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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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성경공부

출애굽기산책(19) - 십계명(1)

  • 관리자
  • 2017-03-01 06: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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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19) 십계명(1)
출애굽기 20:1-9

 

시내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하셨습니다. 이에 출애굽한 히브리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순종하겠다.”고 약속함으로 ‘계약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시고, 강림하셔서 모세에게 계명을 주십니다. 그 계명은 노예의 삶을 살아가던 백성이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야 할 십계명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주심 계명 중에서 4계명,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지켜야 할 계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십계명을 크게 구분하면 1-4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 지켜야 할 계명이고, 5-10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 십계명을 이해하는 열쇠

 

출애굽기 20장 2절의 말씀은 십계명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는 말씀입니다.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에게, 지금 광야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유목민에게 주신 계명임을 생각하면 한 계명마다 담겨있는 깊은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킬 때에만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자유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약속의 땅에 들어가더라도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다시 노예와도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십계명의 핵심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십계명을 어기는 삶을 살아갔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 때문에 노예와도 같은 삶을 살아갔고, 그들의 회개하고 돌이킬 때에 하나님은 다시 그 삶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시대를 초월하여 십계명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이 되어 ‘거룩한 백성’의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에게 노예적인 습성을 벗어버리고 자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이므로, 우리를 옥죄기 위한 율법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법입니다.

 

▪1계명 –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십계명 중에서 십계명 전체의 핵심을 담고 있는 계명은 제1계명입니다. 아시는 대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어떤 분들은 타 종교에 대한 배척의 근거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 계명의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유일신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사실 고대 시대는 다신의 시대였습니다. ‘다신’이라는 말은 ‘다양하게 많은 신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다양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다르고, 심지어는 성경을 경전으로 삼으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서로 다른 ‘하나님’을 고백하는 예도 많습니다.

 

제 1계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나(하나님)과 다른 신’이라는 구분 속에 담긴 뜻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에서 짓밟힌 사람들,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 내일에 대한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억울해도 항의조차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박해를 당해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강자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자기 아이들의 목숨조차도 보호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어 그들을 출애굽시켜 주시고, 언약을 맺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반해서 ‘다른 신’은 누구입니까? 바로 제국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사상으로 작동했던 신입니다.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의 질서를 확인해 주는 신으로서 언제나 기득권자의 편에서 약한 자들으 권리를 박탈하는 신이 ‘다른 신’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풍요를 약속하고 다산을 약속하지만, 그 수혜자는 늘 기득권자입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바로 그런 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이 ‘다른 신’ 그것이 ‘우상’입니다. 단순히 ‘우상’이라고 하면 돌이나 나무나 금은동으로 만든 신상을 떠올리지만,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우리의 자유를 도모하려고 하는 모든 것들이 다 우상입니다.

 

▪제2계명 –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옛날 사람들이 만들어 놓았던 신상들이 많이 남아있고, 그 신상 중에는 신도들이 한 명도 없는 신상도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까요? 삶이 모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경험과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한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그 세계에 대한 무지 등으로 사람들은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대상물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의지하게 된 것이지요. 그것이 종교의 시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또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신을 만들곤 합니다. 이런 이유는 우리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에 드렸던 말씀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 없는 풍요를 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늘 헛헛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결핍감입니다. 사람들은 그 헛헛함을 채워줄 것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이런저런 물건을 사보기도 하고, 명예를 구하기도 하고, 권력을 탐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위한 열정으로 잠시 결핍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사람들은 또 그것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며 노심초사합니다. 욕망과 그것을 위한 질주와 성취 후의 두려움의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런 삶에는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사상에 사로잡혀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을 맨토로 삼고 기대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근본적인 불안감과 두려움을 해결해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상입니다.

