라는 말은 정리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제로 희년이 실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희년의 정신은 이스라엘의 기본정신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 할 기본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
그러면 이제 안식일, 안식년, 희년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쉼’과 관련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쉼’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한국사회는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을 성실함의 표본이라 하고, ‘쉼과 놀이’는 곧 ‘게으름’인 것처럼 인식하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80년대 한강의 기적과 경제개발계획 정책으로 하루 세끼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뼈 빠지게 일하는 것’이 성실함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대한민국은 ‘뼈 빠지게 일하는 사람’들은 잘살지 못합니다. 게다가 24시간도 모자라서 25시라는 간판을 붙여놓고 일 년 365일 쉼 없이 일합니다. 그 일터를 지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일용직노동자들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청년 학생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대가를 제대로 받지도 못합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은 권리입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쉼의 시간을 갖는 것은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법규 때문입니다. 안식일법은 물론, 구속하는 법이 아니라, 참된 쉼을 주시기 위한 법입니다.
둘째는, ‘땅’과 관련이 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후 이스라엘은 12지파에게 땅을 골고루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희년법에 명시된 대로 50년이 되면 다시 ‘원상회복’되어야 했습니다. 땅을 사고팔 경우가 생길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소유를 늘리는 방편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거두고 배려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었습니다. 그나마도 50년이 되는 해에는 본래 소유주에게 돌려줘야 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동산으로 갑부가 되는 대한민국에서, 땅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지 벼락부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나라에서 희년법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이스라엘에서조차도 실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니 위로를 받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부동산’이 부의 축적의 수단이 되는 사회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심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는, ‘인간 중심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신 인간을 위한 규정들입니다만, 거기에는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도 있고 짐승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의 동역자로 삼아주시고, 창조하신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8절의 “다스리라!”는 말씀을 편의대로 해석해서 “인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씀으로 삼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오염시키는 일들을 자행한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 결과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제 모습을 잃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모든 생명이 충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은 자연 없이 살 수 없지만, 자연은 인간 없이 더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문자주의자들과 안식년
문자주의자들은 ‘일점 일획’ 운운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대적인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상징적인 언어도 있으며, 저술된 시대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수많은 상징적 언어는 로마제국의 박해시대를 상정하며 읽어야 하는데 그냥 문자 그대로 읽고 가져옵니다. 그렇게 몇몇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성경 구절에는 목을 매는 이들이 왜 안식일이나 안식년이나 희년법은 지키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뿐이 아니죠. 만일 문자로 우리가 성경을 받는다면, 오늘날 교회는 아마도 도축장이 되어야 할 것이요, 목사들은 도축전문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레위기 1장에 번제, 소제, 화목제의 예물을 드릴 때 번제물을 잡아 피를 뿌리과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을 분리하고, 불 위에 사르고……. 시대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비의 언어인 성경의 상징을 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