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21) 종의 인권
출애굽기 21:1-11
출애굽기 21장 1-23장 19절까지의 말씀을 ‘계약법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계약법전 첫머리부터 참으로 난해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이 종살이를 떨쳐버리고 자유인이 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종살이의 아픔을 아는 이들이 새롭게 만든 세상에서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에 관한 법’이 등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모세오경
성서학자들은 이 규범이 만들어진 것은 후대의 정착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후대의 정착생활을 배경으로 이 규범이 만들어졌지만, 편집상 계약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십계명과 함께 이어져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모세오경의 기록순서는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순이 아닙니다.
모세오경이 현재의 모습으로 되기까지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경로를 거쳤습니다. 기원전 13세기경에 활동하던 모세와 관련된 이야기들(출애굽 사건, 광야에서의 사건들, 시나이 계약 등)이, 기원전 10세기경(다윗-솔로몬 시대)에 글로 기록되기 시작하였고, 다양하게 문서화 되다가, ‘바벨론 유배’(587-538년)중에 집대성 됩니다. ‘토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은 기원전 4-5세기 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토라는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제작과정을 거친 것잊ㅂ니다. 특히, 모세오경이 집대성되던 시기가 ‘바벨론 유배’ 때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줍니다. 평화스러울 때에는 삶의 본질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모든 것을 상실하고 유배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자신들이 누려왔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자신들의 뿌리, 선조들의 이야기,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소중한 것임을 비로소 깨닫고 이를 문서(文書)화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참고적으로만 알아두어도 좋은 내용은 모세오경은, 야훼계 문헌(J), 엘로힘계 문헌(E), 신명기계 문헌(D), 사제계 문헌(P)의 합성체이며, 모세오경의 저자는 모세가 아니라 이 문헌을 저술한 ‘익명의 학자들’이라는 입장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신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계약법전’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종에 관한 규정은 십계명을 받은 후 광야생활을 할 때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훨씬 후대의 정착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계약법전이 만들어진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유심히 보면 신분질서에 의해 종이 된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떤 특수한 상황 때문에 종이 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고대사회에서 전쟁 때문에 종이 되는 경우보다는 빚에 몰려 종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열왕기하 4장 1절에 수련생의 부인이 엘리사를 찾아와 아들이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다고 호소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식을 종으로 팔아야 하는 현실이 만연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아모스서 2장 6절에는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파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종살이의 경험을 가진 이스라엘에게 종이 존재하는 현실은 모순이었지만, 그것이 또한 그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계약법전은 이상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의 문제도 도외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종’에 대한 규정입니다. 종에 관한 규정은 이중적입니다.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삼았을 때에는 여섯 해 동안만 주인을 섬기고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아도 자유인이 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레위기 25장 44-46절에는 외국인 중에서 취한 종은 영원히 종으로 삼아도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몇몇 차이들이 있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과 대동소이합니다. 그들이 최소한 동족들에게 만큼은 이런 규정을 만들어 지키게 한 것은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던 나그네, 종살이의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며, 또한 유배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심정이 담겨진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물질적인 가난’, 이것을 고대사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은 노예제도는 없어졌다고 하지만, 많은 근로자와 노동자들은 노예와도 같은 삶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기업주들은 합법적으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도둑질합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습니다. 물질 만능의 시대에서 수많은 청년이 정규직, 취업이라는 장벽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청년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당하게 자기의 몫을 빼앗기는 강도 만난 사람들이 도처에서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으로 대변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일은 오늘 이 시대 하나님을 믿는 이들과 교회가 관심을 두고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강도를 만난 다음에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강도를 만나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일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귀감이 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강도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 주로 사회구조의 문제를 통해서 이뤄집니다. 그래서 교회가 자선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회구조를 건강하게 바꿔가는 일에도 관심을 둬야 합니다.
저는 법적으로는 ‘노예제도’가 없지만, 노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 오늘 우리가 읽은 ‘계약규정’을 지키는 일은 바로 가진 자들의 이익만 일방적으로 보호해주는 불의한 시스템을 바꿔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난한 이들과 불의한 사회구조 때문에 고난 겪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이 계약법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나 단체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그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게 하는 가진 자들의 언어와 시선을 버리십시오. 그런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부르짖음에 민감하신 하나님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에 민감하신 분이시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과 계약관계를 맺게 된 것은 종살이의 아픔 때문에 더는 살 수 없다고 부르짖고 아우성치는 ‘부르짖음’이 시작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이 땅에서 가난하고 천하다고 손가락질당하던 사람들의 부르짖음과 아우성이 넘쳐나는 현장으로 가시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세를 보내시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간절한 부르짖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이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더는 노예가 아니라, 그들도 자신을 지배하던 이들과 똑같은 사람이요, 그들도 신의 대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더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임을 자각하게 되었고, 죄인이라고 정죄하던 그 사람들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임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 변화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는 길이 열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1절에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였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종에 관한 법은 물론이요, 이스라엘의 모든 계약법전의 기본정신은 여기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그네’는 고아, 과부와 함께 당시에 사회적인 약자의 대명사였으며, 그들은 사유재산은 물론이고 그들을 보호해줄 후견인도 없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종으로 전락할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종에 관한 법’은 얼마나 구체적인 법이요, 아름다운 인권선언입니까?
오늘날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노예에 관한 규정이지만, 당시 노예제도가 일상화된 현실에서 이 규정은 가히 혁명적인 법이었습니다. 특별히, 동족을 종으로 샀을 경우는 여섯 해만 종으로 부리고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하고, 만일 종살이를 하면서 아내를 얻었으면 아내와 함께 내어준다는 대목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오히려 의탁하면서 살아가는 방편일 수도 있었으며, 동족이 다른 민족의 노예로 팔려가는 일을 방지하는 역할도 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쁜 언어를 버리라
‘인권운동’이라는 말은 진보적인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진보’라고 하면 곧바로 ‘종북, 빨갱이’로 연결합니다. 사실, 보수냐 진보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은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옳은 진보냐, 옳은 보수냐?”입니다. 그런데 분단이데올로기가 만든 유령인 반공이데올로기는 툭하면 ‘보수와 진보’ 프레임으로 나눠서 ‘보수’라는 딱지만 붙이면 옳은 것이라고 착각하게 하였습니다. 역사에 기록될 2017년 3월 10일을 우리는 얼마 전에 보냈습니다. 저는 이번 일들을 지켜보면서 이 나라에서 없어져야 할 단어들, 우리가 그 단어에서 해방되지 못하면 영영 우리의 정신이 반공이데올로기라는 노예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악마적이고 우상적인 단어로 ‘종북, 빨갱이’를 생각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이 단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 단어를 무기로 사용하는 이들이 여전히 득세하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추잡한 단어를 죽이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지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런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용하지 않는 언어는 죽기 마련입니다.
저는 요즘 개인적으로 많은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거친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잠시 시원한듯하지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훈련이 필요하겠지요. 싸움이 벌어지면 욕을 하는 사람이 지게 되어있습니다. 이번에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를 결정도 결국은 그렇지 않습니까? ‘종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쁜 언어를 버리라’는 이상한 결론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만, 제 요지는 ‘나쁜 언어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씀이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종’과 같은 삶을 강요당하는 이들이 있으니, 부르짖는 자들의 아픔을 감싸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일도 중요하지만, 강도가 출몰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김민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