 

그리고 제2계명에서 ‘만들지 말라’는 동사를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만들지 말라’는 단어의 의미는 히브리어로 ‘새기다 혹은 쪼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대한 신상들을 만드는데 누가 동원되었을까요? 노예들이었습니다. 오벨리스크라는 높은 석탑이 있습니다. 이 석조물은 고대 이집트, 에티오피아인들이 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며 일종의 해시계 역할도 했습니다. 태양신 아몬을 섬기던 그들의 상징이었습니다. 오벨리스크는 유럽에 거의 약탈 당하고 현재 5~6개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오벨리스크를 만드는 과정이 이전에 디스커버리라는 채널에서 방송한 적이 있는데, 채석장에서 거대한 돌을 캐내면 노예들이 양옆으로 나란히 앉아 정으로 돌을 쪼아 만듭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큰 고대 오벨리스크는 높이 32m, 밑바닥 4면체 길이는 2.7m이며 무게는 약 230t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최소한 몇 개월에서 몇 년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정과 망치를 잡을 수 있는 때부터 죽은 순간까지 뙤약볕에서 쉴 틈도 없이 돌을 쪼아야만 하던 사람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은 관광지로 변한 캄보디아의 유명한 ‘앙코르 왓’은 돌도 없는 그 밀림에 거대한 석조건축물을 지탱하고 있는 돌멩이마다 조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노예가 그 신상과 건물을 만들기 위해 죽었을까요? 종교를 빌미로 해서 수많은 사람을 노예적인 삶에 묶어놓고,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만들어진 신상, 이런 종교는 악마화된 종교이므로 마땅히 무너져야 하는 것이지요.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에는 과거 노예생활의 아픔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계명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예배당을 크게 짓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정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단순히, 쪼아서 만든 어떤 것을 섬기지 않는다고 우상을 만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는 길은 출애굽기 20장 6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제3계명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종교의 타락은 종교적인 언어가 본래의 뜻을 상실하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망령되게’라는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공허하게, 헛헛하게 또는 불성실하게, 경솔하게’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습관적으로 부른다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동원합니다. 오늘은 98주년 3.1절입니다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국의 보수대형교회는 어떤 짓을 했습니까? 똑똑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기도회를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했습니다. 더 길게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몹시 나쁜 사람들이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0장 7절에서 말씀하셨듯이 “죄 없다 아니 하리라” 하셨으니, 그 죄과를 분명히 받을 것입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들의 군복에는 ‘Gott mit Uns.(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힐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이름, 그것은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불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예수의 이름, 십자가, 성경 말씀이 조롱당하는 세상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로부터,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간다는 사람들로부터, 성경말씀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잊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은 사사로이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종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수단으로 어떤 이익을 얻겠다고 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신앙은 변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놓고 살아가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것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와 감사의 조건은 내가 달라고 떼를 쓴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삶으로 변화시키시기 바랍니다. 그런 작은 그러나 위대한 신앙적인 결단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릴 것입니다.

 

▪제4계명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선택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안식일은 예외도 없습니다. 종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가축과 나그네까지도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안식일이란 ‘샤바트’라는 말의 번역인데, 샤바트는 아카드어 ‘샤바투’ 라는 말 -‘신의 심장이 쉬는 날’-에서 온 것입니다.

안식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쉼’이라는 개념입니다. 오죽하면, ‘신의 심장도 쉬는 날’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안식일의 ‘쉼’은 단순히 휴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의미로 안식일은 축제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말씀은, 나를 위해서 살아오던 일체의 삶을 그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분주하게 나를 위해서 살아오던 삶의 리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리듬으로 숨을 고르는 시간이 안식일이지요. 세상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세우는 것, 이것이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노예로 살아갈 때, 이들에게 쉼은 없었습니다. 그들을 지배하던 이들이 쉼의 시간을 가질 때에는 그들의 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축조차도 쉬지 않으면, 가축을 모는 사람도 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안식일 법을 어기면 다시 노예와도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이후에 안식일법에 덧붙여지는 계명에서 안식일 법을 어기는 이들은 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쉴 줄 모르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좋은 일 같지만,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폭력적입니다. ‘해야 할 일’에 갇혀서 성과 위주의 삶, 일 중심의 삶을 살아가면서 인간을 일을 위한 수단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24시간 편의점만으로는 부족해서 ‘25시’라는 이름이 붙은 편의점도 생겼습니다. 쉼이 없는 삶, 이것이 과연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었는지는 잘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하루 다 소중한 날도 주셨지만, 특히 안식일은 복된 날로 삼아주셨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된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안식일을 주일로 지켰습니다. 물론, 로마제국이 평정하던 시대에 ‘sunday’라는 날이 주는 정치적인 의미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주일- 주님의 날’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몇 번째 날이냐는 의미가 아니라, 안식일이 담고 있는 의미와 상징을 주일에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1-4계명까지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지킬 계명에 대한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5-10계명,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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