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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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경공부

출애굽기산책(22) - 사회적 약자배려

  • 관리자
  • 2017-03-22 07: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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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22) 사회적 약자배려
출애굽기 22:21-24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신 후에 실생활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법규들을 주십니다. 가장 먼저 20장 22-26절에서 ‘제단에 관한 법’을 주시며,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모든 곳에 임하셔서 복을 주시겠다(20:24)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종에 관한 법’을 주시면서 ‘종살이했을 때의 아픔’을 반복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어 ‘폭행에 관한 법(12-27)’이 등장하는 데 ‘폭행’은 힘 있는 자, 강자들이 행사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힘 있는 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임에 대해 세세하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20장 28-36절은 ‘소유자의 책임’에 관한 법규인데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것’은 ‘가진 자’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법규입니다.

이런 법규가 한결같이 향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인 약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21-24절의 말씀은 ‘도덕에 관한 법’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도덕이란, 곧 사회적인 약자를 배려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사회적인 약자였습니다. 이런 경험은 그들이 새롭게 이뤄가는 나라에서 다시 반복되지 않아야 했습니다.

 

▪폭력의 일상화

 

성경은 에덴동산 이후 사람들의 겪는 삶의 풍경을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들려줍니다. 가인은 장남이었고, 농사를 짓는 정착민이었습니다. 아벨은 차남이었고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강자요, 아벨은 약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강자가 약자를 세심하게 살펴주고 더불어 살아간 것이 아니라 강자 가인은 약자 아벨을 살해합니다. 강자 가인의 후예가 바로 우리요,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가인의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자의 폭력이 일상화될 때 이 세상은 전쟁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각자도생의 사회, 전쟁터와 같은 세상이 된 것은 바로 강자의 폭력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강자에 의해 자행되고, 폭력의 희생자는 또 자기보다 약한 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지배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우리는 이것을 진리인 양 제도교육을 통해서 배웁니다. ‘적자생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에 잘 적용해야 한다’는 말인데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마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인 양 배웁니다. 이것이 극대화된 것이 ‘승자독식’입니다. 이긴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갖는 것이죠. 우리 대한민국은 지금 약육강식, 승자독식과 이에 철저하게 적응된 이들만 살아남는 ‘적자생존’이 극대화된 사회입니다. 이런 세상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폭력적인 현상’들인데, 그 폭력적인 현상들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당연히 믿는 세상은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사회적인 약자를 배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폭력을 사용하려면 ‘돈’이나 ‘권력’이 필요합니다. 아니면 돈과 권력을 위해서 충성하고 그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기생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모두가 정직하지 않은 방법들입니다. 이런 토대 위에 세워진 나라는 ‘사상누각’입니다. 우리는 최근 대통령 탄핵이라는 불행 앞에서 이런 현상을 피부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폭력의 일상화’로 인해, 잘못을 저지를 이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인식조차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고, 그들의 폭력의 희생자였던 당사자조차도 자신들의 폭력의 희생물이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종살이하던 이들이 만들어가야 할 세상은 사회적인 약자들의 두려움이나 굴욕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며, 그들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해주는 세상이어야만 합니다.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늘 읽은 23절 말씀에서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의 삶에 개입하게 된 것은 그들의 ‘부르짖음과 아우성’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에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부르짖음이 곧 하나님을 그들의 역사에 개입하시게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오늘 새벽예배에서 읽은 예레미야서 33장 3절 말씀에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등장하는 나그네, 과부, 고아는 약자의 상징입니다. 이방 나그네는 다른 부족이나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사람입니다. 언제든지 사회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회적으로 혼란이 초래되거나 폭력성이 상승하게 되면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은 반드시 희생양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때 가장 좋은 희생양이 바로 ‘이방 나그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현상을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강대국의 난민정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을 피해서 나라를 떠난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도 이런 현상의 하나요, 1928년 일본에서 관동대지진 때문에 일본사회가 큰 혼란에 빠졌을 때, 재일교포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일, 최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정책 같은 것은 모두가 이런 맥락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이주민노동자’들의 불리한 노동조건들을 악용하여 그들을 착취하는 악명높은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들을 압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출애굽은 그렇게 억울하게 이방 나그네처럼 살아가던 이들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인데, 그들이 만든 나라에서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하나님에 대한 부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부나 고아 역시도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입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편이나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노동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고, 여성은 성을 착취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울부짖는 아벨의 핏소리에 귀를 기울이신 분이시고, 애굽에서 압제당하는 노예들의 부르짖음과 아우성에 응답하신 분이십니다. 사회적인 약자를 우리가 선대 하지 않음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약다를 괴롭히는 것은 하나님을 적으로 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남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함부로 하면 당장에는 그들만 아플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2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참으로 무서운 진노의 말씀이십니다. 물론, 우리 신앙의 실천이 이런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맹자는 측은지심은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맹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측은지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것이 무뎌졌을 뿐입니다.

 

기원후 4세기,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360년경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교황이자 황제였던 콘스탄틴은 그리스도교의 정통교리를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그 원칙은 로마제국의 통치에 해가 되는 그리스도교 사상을 이단이라는 이름을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무렵 활동하던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신학자가 구축한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원죄설’입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 스스로 구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도 유전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았고, 이런 ‘죄성’으로부터 구원되는 방법은 ‘신의 은총’ 외에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존재,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동역자, 더군다나 시편 8편 4-5절에는 아주 놀라운 말씀이 등장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원죄에 사로잡힌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처럼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4세기에 그리스도교의 근간을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유전적으로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죄인이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가난한 자들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로, 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측은지심이란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공감의 능력

 

짧은 영화 한 편을 보겠습니다. ‘신발 한 짝’이라는 제목의 4분짜리 영화입니다. 친구 목사님이 카톡방에 감동적이라며 올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짤막하게 ‘눈물이 나려고 하네’ 답글을 달았더니만, 다른 친구 목사님이 답변하기를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지’라고 답글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따스한 이야기를 보면, 약한 사람들의 아픔을 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아픔의 나의 아픔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아이들을 건강한 아이들로 키운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키운다는 것은 ‘공감의 능력’을 가진 아이들로 키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아이로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강자 독식의 세상에서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은 행복한 길이지만, 어려운 길이지요. 또 동시에 어렵지만, 행복한 길입니다. 이 길을 걸어가려면, ‘사회적인 약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한남교회가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규입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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